제1225호 2023.1.29 일요일 (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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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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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판은 남녀가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고,
인격은 신과 천사들이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Reputation is what men and women think of us.
Character is what God and the angels know of us.
-Thomas P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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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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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햇볕이 먼저 든 곳은
저녁에 그늘이 먼저 들며 일찍 핀 꽃은
먼저 시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뜻을 품고 세상을 사는 사람은
잠시 재난을 당했다고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녀야 한다.
- 다산 정약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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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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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시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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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 한용운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의 이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을 바꾸는 님과 님에게야, 무슨 이별이 있으랴.
이별의 눈물은 물거품의 꽃이요, 도금한 금방울이다.
칼로 베인 이별의 키스가 어디 있느냐.
생명의 꽃으로 빚은 이별의 두견주가 어디 있느냐.
피의 홍보석으로 만든 이별의 기념반지가 어디 있느냐.
이별의 눈물은 저주의 마니주요, 거짓의 수정이다.
사랑의 이별은 이별의 반면에
반드시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이다.
혹은 직접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간접의 사랑이라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별하는 애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애인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한다면
무궁을 회전하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이끼가 끼도록
사랑의 이별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참'보다도 참인 님의 사랑엔,
죽음보다도 이별이 훨씬 위대하다.
죽음이 한 방울의 찬 이슬이라면 이별은 일천 줄기의 꽃비다.
죽음이 밝은 별이라면 이별은 거룩한 태양이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해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다.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요 보은이다.
애인은 이별보다 애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까닭이다.
사랑은 붉은 촛불이나 푸른 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마음을 서로 비치는 무형에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잊지 못하고
이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웃지 못하고
이별에서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인을 위하여는 이별의 원한을 죽음의 유쾌로
갚지 못하고 슬픔의 고통으로 참는 것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차마 죽지 못하고 차마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곳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애인의 포옹만 사랑할 뿐 아니라
애인의 이별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때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간단이 없어서 이별은 애인의 육 뿐이요,
사랑은 무궁이다.
아아, 진정한 애인을 사랑함에는 죽음은 칼을 주는 것이요,
이별은 눈물을 주는 것이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진이요, 선이요, 미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석가요, 모세요, 잔다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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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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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 오직 천명에 따를 뿐이다(강태공)
폭군의 횡포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원래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좋고 말재주도 뛰어났으며, 게다가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대규모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갈수록 자기 머리와 재주만 믿고 교만해졌다. 특히 절세의 미녀 달기를 얻고부터는 전형적인 폭군이 되어 갔다.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고 정사를 내팽개쳤으며,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비난하는 사람은 무조건 처형시켜 버렸다.
충신의 운명
당시에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3공이 있었는데, 바로 구후와 악후, 그리고 서백창이라는 충신들이었다. 그런데 폭군 주왕은 구후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그녀가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죽였으며, 이에 구후가 맹렬히 항의하자 그를 죽여 소금에 절여버렸다. 또 이를 악후가 비난하자 악후도 죽여 육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육포를 서백창에게 보내, "너도 눈밖에 나면 이 모양이 될 것이다."라고 겁을 주었다. 서백창은 그 육포를 보고 기가 막혔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한편 육포를 가져왔던 사자가 주왕에게 돌아와 서백창이 탄식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왕은 크게 노했다. 그리고는 곧장 서백창을 붙잡아 유리라는 벽지로 유폐시켜 버렸다. 그 후에도 주왕의 폭정은 그치지 않았다. 달기와 함께 죄없는 신하들을 '포락지형'에 처해 그 타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즐겼고, 또 '주지육림'을 벌여 벌거벗은 남녀들의 집단 정사를 즐기기도 했다.(사기 1권 '경국지색의 여인들' 편 참조) 더구나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만삭의 임산부까지 찔러 죽이는 만행을 일삼았다. 이때 은나라에 비간이라는 충직한 왕자가 있었다. 그는 주왕의 계속되는 폭정을 두고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해 주왕을 찾아갔다. "폐하,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시고 나라를 지키소서,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고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왕은 들은 척하지도 않았다. 비간이 몇 번에 걸쳐 호소했지만,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 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비간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 꿇어앉아 일주일 동안이나 있으면서, 계속하여 호소하였다. 그러자 주왕은 드디어 크게 화를 냈다. "네가 나를 이렇게 괴롭힐 수 있느냐. 그럼 좋다. 네가 그렇게 성인이란 말이냐. 내가 알기로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오늘 확인해 보겠다." 그러면서 비간을 죽이고 심장을 도려냈다. 한편 비간 왕자가 주왕에게 간하다가 궁궐 밖으로 쫓겨나 계속 호소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을 때, 현명한 선비로 이름높았던 기자가 비간을 구하기 위해 궁궐로 찾아갔다. 그러나 자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간 왕자가 처형된 뒤였다. 기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아! 이 나라는 정녕 끝났는가!" 그러면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사람으로 변장한 채 거리를 유랑하였다.
천하를 낚아올린 강태공
강태공은 동해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문을 좋아해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원래 가난한 집이었지만, 나중에는 끼니조차 이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몰래 도망쳐 버렸다. 그래도 그는 학문에만 매달렸다.
서백창과의 만남
한편 유폐되어 있던 서백창은 그 와중에서도 오히려 학문에 정진하여 드디어는 고금의 명저 "주역"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서백창의 부하들이 서백창을 구해내기 위해 주왕에게 미녀와 명마들을 뇌물로 바쳤다. 그러자 주왕의 입이 벌어졌다. "뭘, 이런 선물을 가져오는가. 명마들에 미녀까지. 이제 서백창도 많이 뉘우쳤겠지." 그러면서 서백창의 유폐를 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서백창은 풀려나 자기 영지인 주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서백창은 정치를 훌륭히 펼쳐 주나라의 세력은 날로 커지게 되었다. 또한 서백창은 나라를 더욱 발전시키려면 인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고 천하의 인재를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강태공이 시장에 나갔다가 서백창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부터 강태공은 강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때 강태공의 나이는 이미 70세가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강태공은 하루 종일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강태공은 모자도 팽개치고 옷까지 벗어버리며 화를 터뜨렸다. 지나가다 이 모습을 본 어부가 다가오더니,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강태공이 시키는 대로 하니 과연 잉어가 걸려들었다. 그리고 그 잉어의 배를 갈라보니, "장차 큰 귀인이 될 것이니라."라는 글귀가 나왔다.
한편 서백창은 사냥을 즐겼다. 하루는 사냥에 나가기 전에 점을 쳐보니, "얻은 것은 용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며, 큰 곰도 아니다. 사냥에서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데 필요한 신하이로다."라는 점괘를 얻었다. 그날 따라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 그냥 돌아오려는데, 멀리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멀리 보기에도 풍채가 범상치 않았다. 서백창이 바로 달려가 그 사람과 몇 마디 얘기해 보니 과연 뛰어난 인물이었다. "선조들께서 우리 집안에 머지 않아 큰 성인이 나타나 나라를 일으킬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그 성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궁궐로 모셔서 스승으로 삼았다. 그 사람이 바로 강태공이었다. 서백창은 그에게 태공망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는데, 이 말은 서백창의 아버지인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이후 강태공은 서백창을 도와 주나라를 크게 융성하게 했으며, 특히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그래서 강태공이 썼다는 병법책은 오늘날까지 전설적인 병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명에 따를 뿐이다
그 후 서백창은 대업을 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무왕이 즉위했는데, 그 역시 강태공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무왕이 즉위한 지 9년 되던 해, 무왕은 서백창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원정을 나갔다. 출정할 때 강태공이 전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출정하도록 하라. 늦는 자는 목을 베리라." 그러자 전군은 일사분란하게 대오를 갖췄다. 군대가 막 황하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왕이 탄 배에 흰 고기가 뛰어 올랐다. 무왕은 이 고기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냈다. 이윽고 무왕이 강을 건너자, 이번에는 강 상류쪽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러더니 무왕 앞에서 붉은 까마귀로 변했다. 당시에 은나라의 상징색은 흰 색이었고 주나라는 붉은 색을 상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흰 고기가 무왕에 잡힌 것은 은나라가 무왕에게 멸망당함을 의미했고, 붉은 까마귀가 날아든 것은 주나라가 천하를 잡으리라는 징조였던 셈이다. 더구나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방에서 제후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그 수가 무려 8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입을 모아, "지금 당장 은나라를 쳐버립시다."하고 요청했다. 그러나 무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아직 천명이 은나라를 떠나지 않았소." 그리고는 군대를 되돌렸다. 2년 후 드디어 무왕은 전국에 포고문을 발표했다.
"백성들에게 고한다. 옛말에 암탉아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은나라 주왕은 달기의 말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하늘을 공경할 줄 모르고 포악한 정치를 일삼아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이고 있다. 나는 이제 천명을 받들어 은나라를 토벌하려 한다. 지금 토벌하지 않으면 천하가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다.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워라. 도망하는 적은 죽이지 말고 우리 나라 일꾼으로 만들라. 모두 일어서라!"
그리하여 주나라의 10만 병력은 은나라 공격에 나섰다. 총사령관은 강태공이었다. 강태공은 군대를 이끌고 은나라 서울 근교에 있는 목야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들은 주왕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제까짓 놈들이 나를 친다고!" 그러면서 70만 대군을 이끌고 목야로 나갔다. 그런데 주왕의 군대는 주로 노예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싸울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주나라가 이기면 자기들도 자유롭게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강태공은 정예병 백 만으로 선제 공격을 했다. 그러면서 사기를 높인 후 일제히 쳐들어갔다. 이에 은나라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거꾸로 메고 나가 오히려 주나라 군대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순식간에 승패는 결정되었다.
주왕은 간신히 도망쳐 궁궐에서 달기와 함께 스스로 불에 뛰어 들어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하여 은나라는 망하고 폭군 주왕도 죽었다. 무왕은 주왕이 죽은 곳으로 가서 먼저 그 시체에 화살 3개를 쏘고 다시 칼로 친 다음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목을 잘라 흰색 깃대에 걸었다. 그리고 나서 구후, 악후, 비간의 무덤에 제사를 모셨으며 무참하게 죽은 임산부도 잘 거두어 묘소를 만들어 주었다. 또 기자의 아들을 찾아내 벼슬을 주었다. 은나라 백성들은 이러한 무왕의 처사에 크게 감동하게 되었다.
궁팔십 달팔십
'궁팔십 달팔십'은 강태공이 80년을 가난하게 살다가 80년을 영광스럽게 살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가 천하를 평정하는 데 일등공신으로 인정되어, 고향인 상동 지방에 있는 제나라의 제후로 임명되었다. 강태공은 제나라로 가면서 서두르지 않은 채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길 가던 노인이 말했다. "때란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쉽습니다. 이렇게 늑장만 부리시다니 큰 일을 하러 나선 분 같지 않소." 이 말을 들은 강태공은 한밤중임에 불구하고 부하들을 당장 깨워 출발 명령을 내려 서둘러 달려가도록 했다. 날이 밝을 무렵 강태공 일행은 제나라 땅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랑캐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양측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간신히 오랑캐들을 격퇴한 강태공은 그 고장의 풍습을 존중하면서 제도를 정비했다. 그리고 특산물인 소금생산과 수산업을 크게 장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어 번성을 자랑하게 되었다.
엎지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어느 날 강태공이 수레를 타고 시찰을 나갔다. 어떤 거리를 지나치고 있는데, 낯이 익은 노파의 초라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수레를 돌려 살펴보니 옛날 자기를 버리고 도망친 아내가 아닌가! 그녀는 다시 같이 살 수 없겠느냐고 애원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물을 한 그릇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물을 쏟은 후 그녀에게 그릇에 다시 주워 담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담을 수가 없었다. "한번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오. 마찬가지로 한번 끊어진 인연도 다시 맺을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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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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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절현(伯牙絶絃)
伯:맏 백. 牙:어금니 아. 絶:끊을 절. 絃:악기 줄 현.
[준말] 절현(絶絃). [동의어] 백아파금(伯牙破琴).
[유사어] 지음(知音), 고산유수(高山流水).
[출전]《列子》〈湯問篇〉
백아가 거문고의 줄을 끊었다는 뜻. 곧
① 서로 마음이 통하는 절친한 벗[知己]의 죽음을 이르는 말.
② 친한 벗을 잃은 슬픔.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 높은 백아(伯牙)에게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 주는 친구 종자기(鐘子期)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과 큰 강의 분위기를 그려내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귀를 기율이고 있던 종자기의 입에서는 탄성이 연발한다.
“아,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솟는 그 느낌은 마치 태산(泰山)같군.”
“응, 훌륭해. 넘칠 듯이 흘러가는 그 느낌은 마치 황하(黃河)같군.”
두 사람은 그토록 마음이 통하는 연주자였고 청취자였으나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백아는 절망한 나머지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기(知己)를 가리켜 지음(知音)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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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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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초보는 역시 초보야
운전면허증을 따고 운전이 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은 중독증에 걸려 신랑에게 애원하고 사정해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차에는 손도 못대게 하고 운전수 옆 조수석 자리에만 앉혀놓기를 3개월째. 무지무지 속이 상했습니다. 그 인간은 운전하고 싶어하는 저의 간절한 열망을 무시한 채 지 혼자 잘도 하데요. 그 차는 제가 돈을 더 내서 산 건데.... 운전대도 못 잡아보게 하고, 추접더럽게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만 만져도 천원을 받는 그런 비열한 인간이 바로 저의 신랑이랍니다. 한번은 운전을 가르쳐 준다기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꿈을 잘 꾸었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며 운전을 했지요. 잘 간 것 같더구만 이놈의 웬수는 저보고 멍청이라 하지를 않나, 칭찬은 못해줄망정 "너는 안되겠다. 너무 못한다. 나는 내릴랑께 니 혼자 하고 가라."면서 무시하지를 않나, 좌측 깜빡이를 넣어야 하는데 안 넣고, 좌측으로 끼어들 때면 대번 깡통 깨지는 소리가 난답니다.
"너 죽을라고 환장을 했냐?"
너무나 비열하게 저의 자존심마저 깡그리 밟아버리지 뭡니까. 속으로 더러워서 못 배우겠다를 연신 외치며, 그래도 참자, 참아야 한다를 수도 없이 외치면서 참았습니다. 그치만 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랑한테는 더러워서 못 배우겠더라구요. 혼자 몰고 다니면 다녔지 신랑에게 배울 건 못 된다 생각했지요. 전 다시는 신랑에게 안 배운다 결심을 했고, 신랑이 없는 날 무조건 몰고 나갈 계획을 밥만 먹으면 세우곤 했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신랑 직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술을 마시고 새벽에야 들어올지 모른다며 일찍 들어와 차를 두고 갔지 뭡니까. 오늘이 하늘이 내려주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시장에 김칫거리랑 반찬거리를 사러 가기로 결심했고, 어째 맨정신으로 운전대를 잡는 게 겁이나 소주 2잔을 연거푸 마셨습니다. 역시 소주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소주를 마시니까 너무너무 좋았어요. 기분은 죽여주고 뭐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운전대를 잡기 위해 떨어야 하는 것도 소주 때문에 차분하게 잡을 수 있었고, 1단 기어를 넣고 출발할 때도 술 안 먹고 할 때보다 더 스무스하게 잘 빠져 나가고, 이건 어찌된 건지 두려움이란 손톱만큼도 없고, 되레 자신만만해지기까지 하더라구요.
"운전 흥, 뭐 아무것도 아니구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렵더니 며칠 사이에 금방 느는구만. 뭐 운전처럼 쉬운 것도 없네. 애게애게 아무것도 아닌데 유세하기는. 아이고 더럽다, 더러워. 흥 그래 너 두고 보자. 여자가 운전하기만 하면 차분하게 남자보다 몇 배 더 잘한다더라. 조금만 기다려라. 비열한 인간, 너를 태우고 드라이브시켜주마."
저녁이라 주위가 어두웠는데도 운전을 잘하는 제가 스스로 기특했습니다. 몇 분만 가면 시장이 나올 건데 사고가 났는지, 신호 못 가서 차들이 빠져 나가지를 않고 밀리는 겁니다.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빼꼼이 내고 앞쪽을 보니 이건 웬일인지 경찰 아저씨는 분명한데 빨간 몽둥이를 들고 차를 일일이 세우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게 음주측정하는 건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근데 지나가는 아저씨가 음주측정한다고 일러주지 뭡니까. 웬 음주측정? 소주 2잔 마신 덕분에 차분했던 저의 가슴은 음주측정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두근두근을 넘어 아예 벌렁벌렁,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했고 얼굴과 손에 식은 땀은 줄줄줄 흐르고 이건 정말 환장하겠더라구요. 음주측정한다는 걸 몰랐을 때는 차가 더럽게 빠져 나가지 않더니만, 음주측정한다는 말을 듣고 나니 잘도 빠져 나가데요. 저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지요. 소주 2잔 마셨으면 음주측정에 제대로 나올 건데.... 이건 큰일났지 뭡니까. 평소 술을 즐겨마시는 것도 아니고, 용기있게 운전하려고 딱 2잔 했는데. '이거 한 번 죽어라 사정해봐, 아님 안 마셨다고 처음부터 잡아떼.'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이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박하사탕이 굴러다니드만.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겁니다. 껌을 찾아봐도 마찬가지구요. 정말 미치겠데요. 자꾸만 앞차가 안 보이고 긴장을 하다보니 제 몸의 보일러는 물을 빼주라고 난리죠, 금방 나오려는 걸 참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막 주려는 순간 급기야 올 것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제 앞에 경찰아저씨가 빨간 몽둥이를 들고 흔들어대는 게 보였습니다. 전 완전히 죽었다 생각했죠.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래 딱 한 번만 죽자.' 제가 이렇게 결심을 했을 때 경찰 아저씨는 저에게 음주측정기는 대지 않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하며 거수 경례를 하지 뭡니까. 즉, 그냥 통과하라는 거였습니다. 제가 여자였기에 당연히 술을 안마셨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보내준 겁니다. 여자로 태어나길 정말 다행이라고 생전 믿어보지도 않았던 부처님, 하느님을 찾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전 그곳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지만 벌렁벌렁한 저의 가슴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답니다. 여전히 콩콩콩 숨가쁘게 단박질을 하는 겁니다. 시장에 무사히 도착해 차도 있겠다 몽땅 사고 나왔는데 좁은 일방통로 시장통에 갑자기 차들이 많이 주차해 있는 겁니다. 제가 아까 주차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없었는데 빠져 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빽빽이 주차해 놓았지 뭐예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시장 나오기전 마셨던 소주 2잔의 알코올이 다 빠져 나갔나 운전대를 잡으려고 하니 다시 벌렁대고 쾅쾅 단박질을 하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게 아닙니까. 더구나 아까부터 제 몸의 보일러 물은 빼주라고 난리구요. 시동을 걸고 1단 기어를 넣고 출발하려는데 클러치를 너무 빨리 떼서 그런지 눈깜작할 사이에 일이 터진 겁니다. 대체로 여자의 직감은 예민하데요. 바로 앞에 있는 트럭을 박고 말았답니다.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았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길래, 후진 기어를 넣고 후진하는데 이건 또 웬일입니까? 뒤에 있는 승용차를 쿵하고 박은 겁니다. 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얼른 이곳만 빠져 나가야지 생각하며 1단 기어를 넣고 우측으로 빠져 나갈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우측에 있는 봉고차의 옆구리를 다시 한 번 박고 말았습니다. 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차가 그렇게 약하다는 걸요. 손이 부르르 떨려 도저히 차를 뺄 수가 없었습니다. 운전 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답니다. 죽는 건 돈뿐이지만 전 나머지까지 다 죽여버렸어요. 살인 운전면허증을 죽여버렸고, 보해 소주 25도를 죽였습니다. 결국 5년이 지난 지금도 소주 한 잔 못 마시고, 운전대 잡으려고 천원 주지도 않을 뿐더러 신랑은 운전대 잡으면 이젠 만원 준다고 다시 한번 잡아보라고 그러지만, 그까짓것 십만원을 준다 해도 안하고 말겁니다. 그날의 김칫거리랑 반찬거리는 몽땅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고, 운전에 운자만 나와도 5년 전 저의 충격은 치를 떨게끔 도사리고 있지 뭡니까. 청취자 여러분! 우리 모두 음주 운전은 절대 하지 맙시다. 고맙습니다. 아참, 그때 보일러 물은 어떻게 됐냐구요? 3번째 봉고를 박을 때 자연스럽게 저도 모르게 빼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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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송건호 편"(1927~2001)
평론가. 충북 옥천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한국 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과 경향신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저서에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 있다. 역사적 안목의 비판이 실린 많은 평론. 에세이를 발표했으며 한국 지성의 현실과 문제를 일깨우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선비 정신
기사도, 무사도
선비 예찬론이 심심찮게 저널리즘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다시피 선비는 이조 5백년간 양반들의 이상적 지식인상으로서 중세 유럽의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처럼 지난날의 이상상이지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인간상은 못 된다. 원래 이상적 인간상이란 나라나 시대마다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며 선비가 우리 사회의 이상이 된 것은 그 때 양반 신분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유럽에 기사도가 있고 일본의 무사도가 생긴 것도 제각기 중세의 봉건제가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한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시민 사회에서 이런 인간상이 필요 없게 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한데 근래 '선비론'이 새삼스럽게 대두되고 심지어 예찬론마저 들리게 된 것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한말로 '선비'는 이조의 신분 사회에서 지배층, 즉 양반들의 도의적 규범이라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선비'는 원한다고 아무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상이 아니었다. 선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양반이라는 신분에 국한되었으며 상민은 아무리 인격과 학식을 겸비해도 선비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선비는 철저하게 비민중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훌륭한 선비는 민중 앞에 초연해야 했으며 민중이란 '따르게 하고 알려서는 안 될 중우'에 지나지 않았다.
선비는 또 철저하게 비세속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값을 물어 보는 법이 없다'는 것이 선비 생활의 이상이라고 했다. 세속적인 문제는 일체 알려고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오로지 대의를 논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라고 했다. 선비의 생활은 한말로 관념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18세기 말엽 이 땅을 찾아온 유럽의 선교사와 여행자들이 코리아의 양반 생활의 너무나 가난하면서도 빈궁 속에 태연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례가 많았다. 이런 형이 선비의 이상이라면 오늘의 우리에게 선비형 인간이 바람직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데 이처럼 전시대적 인간상인 선비가 오늘날 왜 새삼스럽게, 심지어 예찬까지 받게 되었는가. 4.19를 계기로 한때 구세대가 지탄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구세대는 썩었다' '나라를 못쓰게 망쳐 놓았다'해서 마치 부정 부패의 상징처럼 공격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사실 구세대는 이런 공격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8.15 후의 정치, 경제 생활이 줄곧 상궤를 벗어나 혼란을 거듭한 것을 볼 때 비난의 적이 된 것도 무리라고만 할 수 없었다.
선비 대망론
그러나 지금 시대는 어떤가. 오히려 그 전 시대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일신의 출세와 안락을 찾아 변절을 해도 전처럼 수치는 고사하고 오히려 선망하는 풍조조차 생겼고, 부정 부패의 형태도 더욱 지능화되어, 도대체 도의적 처신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됐다는 평이다. '부조리 일소'란 구호 아래 당국의 정화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나 이른바 '윤리 도덕'의 타락은 상은 물론 사회 저변에까지 만연돼 일소 용이찮다는 말이 들린다. 국민 전체가 도의 의식이 타락됐다는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선비'의 예찬, 선비형 인간의 대망론이 대두하게 된 것도 아마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선비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시대적 성격이 짙기는 했으나 한편 오늘의 시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미점이 없지도 않다. 비민중적이며 세속에 어둡고 공리 공론을 일삼는 관념적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때로 그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기를 대의를 위해 발휘하기도 했다. 직언을 하면 왕의 노여움을 사 목이 달아나는 것이 뻔한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태연히 간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관군이 무색하게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우는 등 충의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옳은 일을 위해선 서거정의 말대로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지 않는' 대쪽 같은 절개를 보이기도 했다. '사색당쟁'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옛 선비에 변절이란 도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들 손자대에까지 그들은 일편단심 변할 줄을 몰랐다. 매천같이 초야의 일개 무명 선비조차 망국을 보다못해 순국을 했다. 선비로서 의병 대장 또는 순국 열사로 길이 청사에 빛날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의 그 굳은 지조, 순국의 애국 사상, 안빈 도락하는 생활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긍정적 면에서 선비의 좋은 점을 오늘의 시대에 되살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은 것이 없다. 일본의 무사도, 유럽의 기사도는 근대에까지 무엇인가 전통을 남겼고 현대 사회에 긍정적으로 일부 계승된 족적이 남아 있으나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는 우리 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선 그들의 전근대적 성격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선비에게는 세속적인 면, 가령 경제 활동에 너무나도 무능했다. 경제 활동을 극도로 천시했으므로 더욱이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 남을 능력이 없어 의를 지킨 '선비'일수록 경제적 낙오자가 되었다. 또 하나는 그들의 비민중성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엔 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는데 '선비'는 그들의 생리로 보아 3.1운동 이후의 민중적 차원의 항일 운동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김창숙 등 일부 유생에 대쪽같이 곧은 절개는 남아 있었으나 거의가 개인적 숭절에 불과했고 역사적 항일 조류에서는 사실상 소외되었다.
경계할 복고풍
그 자체 내에 이 같은 취약점이 있은데다 일제의 적극적인 회유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당했을 때 그들은 특히 유림의 포섭에 주력했다. 즉 합방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한 정부 요인들에게 작위를 주어 '은사공채'를 발행, 막대한 액수인 이자로 편안한 여생을 보장해 주었고, 이 밖에 정부 관리를 지낸 자 3천 5백 59명, 양반, 유생 9천 8백 11명에게 각각 후한 이른바 '은사금'을 뿌렸다. 구한국 정부의 관리란 으레 양반 유생 출신이며 과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말하자면 유생이므로 그들은 특히 유생의 회유에 주력한 것이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유생은 일제에 포섭되고 나머지 수절한 유생들은 사회적으로 영락하고 게다가 항일 운동에서조차 소외되어 이조 5백 년간에 걸친 자랑스러운 선비의 전통은 이렇게 허무하게도 붕괴되고 말았다. 초야에 묻혀 살던 무명의 선비 황현이 스스로 자결의 길을 택한 것도, 5백 년간에 걸친 선비의 전통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나라는 망했는데 명색 선비란 사람들이 너나없이 일신의 안락을 위해 일제의 은사금을 타먹기에 급급하는 것을 보다못해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황현과 전후해 자결한 20여 명을 마지막으로 이조의 선비 정신은 사실상 전통이 끊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대두된 것은 이미 사라진 이 같은 선비 정신을 그리워하는 심리라고 보겠는데, 이는 그만큼 오늘의 세대가 혼탁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선비 예찬은 오늘의 시대에 긍정적 구실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비 예찬이 복고풍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 선비란 중세 신분 사회의 양반층의 이상상이므로 선비 정신은 반민중적이 되기 쉽고 현실 의식의 결여, 생활 능력의 부정 등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초연한 생활인을 그렇게 부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선비를 이렇게 보고, 이런 뜻에서 선비 대망을 한다면 현대 사회에 있어 선비는 긍정적 구실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가 요구하는 선비는 대중을 무시하는 고고형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같이 호흡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선비는 공리 공론을 일삼는 관념형 인간이 아니라 현실 의식에 투철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하려는 이념형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 사회가 기사 정신을, 일본이 무사도를 근대 속에서 새롭게 그 정신을 계승했듯이 우리도 선비 정신을 오늘의 시민 사회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는 자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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