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하지 못한 마음은 쉽게 물든다
만약 손에 상처가 없다면 비록
뱀의 독을 만졌다 하더라도 아무런 탈이 없다.
흠집이 없는 건강한 손에는
독과 균도 위험하지 않은 법이다.
사람이 악에 쉽게 물드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건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잠바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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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예술 - 한용운
모든 곁에 쉬어지는 한숨은 봄바람이 되어서, 여윈 얼굴을 비치는
겨울에 이슬꽃이 핍니다.
나의 주위에는 화기(和氣)라고는 한숨의
봄바람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수정이 되어서, 깨끗한
슬픔의 성경(聖境)을 비칩니다.
나는 눈물의 수정이 아니면, 이 세상에 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숨의 봄바람과 눈물의 수정은, 떠난 님을 기루어하는
정(情)의 추수입니다.
저리고 쓰린 슬픔은 힘이 되고 열이 되어서,
어린 양과 같은 작은 목숨을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님이 주시는 한숨과 눈물은 아름다운 생의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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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白眉)
白:흰 백. 眉:눈썹 미.
[출전]《三國志》〈蜀志 馬良傳〉
흰 눈썹[白眉]을 가진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는 뜻. 곧
①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②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을 일컫는 말.
천하가 위(魏)/오(吳)/촉(蜀)의 세 나라로 나뉘어 서로 패권을 다투던 삼국 시대의 일이다. 유비(劉備)의 촉나라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마량(馬良)이라는 이름난 참모[후에 시중(侍中)이 됨]가 있었다. 그는 제갈량[諸葛亮:자는 공명(孔明)]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사이로, 한번은 세 치[三寸]의 혀 하나로 남쪽 변방의 흉포한 오랑캐의 한 무리를 모두 부하로 삼는데 성공했을 정도로 덕성(德性)과 지모(智謀)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오형제 중 맏이인 마량은 태어날 때부터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백미(白眉)’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들 오형제는 ‘읍참마속(泣斬馬謖)’으로 유명한 마속을 포함하여 모두 재주가 비범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 씨(馬氏)네 오형제 중에서 ‘백미’가 가장 뛰어났다며 마량을 특히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 때부터 ‘백미’란 같은 부류의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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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다 큰 처녀가 웬 소아과(?)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는 푸른 계절입니다. 저는 24살의 꽃다운 나이라고 하기엔 약간 시들어가는 꽃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저는 푸릇푸릇한 영계라고 자부하고 살아간답니다. 제가 왜 이렇게도 영계라고 강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답니다. 저의 어릴 적 18살 때의 황당한 얘기를 들어보시면 아-, 그렇구나 하실겁니다. 지금부터 7년 전 제 나이 18살 때에 감기가 심하게 들어서 병원에 갔던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구미에 있는 모 종합병원 접수 창고에서 접수를 마치고 기다리는데 "손태영씨 2층에 있는 내과로 가세요."하는 소리에 의료보험 카드와 접수증을 가지고 2층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내과에 갔더니 글쎄 이번에는 "복도 끝에 있는 소아과로 가세요."하질 않겠어요. 저는 "예?"하고 되물었죠. 그런데 그 간호사는 무신경으로 "복도 끝에 있는 소아과로 가세요."하는 겁니다. 전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한마디 핀잔을 받을 것 같은 분위기라서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고 결심했고 복도 끝에 있는 소아과로 갔답니다. 그때가 고2, 다 큰 처녀가 웬 소아과냐? 궁시렁대면서 소아과로 들어섰더니 미끄럼틀이며 그네, 여러 가지 장난감이 놀이방처럼 꾸며져 있었습니다. 간호사에게 보험카드를 내고 돌아서는데 그 간호사는 또 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기는 놀이터에서 잠시만 놀려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간호사를 저는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간호사는 제가 당연히 보호자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오늘은 뭔가 일이 자꾸 꼬이는 날인가 보다 하고 빨개진 얼굴로 의자에 앉아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한술 더 뜬 충격적인 호출이 들리는 겁니다.
"손태영 어린이, 들어오세요."
간호사 언니의 목소리와 함께 제가 벌떡 일어나 들어갔더니 자꾸 제 얼굴만 쳐다보면서 아래위로 쭉 훑어보더니 자꾸만 제 뒤쪽을 돌아보더군요. 아마도 저를 보호자인 줄로만 알고 아기를 찾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창피하던지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은데도 꾹 참고 병실에 들어서는데 소아과에 들어온 환자들은 다들 체중을 재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체중계가 그냥 보통 체중계와는 다른 웬 아기 바구니 체중계인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바구니에 두 다리를 올리고 체중계에 올라서자 소아과 병실에 모인 보호자(아줌마)들의 이상한 눈길과 표정들이 저를 향했습니다. 정말 창피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관문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진료실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의사 선생님이 멍하니 위아래로 쭉 훑어보시더니 자꾸만 차트를 뒤로 넘겼다 앞으로 넘겼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간호사의 눈치에 의사선생이 청진기를 대고선 웃옷을 걷으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소아과 의사생활 이날까지 하면서 이렇게 성숙한 소아는 처음일세."
하시면서 "허허"너털웃음을 지으시는 겁니다. 알고 봤더니 만으로 15세까지는 소아라고 하는데 제가 호적상 2살이나 작고 또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집 나이보다 3살이나 적은 15살 손태영 어린이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료가 끝난 뒤 약국에서 약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소아과 약은 따로 타는데 마이크에서 OO아기, OO아기 하고 부르는데 어김없이 손태영 아기 하고 제 이름 석자가 불려지는 게 아닙니까? 어이쿠! 고개를 숙이고 약을 타는데 주사가 있다고 하더군요. 정말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꼭 맞았습니다. 소아과 주사실에는 침대가 서너 개 정도 놓여 있을 뿐, 문이라고는 따로 없는 것입니다. 주사실에 들어섰더니 두 명의 아기가 엄마의 보호 아래 주사를 맞고 있는게 아닙니까. 저도 그 틈에 끼어서 간신히 주사를 맞긴 맞았는데 문은커녕 커튼조차 없는 주사실에서 하얀 엉덩이를 다 큰 처녀가 드러내고 주사를 맞자니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더군요. 이렇게 병원에서 약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약 봉투를 열어보고 저는 정말 울고 싶어졌습니다. 빨간 딸기향의 물약과 가루약 몇 봉지가 들어 있었걸랑요. 황당함과 당황함을 한꺼번에 경험을 해서인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입가에 웃음이 번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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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류주현편" (1921~1980)
소설가, 경기도 여주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수학. 한때 국방부 편수관 역임. 인간, 역사, 현실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입체적인 구성력으로 다채로운 소재를 소화해 낸 작가이다. 초기에는 단편 소설을 주로 썼으며 1964년 장편 소설 "조선 총독부"를 발표하면서부터는 대하적 기록 문학을 통하여 독특한 역사관을 보여 주었다. 100여 편의 단편과 20여 편의 장편을 발표한 다작 경향의 작가였다.
신의 눈초리
문학의 필요성과 그 사명
문학자는 시대의 증인이고 그 작품은 시대의 중언이기를 소망한다. 한 시대의 특성을, 그 시대를 사는 개성 있는 인간을 잘 묘출해 내서 현재를 관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문학자의 사명이고 문학의 본질적인 권능이다. 인간상이거나 시대 사조거나 그 고유한 특성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작품이면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오랜 생명을 갖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 작품에서 창조된 사회상이나 인간사는 우리가 혐오하는 양상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 일상적인 권태로운 소시민의 외면적인 조소에서 시작하여, 차원 높은 내면 세계로의 심화를 상징시키는 설득력 있는 꿈의 조형으로 승화되는 예도 있다. 그 어떤 경우거나 문학은 현실적인 토양에서 싹이 돋아난다. 한 시대, 그 인간들에 의하여 창조되고 가꾸어지고 수확이 된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남겨진다. 한 시대의 증인으로 남겨진다. 문학이야말로 작가나 독자가 책임있게 사명감을 가지고 함께 가꾸어 놓아야 할 그 시대의 꽃이고, 다음 세대에 뿌려질 꽃씨다.
현대처럼 인간 자체가 인간들에 의해서 매몰되고 소외된 적도 없다. 인간들의 비명이 기계 소리에 함몰되어 스러져 버린다. 인권과 자유를 가장 숭상하는 체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짓밟는다. 더욱 비명을 지르며 실망한다. 자신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결과에 실망을 한다. 그런 시민 사회의 정신적인 불안은 어떤 외부적인 처방이나 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의 각성이 병들어 가는 자신의 지각 신경을 꼬집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길밖에 없다. 새삼 문학의 역능이 기대된다. 문학은 문학자 개인의 소산이지만 그가 처해 있는 풍토적인 바탕에서 움트고 자라난다. 풍토는 우리 모두가 딛고 서 있는 지층이며 개성이다. 그리고 정신의 바탕이다. 작가의 고발이 과장되더라도, 이념 추구가 비록 공전되고 있더라고 그 특질이 인간의 고뇌이며 인간힘이라면, 그리고 인간성의 재발견에 있다면, 작가나 작품에 대한 사회적인 오해는 정신적인 인색에서 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 노하고 고민할 때일수록 마음 속에서 신의 눈초리를 발견한다. 신은 하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 속에 숨어 있다. 불세출의 영웅이 섬약한 소녀의 가슴을 유린할 때도 반드시 그는 신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부딪친다. 사람들이 그 신의 눈초리를 의식할 수 있는 동안에는 리에게 문학이 필요하다. 문학은 그런 신의 눈초리로서 사람들 가슴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그 눈초리를 대할 때 의식이 필요 없어야 한다. 의식이 필요 없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신과 친숙해진다. 그것은 공감을 뜻한다. 문학은 작가와 작품과 독자의 공감이 일체화됨으로써 비로소 그 준엄한 사명을 다 한다. 그러한 작가. 작품. 독자의 풍요로운 합창으로 이 땅에 문학이 활짝 꽃 핀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