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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2호 2023.1.6 금요일 (음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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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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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맨 처음 하는 악수, 아기가 고사리 손으로 부모의 손가락을 감아 쥐는 악수야말로 가장 뜻깊고 훌륭한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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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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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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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 김수영
네 머리는 네 팔은 네 현재는
먼지에 싸여있다 구름에 싸여있고
그늘에 싸여있고 山에 싸여있고
구멍에 싸여있고
돌에 쇠에 구리에 넝마에 삭아
삭은 그늘에 또 삭아 부스러져
거미줄이 쳐지고 망각(忘却)이 들어앉고
들어왔다 튀어나오고
불이 튕기고 별이 튕기고 영원의
행동이 튕기고 자고 깨고
죽고 하지만 모두가 갱(坑)안에서
참호(塹壕)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람의 얼굴도 무섭지 않고
그의 목소리도 방해가 안되고
어제의 행동과 내일의 복수가 상살(相殺)되고
塹壕의 入口의 ㄱ字가 문제되고
일의 행동이 먼지를 쓰고 있다
위태로운 일이라고 낙반(落盤)의 신호를
올릴 수도 없고 찻잔에 부딪히는
차숟가락만한 쇳소리도 안 들리고
타면(墮眠)의 축적(蓄積)으로 우리 몸은 자라고
그래도 行動이 마지막 意味를 갖고
네가 씹는 음식에 내가 증오(憎惡)하지 않음이
내가 겨우 살아있는 표시(表示)라
하나의 행동이 열의 행동을 부르고
미리 막을 줄 알고 미리 막아져있고
미리 칠 줄 알고 미리 쳐들어가있고
조우(遭遇)의 마지막 倫理를 넘어서
어제와 오늘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지고 沈默과 發惡이 오늘과
내일처럼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는
이 坑안의 잉크 수건의 칼자죽
惡가 가고 이슬이 번쩍이고
音樂이 오고 變化의 시작이 오고
化의 끝이 가고 땅위를 걷고 있는
발자국소리가 가슴을 펴고 웃고
희화(戱畵)의 계시(啓示)가 돈이 되고
돈이 되고 사랑이 되고 坑의 단층(斷層)의 길이가
얇아지고 돈이 돈이 되고 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돈의 꿈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타락(墮落)의
길이도 표준이 없어지고 먼지가 다시 생기고
坑이 생기고 그늘이 생기고 돌이 쇠가
구리가 먼지가 생기고
죽은 행동이 계속된다 너와 내가 계속되고
전화가 울리고 놀라고 놀래고
끝이 없어지고 끝이 생기고 겨우
却을 실현한 나를 발견한다
<1967.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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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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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성시(門前成市)
門:문 문. 前:앞 전. 成:이룰 성. 市:저자/도시/시가 시.
[유사어] 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문전작라(門前雀羅).
[출전]《漢書》〈孫寶傳〉〈鄭崇傳〉
문 앞이 저자(市]를 이룬다는 뜻으로, 권세가나 부잣집 문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빈다는 말.
전한(前漢) 말, 11대 황제인 애제(哀帝:B.C. 6~1)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정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국방 장관) 왕망[王莽:훗날 전한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움]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애제의 할머니), 정씨(丁氏:어머니)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충신들은 간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중 상서 복야(尙書僕射:장관)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사온데[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오소서.”
애제는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시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 오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의 소청을 묵살한 패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례(司隷)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정숭을 변호했으나 애제는 손보를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주] 삭탈 관직 : 죄 지은 벼슬아치의 벼슬과 품계[品階:직품(職品)과 관계(官階)]를 빼앗고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깎아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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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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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2장 슬프도다, 관중이여
1. 이오 즉위
이극의 죽음
"이극은 원래 상감을 섬기려던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분양 땅을 받지 못해서 원망을 품고 있습니다. 신이 들으니 이극은 진나라로 길을 떠난 비정부의 뒤를 쫓아갔다가 이제 돌아왔다고 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들은 반드시 무슨 공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전날 이극은 중이를 군위에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속으론 상감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만일 국내의 이극이 국외의 중이와 내통하고 들고 일어난다면 어떻게 막으시렵니까? 즉시 이극에게 죽음을 내리십시오. 끊어야 할 후환은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합니다."
진혜공이 머뭇거렸다.
"과인이 군위에 오르는 데 이극의 공로가 없지 않았은즉 이제 무슨 말로써 죽여야 한단 말인가?"
극예가 말했다.
"이극은 해제를 죽이고 탁자를 죽이고 선군의 부탁까지 받은 대부 순식마저 죽인 사람입니다. 그 죄는 비할 수 없이 큽니다. 상감을 귀국하도록 도운 것은 이극의 개인적인 수고였습니다. 임금을 죽인 죄를 벌하는 것은 공명 정대한 처사입니다. 상감께선 그의 개인적인 수고만 생각하시고 공명 정대한 처벌을 주저해선 안 됩니다. 청컨대 신이 상감의 명령을 받고 이극을 치러 가겠습니다."
진혜공이 허락했다.
"그럼, 대부가 가서 그 놈을 없애 버리시오."
극예는 즉시 이극의 집으로 갔다.
"상감의 명을 받들고 극예는 왔노라. 상감의 말씀을 전하니 들어 보아라. '그대가 없었던들 과인은 군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그대의 큰 공을 잊으리오. 그러나 비록 그대가 지난날에 두 임금과 한 대신을 죽였은즉, 그대를 살려 두고 군위에 앉았기도 곤란하구나. 과인은 선군의 남기신 뜻을 받들어야겠다. 그대의 개인적 수고만 생각하고 대의를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니 그대는 스스로 자결하라'는 분부이시다!"
이극이 머리를 앙연히 쳐들고 대답했다.
"해제와 탁자가 살아 있다면 상감이 어찌 지금 군위에 을랐겠느냐! 그런데 이제 신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하니, 내 죽는 마당에 무슨 말을 못하리오."
극예가 추상같이 호통했다.
"군명이 지중하니 속히 자결하여라!"
이극이 칼을 뽑아 들고, 땅을 박차고 솟아오르면서 크게 부르짖었다.
"하늘이여 원통하구나! 충성을 다한 것이 죄가 되다니. 그러나 죽어도 혼은 있으리라. 내 지하로 돌아가서 무슨 면목으로 순식을 대할까!"
이극은 칼을 물고 엎어졌다. 칼 끝이 이극의 목덜미를 꿰뚫고 나왔다. 극예는 궁으로 돌아가서 진혜공에게 이극의 죽음을 보고했다. 이 말을 듣고 진혜공은 크게 기뻐했다. 진혜공이 이극을 죽이자 많은 신하가 분노했다. 기거, 공화, 가화, 추단 등은 모두 다 진혜공의 처사를 원망했다. 이 눈치를 챈 진혜공은 그들마저 한꺼번에 다 없애 버리기로 했다. 극예가 간했다.
"비정부가 지금 사자로 진나라에 가고 없는데, 그 일당을 많이 죽이면 비정부가 여러 가지로 의심한 끝에 모반할지도 모릅니다. 상감께선 우선 참으십시오."
진혜공이 물었다.
"진 부인(秦 夫人)이 과인에게 가군(賈君)을 잘 대우하라는 것과 국외에 망명중인 모든 공자를 다 불러들이라는 서신이 왔었는데 어찌해야 되겠소?"
"공자들 중에 누가 군위를 마다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국내로 불러들이지 마십시오. 다만 가군(賈君)을 특별히 대우하는 것은 진 부인의 부탁에 보답하는 것도 되니 무방하리이다."
진혜공은 우선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가군(賈君)의 거처로 갔다. 이 때 가군은 나이에 비해서 아직도 아리따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진혜공은 아직도 미태가 남아 있는 가군을 보자, 문득 음탕한 생각이 솟았다.
"군부인(君夫人)은 과인의 소속에 불과하니, 우리 함께 기쁨을 나눕시다. 그러니 나를 거역 마오."
진혜공은 다짜고짜로 가군의 허리를 끌어안고 침상으로 데려갔다. 문 밖에 있던 궁녀들은 소리없이 서로 웃으면서 그 곳을 피해 딴 곳으로 갔다. 어머니뻘 되는 가군은 자식뻘 되는 진혜공의 험상궂은 표정에 질려서 시키는 대로 몸을 주어야 했다. 잠시 후 진혜공이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침상에 누웠을 때였다. 가군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팔자가 기박해서 선군을 섬기던 몸으로 죽질 못하고 이제 또 주공에게 몸을 버렸으니, 이 몸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바라건대 전 세자 신생의 원통한 죽음이나마 세상에 밝혀 주오. 나는 생전에 진 부인을 만나게 되면 수절 못한 죄를 호소하려오."
진혜공이 대답했다.
"해제와 탁자가 다 죽음을 당했으니 벌써 세자의 억울한 원한은 풀린 셈이오."
군이 고개를 저으며 부탁했다.
"듣자니 세자의 시체가 아직도 신성에서 백성만도 못한 무덤 꼴로 묻혀 있다고 합니다. 주공은 세자의 무덤을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시호를 내리어 그 원통한 원혼을 위로해 주십시오. 이건 비단 나만이 아니라 이 나라 온 백성이 주공에게 바라는 바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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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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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취사병이 뭐길래 - 송현탁(남.광주 광산구 지정동)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일입니다. 국가이 부름을 받고 빡빡머리로 신병훈련소에 처음 입대했을 때부터 단체생활이란 얼마나 중요하며 개인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도 많은 전우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제가 한사람 편해보겠다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우리 소대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생과 아픔을 안겨다 주었던지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지난날 함께 근무했던 우리 중대원들이 이 방송을 듣고 게신다면 굳이 부대를 밝히지 않아도 금방 기억하시고 배꼽을 잡으며 웃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훈련소에서는 우수한 병사 그리고 또한 특등사수로 인정받는 모범훈련병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십시요. 그렇다면 왜 많은 중대원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놀림감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겠습니다.
훈련소 교육기간중 취사장 사역병으로 두세 번 나가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취사병을 볼 때면 취사장 군기가 너무나 엄했고 짠밥을 만지는 취사병들이 항상 지저분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취사장에서 일을 해 보니 정말 가족적이고 마음 또한 편안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자유시간 넉넉하고 물사정 또한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취사장에서 근무하고 싶은 욕심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여 함께 일하던 취사병에게 살며시 물어봤습니다.
"취사장에서 근무하려면 어떠한 자격과 기술이 필요합니까?"
이에 취사병 왈, 논산훈련소에서 조리사 주특기(752)를 받으면 어느 부대를 가든 취사병으로 일할 수 있지만, 여기처럼 예하부대 출신은 주특기 무조건 1로 시작되기 때문에 취사장 근무가능성은 희박하고 사회에서 요리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거나 아니면 부대에서 고문관으로 찍히면 취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확률이 크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의 주특기는 일빵빵(100)소총수. 드디어 6주간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자대배치 받아 중대장님께 신고식하던 날, 중대장님께서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
하시기에 저는 서슴지 않고 "중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취사장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회경력이 있냐고 묻길래 대답했죠.
"예, 있습니다."
"어디에서?"
"중국집에서 철가방 생활 2년 했습니다."
중대장님은 저의 대답에 웃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취사장 T.O가 없으니 3소대로 가서 근무하라며 3소대장님께 인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취사장 근무에 대한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취사병에게 들었던 말대로 고문관이 되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무슨 일이든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몰아쳐도 이를 악물고 취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꿈이 실현될 때까지 충실한 고문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제식훈련 때의 일입니다. 우향우 하면 좌향좌로, 좌향좌 하면 우향우로, 뒤로 돌아 하면 거꾸로 돌고... 등등 시키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 했습니다. 이종환씨! 이건 정말 어렵데요. 한번 몸에 배어 익숙해진 것이어서 생각대로 잘 되지 않더라구요. 그때마다 저는 빳다를 맞고 기합을 받지만 기합을 받을 적마다 머릿속 깊이 한 번 더 새겨둡니다. '취사병으로 가는 그날까지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육체는 고달파도 '조금만 참아다오'를 스스로 다지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습니다. 어쩌다 잘못하여 저도 모르게 같은 방향으로 따라서 움직일 때면 소대장님께서 칭찬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바로 그거야.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저의 실수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소대장님의 칭찬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뜻한바 계획대로 고문관의 자세로 돌아갔지요. 이렇듯 남모르는 저의 실수 아닌 실수로 우리 중대에서 유별나게 우리 소대원들만이 제식훈련, 총검술, 태권도 등 반복되는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했지만 군 정신이 강한 저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과는 항상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는지 하루일과 후에는 매일 꼭 한 사람씩 저에게 붙여주면서 모든 기본동작을 책임지고 가르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과 후에 하는 훈련은 제가 어느 정도 하는 척합니다. 왜냐? 소대장님이나 중대장님 안 계실 때 얻어맞고 얼차례 받는 건 순전히 다 공짜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잘해요. 이 고참들이 때리는 것은 정말로 무식합니다. 그리고 국방부 등록된 기합이란 기합은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저에게 다 실험을 하거든요. 그렇지만 다음날 교육시간에는 마찬가지로 반대로만 합니다. 그뿐인 줄 아세요. 총검술, 태권도시범 등 순서와는 관계없이 뒤죽박죽으로 열심히 하면 저를 지켜보는 중대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바다가 되고 너무나 좋아들하지만 저는 그 뒤에 있을 육체적인 고통과 완전군장으로 연병장 돌 생각을 하면 등에서 땀도 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사격장에서는 어쩐 줄 아세요. 내 표지판에는 한 발도 쏘지않고 옆사람 표진판에 다 쏴버리고, 그렇잖으면 허공을 향해 무작정 발사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사격장에서도 정신통일이란 구호와 함께 사격 끝날 때까지 체력단련을 없이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아예 저에게 실탄을 지급해 주지도 않는 겁니다. 왜냐? 저같은 꼴통에게는 실탄이 아깝다는 것이지요. 하루는 중대장님께서 저를 행정반으로 부르시길래 저는 생각했지요. '와! 이제 드디어 취사장으로 가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착각의 기쁨은 잠시 중대장님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무슨 애가 그 모양이냐? 나 9년째 군대생활하지만 너같은 저능아는 처음 본다. 너 학교 어디까지 나왔나?"
"네, 고등학교까지밖에 못 나왔습니다."
"그럼, 그 머리로 대학갈 생각도 했나?"
"아닙니다."
"그럼, 고등학교는 앞문으로 나왔나? 뒷문으로 나왔나?"
"네, 우리 학교는 정문 하나밖에 없어서 정문으로 나왔습니다."
"그럼 학년 전체에서 석차는 어느 정도였나?"
"네, 아마 제 뒤로 두 명이나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사실은 10위권에서 놀았거든요.)
"임마, 그게 무슨 자랑이냐?"
그러시며 지휘봉으로 제 머리통을 때리지만 평상시 얼마나 원산폭격을 많이 했던지 아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더군요. 그래도 고향이 같은 선임하사께서는 제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던지 등을 토닥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못난 것도 죄냐? 너무 걱정말고 내무생활 착실히 하고 사고만 내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 없으니 내무반에 돌아가 푹 쉬어라."
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얻어 고문관의 길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분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취사장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동안 받은 설움과 얻어맞고 기합받았던 것이 너무나 아까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시간이 4개월쯤 지났을까, 중대장님께서 소대장과 고참들에게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 송이병은 구제불능인 것 같으니 더 이상 애써 가르치려고 노력하지 말고 내무생활이나 잘하게끔 다독거리며 잘못한다고 해서 구타나 체벌 같은 짓은 절대 삼가라구."
아니! 맑은 대낮에 무슨 대포 날아가는 소리입니까? 언제나 쪼인타로 다리 다 망가뜨려놓고 이제 와서 포기하시다니, 좀 늦은감은 있으나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구 하나 저에게 관여하는 사람 없고, 꼴통과 고문관이라는 별을 갖고 다닌 채 쓰레기 소각장이나 화장실 청소, 하수구 정비, 울타리 보수 등 자고로 부대의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 환경파수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가시밭 같은 4개월의 고문관 생활로 생각지도 않았던 환경미화원으로 발탁이 되다니 기대에는 어긋났지만 나름대로 괜찮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국방부 시계는 돌고돌아 저에게 일계급 진급이란 소식이 전해습니다. 군생활 열심히 한 동료전우나 군생활이 전혀 도움이 안된 저에게도 똑같은 날 중대장님 앞에 일병으로 진급했다는 신고식을 떳떳이 할 수 있게끔 공정한 심사를 해 주신 대한민국 국방부 인사과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일병으로 진급은 됐어도 환경파수꾼에 대한 변화는 없던 차에 행정반 마이크에서 위대한 송일병을 찾는 안내방송을 듣고 뛰어갔는데 선임하사이신 인사계님께서 대희보를 제게 주셨습니다.
"송일병, 취사장 허병장이 제대특명을 받아 며칠 후면 전역을 하게 됐으니 취사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아니! 이게 무슨 주택복권 당첨된 소리입니까.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8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했느데.... 저는 겸손한 자세로 대답했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내무반으로 돌아가 따블백을 챙겨 취사반으로 가는 저의 발걸음는 마치 자유를 찾은 한 마리의 새였습니다. 그리고 취사장 근무 첫날부터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취침점호와는 관계없이 일찍 잠을 잘 수 있다. 둘째, 불침번이나 외곽 근무는 일체사절이다. 셋째, 아침점호나 구호, 아울러 교육훈련까지 전부 열외다. 이종환 최유라씨, 취사장 끗발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취사장 쫄따구라고 해서 소대 고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터치했다간 배식시간에 그 결과는 그대로 불을 보듯 뻔하게 나타나게 되니까 말입니다. 특히 고깃국 배식시간엔 두말할 것도 없지요. 그 동안 저에게 못할 짓 많이 한 고참들 고깃국 나오면 항상 위에 둥둥 떠있는 기름덩어리만 한국자 떠주고,저를 불쌍히 여겨 인간답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고참들에게는 국자를 깊이 넣어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왕건더기를 듬뿍 담아 주는 편파적인 배식을 계속했었습니다. 하루는 중대장님께서 취사장에 들어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송일병 할 만하나?"
"예."
"너의 예전 모습은 이게 아니었잖아?"
"뭐가요?"
"그놈, 참 기특하게도 사람 많이 변했네."
이러시며 만족한 웃음을 흘리시며 나가시더군요. 한 번 고문관은 영원한 고문관이 아닙니다. 일단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피나는 인내와 끈질긴 노력을 했을 뿐이고 대한민국 군인이었기에 후퇴를 안했을 따름입니다.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전우들이여! 지금쯤은 일반 예비군들로서 사회에서 각자 맡은 임무에 충실하고 있겠지만 이 사람 또한 농촌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알고 있는 예비군 여러분! 요즈음 부정부패로 사회에 크나큰 사건들을 접하고 볼 때면 마음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질 때가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군대시절 한심스러웠던 저의 모습을 다시금 상상하며 스트레스를 확확 풀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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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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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연현편" (1920~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 전문 수료. 한양대 문리대학장, 문인 협회 이사장 역임. 초기에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평론과 수필을 주로 썼다.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여 좌익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바 있으며 순수 문학의 옹호에 공적을 세웠다. 후기에는 현대 문학사의 정립에 힘썼으며 엄청난 양의 평론을 통하여 정력적인 평론가로 정평을 얻었다.
손수건의 사상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가 손수건을 빠뜨리고 나오는 날이면, 육체의 어느 한 부분을 떼어 놓고 나온 것처럼 어색하거나 꼭 입어야 될 의류의 하나를 빠뜨리고 나온 것처럼 허전해진다. 그만치 손수건은 인간에게 있어 없지 못할 일상적인 생활용품의 하나이다. 한글 학회 발행의 우리말 사전을 보면, 손수건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수건'으로 되어 있고, 문세영 씨 사전을 보면, '땀을 씻는 작은 수건, 손을 씻는 작은 헝겊'으로 되어 있다. 전자는 주로 손수건의 형태와 위치에 대한 설명이고, 후자는 주로 그 용도에 대한 설명으로 볼 것이다. 이 두 개의 설명에서 우리는 손수건이란, 첫째 작은 헝겊으로 된 수건이며, 둘째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며, 셋째 손이나 땀을 씻는 데 사용되는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손수건은 작은 것이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라는 것은 손수건의 어떤 희생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다는 것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조건은, 물론 손수건의 용도에서 원인된 것이다. 땀이나 손을 씻는 데 반드시 커다란 수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성질의 용도에는 작은 수건으로서 충분하다. 그리고 항상 몸에 지니기에도 작은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손수건은 무엇 때문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까? 그것은 손수건의 용도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수건의 용도는 반드시 손이나 땀을 씻는 것이 그 전부는 아니다. 길에 가다가 흙이나 먼지가 묻는다든지, 음식을 먹은 다음, 혹은 화장을 고칠 때, 또는 작은 상처가 났을 때, 손수건은 가장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손수건은 항상 몸에 지니는 작은 소지품이 되는 동안에, 손수건은 스스로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의 소지품 가운데는 자기를 표현하는 물건이 있다. 인장과 지환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전자는 각자의 권리를 표시하는 표현이요, 후자는 각자의 약속을 표시하는 표현이다. 재산의 소유권이 인장으로써 변동되고, 약혼이나 결혼이 지환으로써 표시되는 것은 그러한 일례이다. 이를테면 전자가 인간의 법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인간의 정신적 표현으로서 다 같이 자기 표현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자기 표현으로서의 소지품은 대개 작은 물체로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게 그 일반적인 습관이다. 자기를 표현해 주고 있는 물체는 이미 단순한 물질이거나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소지품은 항상 자기를 아끼는 마음처럼 귀중히 취급되고 언제나 자기와 함께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는 데에는 늘 몸에 지니는 것이 상책이며, 늘 몸에 지니는 데에는 작은 것이라야만 편리하다. 손수건은 이와 같은 자기 표현의 물체와 같은 조건을 갖추고 나타남으로써 그 최초의 용도와는 다른 자기 표현의 직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몸차림을 한 여성이 조심성스럽게 손수건을 만지거나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항상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 손수건이 그 여인의 손이나 땀을 씻는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그 여인의 감정의 역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손수건은 손이나 땀을 씻는 수건으로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용도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손수건의 용도에 대한 영상은 슬픈 소식을 듣고 남몰래 돌아앉아 흘리는 눈물을 씻는 것, 기차나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안타까운 사람을 보낼 때, 또는 그와 같이 멀리서 오는 그리운 사람을 맞이할 때 안타깝고 그리운 마음으로 손수건을 흔드는 모습... 손수건은 손이나 땀을 씻는 것보다는 이러한 때 더욱 절실히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니었던가? 손이나 땀을 씻는 것이 손수건에 대한 인간의 생리적 육체적 외부적 용도라면 이러한 것은 그에 대해 인간의 심리적 내부적 용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손수건의 용도는 손수건이 인장이나 지환과 같이 자기 표현의 한 직능을 가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 된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그 작은 헝겊이.
손수건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내부적 용도에서 바라본다면 손수건과 가장 깊은 관련을 가진 것은 눈물과 이별, 또는 눈물과 상봉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손수건은 눈물을 씻기 위한 것이거나, 그렇기 않으면 이별할 때의 안타까운 심정을, 또는 상봉의 즐거움을 알리는 신호의 표지이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 하면, 손수건은 즐거운 눈물보다는 슬픈 눈물을 닦는 경우가 더 많고, 상봉의 즐거운 신호로서보다는 이별의 슬픈 신호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손수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손수건은 슬픈 눈물을 상징해 준다고 볼 수도 있다. 손수건을 눈물 또는 이별의 상징으로 보아 온 것은 한국 사람들의 오랜 풍습은 아니었던가?
손수건을 눈물 또는 이별의 상징으로 보는 동안, 그러한 손수건은 항상 여성적인 속성이지 남성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사내 대장부' 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여성처럼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남성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므로 '여인과 눈물'은 자연스럽게 관련이 되지마는, '남자와 눈물'은 아무래도 긍정적인 자연적 상태는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별 역시 그렇다. 이별이란 말이 헤어진다는 사실의 설명으로서보다는 헤어지는 슬픈 감정을 강조하는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라면, 눈물과 직결되는 이별은 여성적 속성이다.
돌아앉아 눈물을 씻는 남성의 모습이 보기 흉하고, 역두나 부두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남성이 주책머리 없게 보이는 반면에, 돌아앉아 눈물을 씻는 여인의 모습이나, 손수건을 흔드는 여인의 모양이 제 격에 맞게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손수건은 아무래도 남성에게보다는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소지품인가?
남녀를 불문하고, 손수건은 필요불가결의 일상적인 소지품의 하나이다. 누구나 그가 가진 손수건으로써 자기의 손이나 땀을 씻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 손수건에 숨겨진 자기의 감정적 이력을 생각하게 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까? 남성은 아예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남성적인 것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손수건을 꺼낼 때마다 그 손수건에 아로새겨진 자기의 눈물과 이별을 계산해 보는 여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매일같이 빨아서 깨끗한 수건을 갖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수건에 대한 위생은 그 속에 새겨진 자기의 슬픈 눈물과 이별을 깨끗한 손수건처럼 잊어버리고 싶은 데서일까? 수건은 나에게는 항상 여인의 마음의 비밀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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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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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9월 11일 톨리에 거리에서
제삼자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인물이기에 오히려 쉬운 과제였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런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의 희곡 도입부에는 곧 제삼자에게로 가려는 성급함이 느껴진다. 작가들은 제삼자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 못한다. 제삼자가 나타나자마자 만사가 해결된다. 하지만 만약 제삼자의 등장이 지체되면 얼마나 지루해지는지. 제삼자 없이 순수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없다. 제삼자가 없으면 모든 것이 멈춰서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만약 계속해서 이렇게 정체되고 지체된다면 어떻게 될까?
희곡 작가 야 그리고 인생을 아는 관객 여러분, 어떻게 될까요?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이 난봉꾼이, 혹은 복제한 열쇠처럼 모든 부부 생활에 잘 맞는 이 불손한 젊은이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악마가 그를 데려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갑자기 극장에는 기교적인 공허감이 느껴지고, 사람들은 위험해진 구멍을 막듯이 극장에다 벽을 두르고, 나방들만이 특별석에서 나와 텅 빈 공간으로 비틀거리며 날아다닐 것이다. 작가들은 더 이상 고급 별장에서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대신하여 먼 세상 어딘가에서, 과거에는 연극이 맡았던 유일무이한 짓을 추구하는 노력이 공공연히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제삼자"가 아니라, 바로 당사자인 두 사람이다. 그 두 사람에 관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을 법하지만, 두 사람이 괴로워하고 행동하며 서로를 도울 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별로 언급된 것이 없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다. 나는 작은 방에 앉아 있다. 스물 여덟 살이 되었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 브레게가 말이다. 나는 여기 앉아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생각하기 시작하고, 어느 잿빛 오후 파리의 한 오층 방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떠한 사실도, 중요한 것도 보지 않고, 인식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보고, 생각하고, 기록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보낸 세월이 버터빵 한 쪽과 사과 하나를 먹는 휴식 시간처럼 몰락하게 내버려둘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세계사 전체가 오도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가 항상 불확실한 대중에 관해 말해 왔기 때문에 과거는 잘못된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할까? 또 중요한 인물에 대해 말해야 하는 데 그 사람이 이미 죽었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이유로, 주위에 있던 다른 잡다한 사람을 말해도 괜찮은 걸까? 물론 가능하다.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것을 모두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모든 조상들로부터 생성되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다른 것을 아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상기시키는 일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이 모든 인간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아주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그들에게 모든 현실은 무의미할 뿐이고, 그들의 삶은 빈 방의 시계처럼 그 어떤 것과도 연관되지 않고 진행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물론 가능한 일이다. 지금 살고 있는 소녀들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부인들"과 "아이들", "소년들"을 말하면서, 이 말이 이미 오래 전부터 복수로 사용되지 않아 이제는 불가산 단수 명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예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어떤 교육을 받았더라도 예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신"을 말하면서 그것을 어떤 공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두 명의 국민학생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 아이가 칼을 하나 샀다. 옆에 있던 다른 아이도 같은 날 똑같은 칼을 하나 산다. 일주일이 지나서 두 아이는 각자의 칼을 서로에게 보여 준다. 그럴 경우 두 칼은 멀리서 볼 때에만 비슷했을 뿐, 서로 다른 손에서 서로 다르게 변했음이 밝혀진다(물론 한 아이의 어머니가 "네 손에 들어가면 남아나는 것이 없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아, 그러면 신을 사용하지 않고 신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고, 또한 그런 가능성의 징조가 단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세상 만물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야만 할 것이다. 이런 불안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제까지 게을리 했던 일부터 곧바로 시작해야 한다. 비록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 일은 결코 다른 사람이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찮은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 이 젊은 브리게는 오 층 방에 앉아서 밤낮없이 글을 써야 한다. 그가 글을 써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종결점인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열두 살, 아니면 기껏해야 열세 살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우르네클로스터에 데려가셨다.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외할아버지 댁을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두 사람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아버지 자신도 브라에 백작이 물러나 뒤늦게 머물렀던 이 옛 성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이상한 집을 후에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집은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낯선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의 유년기의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올려 본 대로라면 그 집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분해되어 있다. 여기에 방이 하나 있는가 하면, 저기에 또 다른 방이 하나 있다. 이쪽에 복도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두 방을 연결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으로 놓여 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내 마음속에 흩어져 있다. 숱한 방들, 엄청나게 형식적인 계단들, 어두컴컴한 곳을 혈관 속의 피처럼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했던, 좁고 둥근 모양의 층계들. 탑의 방, 높게 매달린 발코니, 조그만 문을 밀고 나가면 예기치 않게 보게 되는 발코니, 이 모든 것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있었고 계속 존재할 것이다. 마치 이 집의 상이 끝없이 높은 곳으로부터 내 마음속으로 추락해 왔고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산산히 부서진 것처럼.
그러나 매일 오후 7시 경, 만찬 시간이면 모이곤 하던 저 홀만큼은 내 마음속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 같다. 낮에는 이 방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방에 창이 있었는지, 혹시 있었다면 그것이 어느 쪽으로 나 있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족들이 그 방에 들어설 때면, 항상 검은 촛대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곧 시간을 잊게 되고 그 방 밖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잊어버렸다. 짐작컨대, 이 높고 둥근 모양의 방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막강했던 것 같다. 그 방의 어두운 천장과 한 번도 완전히 드러난 적이 없는 구석들은, 다른 대체물이라곤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상으로부터 방 안의 모든 상들을 빨아 당기는 듯했다. 사람들은 멍하니 거기에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의지도, 분별력도, 욕구도 없었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마치 빈 공간과도 같았다. 이 무화된 상황으로 인하여 나는 처음에 메스껍기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일종의 멀미와 같은 것이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아버지의 무릎을 발로 건드려 보고서야 가라앉았다. 나중에서야 아버지가 이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고 계셨거나, 혹은 참아 주고 계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아버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차갑다고 까지 할 수 있는 관계하에서는 그런 행동을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럭저럭 지내는 동안 나에게는 긴 식사 시간을 참아 내도록 힘을 주는 위안이 생겼다. 투쟁적인 인내의 몇 주가 지나자, 나는 아이들이 가진 거의 무제한적인 적응력으로 그 끔찍한 모임에 아주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두 시간을 꼬박 식탁에 앉아 있어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더욱이 나는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두 시간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지나갔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그들을 가족이라 부르셨고, 다른 사람들도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자의적인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이 자리에 모인 네 사람이 먼 친척 관계에 있긴 했지만, 한 집안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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