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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4호 2022.12.7 수요일 (음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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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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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감정의 속기법(速記法) ―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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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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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어 쓰기, 그 후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반말만 쓰기. 학생들이 ‘진해, 안녕!’이라 한 지 석달이 지났다. 어찌 됐을지 궁금할 듯.
말끝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학생들은 ‘내 언어체계에 분열이 왔다.’고 고백한다. 분열이라니, 야호! 한가닥이던 말의 체계는 꽈배기처럼 순식간에 두가닥으로 갈라지고 뒤엉켰다. 부모 아닌 연장자에게 반말해본 적 없던 학생은 ‘이메일을 반말로 보내는 게 맞는지 수십번 고민’했다. ‘‘안녕하세요’에서 ‘안녕’으로 바뀌었으니 손까지 흔들어도 되는지, 꾸벅 허리를 숙여야 하는지, 아니면 허리를 숙이면서 동시에 손을 흔들어야 할지 헷갈렸다.’ 반갑구나, 번민하는 인간이여.
학생들에게 존댓말은 ‘안전장치’였다. 학생들끼리도 존댓말을 썼다. 상대에 대한 존중보다는 ‘심리적 거리두기’의 방편이랄까. 가까이 오지 마. 적당히, 거기까지.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비즈니스적’이다. 수업을 하고 수업을 듣는 것, 이 목적을 달성하면 끝’이라던 학생들은 평어를 쓰자 의자를 당기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기꺼이 즐겁게 규칙을 바꿔 버렸다. 민달팽이처럼 안전장치를 걷어내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타인을 대했다. ‘위아래’ 분간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말도 많아지고 문자와 이메일도 늘고 웃음도 잦아졌다(강의실에서 웃다니!). 책 읽고 토론하는 시간은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 학생들에게 저리도 할 말이 많았구나. 어느 날 문자 하나를 받았다. ‘진해, 내일 졸업연주회가 있어. 초대하고 싶어 연락했어! 이런 초대는 처음 해봐.’
더 나가보려고 한다. 한뼘씩, 야금야금.
위협하는 기록
총을 내려놓는다고 저절로 평화가 오지 않는다. 회초리를 내려놓는다고 인권이 넘치고 행복한 학교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수업 방해, 비아냥과 모욕, 동영상 촬영과 유포가 난무했다. 학생은 선생을 욕하고 놀릴 수 있지만, 선생이 그러면 아동학대다. 학생이 무슨 짓을 해도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사들은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하소연한다(얼마 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는 교장에게만 주던 생활지도권을 교사에게도 부여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11월30일 교육부 주최로 ‘학교 교육활동 보호 강화 방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교육부 시안에는 중대한 교권 침해를 범한 학생은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록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왕에 학교폭력도 기록하고 있으니, 교원에 대한 학생의 폭력도 기재하는 게 ‘형평성’에 맞다는 논리다. 예방적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줄 것이라 기대하는 눈치다.
‘떠든 사람’을 칠판 귀퉁이에 적는 건 ‘조용히 하라’는 일말의 계몽적 역할이라도 했다. 학교 문턱을 넘어가지도 않았다. 생기부에 ‘교사 폭행으로 전학 조치했음’이라고 적는 건 다르다. 교사에게도 ‘한번 당해봐라. 넌 이제 끝이야’라는 응징의 마음을 심어준다. 생기부는 이미 학생 지도보다는 대입 지원을 위한 서류다. 거기에 교권 침해를 기록하는 건 학생을 위협하는 일이자, 고등학교가 대입 준비 말고는 다른 역할을 할 마음이 없다는 걸 선언하는 것이다. 교사의 손에 만사형통의 무기가 주어지겠지만, 학교는 더욱 차갑고 황폐화할 것이다. 위협하는 기록으로 배움의 공동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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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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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영상(影像) - 김수영
고민이 사라진 뒤에
이슬이 앉은 새봄의 낯익은 풀빛의 影像이
떠오르고나서도
그것은 또 한참 시간이 필요했다
시계를 맞추기 전에
라디오의 시종(時鐘)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안타깝다
봄이 오기 전에 속옷을 벗고 너무 시원해서 설워지듯이
성급한 우리들은 이 발견과 실감 앞에 서럽기까지도 하다
전아시아의 후진국 전아프리카의 후진국
그 섬조각 반도조각 대륙조각이
이 발견의 봄이 오기 전에 옷을 벗으려고
뚜껑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라디오의 時鐘을 고하는 소리 대신에 서도가(西道歌)와
목사(牧師)의 열띤 설교소리와 심포니가 나오지만
이 소음들은 나의 푸른 풀의 가냘픈
影像을 꺾지 못하고
그 影像의 전후의 고민(苦憫)의 환희(歡喜)를 지우지 못한다
나는 옷을 벗는다 엉클 쌤을 위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무거운 겨울옷을 벗는다
겨울옷의 影像도충분하다 누더기 누빈 옷
가죽용 융옷 솜이 풀린 솜옷......
그러다가 나는 드디어 월남인(越南人)이 되기까지도 했다
엉클 쌤에게 학살당한
越南人이 되기까지도 했다
<1966.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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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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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獨眼龍)
獨:홀로 독. 眼:눈 안. 龍:용 룡.
[출전]《五代史》〈唐記〉,《唐書》〈李克用傳〉
애꾸눈의 용이란 뜻. 곧
① 애꾸눈의 영웅 또는 용맹한 장수.
② 애꾸눈의 고덕(高德)한 사람.
당나라 18대 황제인 희종(僖宗:873~883)때의 일이다. 산동(山東) 출신인 황소(黃巢)는 왕선지(王仙芝) 등과 반란을 일으킨지 5년만에 10여 만의 농민군을 이끌고 마침내 도읍인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스스로 제제(齊帝)라 일컫고 대제국(大齊國)을 세웠다.
한편 성도(成都)로 몽진(蒙塵)한 희종은 돌궐족(突厥族) 출신인 맹장 이극용(李克用:856~908)을 기용하여 황소 토벌을 명했다. 당시 4만 여에 이르는 이극용의 군사는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사정없이 맹공을 가했기 때문에 반란군은 '갈가마귀의 군사[鴉軍]가 왔다 !‘며 심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19대 황제인 소종(昭宗:883~903)이 즉위한 그 이듬해 마침내 반란군은 토멸되었고 황소도 패사(敗死)하고 말았다. 이극용은 그 공에 의해서 농서[감숙성(甘肅省)] 군왕(郡王)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극용은 숙적 주전충[朱全忠:852~912,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귀순한 뒤 황소 토멸에 공을 세워 동평군왕(東平郡王)이 됨]과 정권을 다투다가 패하고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주전충은 20대 황제인 애종(哀宗:903~907)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량(後梁:907~923)을 세웠으나 16년 후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후당(後唐)의 초대 황제인 장종(莊宗)]에게 멸망했다.
맹장 이극용에 대해《오대사(五代史)》〈당기(唐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극용은 젊고 효용(驍勇:사납고 날쌤)했는데 군중(軍中)에서는 이아아(李鴉兒)라고 일컬었다. 그의 눈은 애꾸눈이었다. 그가 귀한 자리에 오르자 일컬어 ‘독안룡’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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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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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0장 교만해지는 제환공
5. 백리해, 언제 때를 만나랴
백리해, 秦으로 잡혀가다
진목공이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그 말이 정말로 좋소."
이에 진나라 사자는 염소 가죽 다섯 장을 폐백으로 가지고 초나라로 갔다. 사자가 그 염소 가죽 다섯 장을 초왕에게 바치고 이렇듯 온 뜻을 아뢰었다.
"우리 주공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즉 우리 나라 천한 종놈 백리해란 자가 귀국에 도망가서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냅니다. 과인이 그 놈을 잡아다가 벌을 줌으로써 앞으로 도망치려는 자들을 경계하고자 합니다. 염소 가죽 다섯 장을 보내오니, 청컨대 군후께선 죄인을 잡아 보내 주십시오."
초왕은 중원 땅 제나라를 경계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다만 진나라의 환심을 잃을까 두려워서 백리해를 잡아다가 진나라 사자에게 넘겨 주라고 분부했다. 이리하여 그는 초나라 관리에게 붙들리는 신세가 되었다. 붙잡혀 가는 그를 전송 나온 동해 사람들은 그가 가서 죽는 줄 알고 모두 구슬프게 울었다. 그러나 백리해는 속으로 웃었다.
'내 듣건대 진후(秦侯)는 큰 포부를 품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종놈 한 명쯤 없어진 것이 그에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초나라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잡아갈 리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나를 높은 자리에 등용하려는 수작이다. 이번에 진나라로 가면 부귀할 것인데 뭣을 슬퍼하리오.'
그는 유연히 함지에 올라타고 떠났다. 울 속에 감금된 백리해를 실은 수레가 진나라 국경에 당도했다. 진나라 국경엔 이미 공손지가 수레를 준비하고 그를 영접 나와 있었다. 공손지는 즉시 그의 결박을 풀고 안내했다. 진목공이 백리해를 영접한 뒤 물었다.
"금년 연세가 몇이시오?"
백발이 성성한 백리해가 대답했다.
"겨우 70세입니다."
진목공이 탄식했다.
"참으로 아깝도다. 너무 늙었구려."
백리해가 망연히 대답했다.
"이 백리해에게 나는 새를 쫓아다니라든지 또는 사냥을 가서 맹수를 잡아오라면 이미 늙어서 별로 쓸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신에게 대부가 되어 조당에 나와 앉아서 나랏일을 맡아 보게 한다면 아직 젊습니다. 옛날에 강태공(姜太公)은 나이 80세에 위수가에서 곧은 낚시질을 했건만 그 때 문왕(文王)은 그를 수레에 싣고 돌아가서 상부(尙父)로 삼았고 마침내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신이 오늘 군후를 뵈온 것과 그 때 강태공이 문왕을 만났을 때를 비교하면 신은 강태공보다 열 살이나 젊습니다."
진목공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우리 나라가 융적(戎狄) 사이에 있어 아직 중원과 함께 동맹을 맺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는 어떻게 과인을 이끄시려오. 우선 천하의 모든 나라 제후들에게 뒤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소."
백리해가 대답했다.
"주공께서 신을 멸망한 나라의 포로로서 또는 늙은이로서 대하지 않으시고 겸손히 물으시니,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어찌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 옹기 땅은 주문왕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산은 개 이빨 같고 들은 긴 뱀이 뻗은 것과 같건만, 주나라는 능히 이 좋은 곳을 우리 진나라에게 내줬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이 진나라를 도우신 것입니다. 또 융적 사이에 있으나 이것은 도리어 우리의 군사를 굳세게 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제 서융 사이에 소위 나라라고 자칭하는 것들이 수십이나 있지만, 그것들을 무찔러 합치면 족히 농사지어 식량을 풍부히 할 수 있고, 그 백성들을 모으면 어떠한 나라와도 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원 땅 모든 나라와 비교해서 우리 나라가 유리한 점입니다. 주공께선 덕을 베푸시고 한편 힘으로써 쳐 무찔러 서쪽을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든 연후에, 험난한 산천으로 방패를 삼아 중원을 굽어보며 실력을 기르고 확실 한 때가 오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나아간다면, 패업을 성취 못할 리 있겠습니까?"
진목공이 부지중에 벌떡 일어서서 백리해의 손을 맞잡고 크게 감탄했다.
"나에게 백리해가 있다는 것은 마치 제환공에게 관중이 있는 것과 같도다."
진목공은 백리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서 3일 동안 서로의 흉금을 터놓고 세상사를 논했다. 진목공은 백리해의 탁월한 식견과 세상을 보는 안목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뒤로 진나라 사람은 백리해를 오고 대부라고도 불렀다. 즉 염소 가죽 다섯 장으로 그를 얻었다는 의미이다. 또 백성들은 진목공이 소 입 아래에서 백리해를 얻었다고도 말했다. 즉 원래 소 기르던 사람을 데려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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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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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들음의 길 위에서
어제보다는
좀더 잘 들으라고
저희에게 또 한번
새날의 창문을
열어 주시는 주님
자신의 안뜰을
고요히 들여다보기보다는
항상 바깥일에 바삐 쫓기며
많은 말을 하고 매일을 살아가는 모습
듣는 일에는 정성이 부족한 채
`대충` `건성` `빨리` 해치우려는
저희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끼리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기보다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자기말만 되풀이하느라
참된 대화가 되지 못하고
독백으로 머무를 때도 많습니다
- 우린 참 들을 줄 몰라
- 왜 이리 참을성이 없지?
- 같은 말을 쓰면서도 통교가 안되다니
잘 듣지 못함을 반성하고 나서도
돌아서면 이내 무디어지는
저희의 어리석음과 습관적인 잘못은
언제야 끝이 날까요
정확히 듣지 못해
약속이 어긋나고
감정과 편견에 치우쳐
오해가 깊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쓸쓸함을 삼키는
외딴 섬으로 서게 됩니다
잘 들어야만 사랑이 이루어짐을
들음의 삶으로써 보여 주신 주님
오늘도 아침의 나팔꽃처럼
활짝 열린 가슴과 귀로
저희가 진정
주님의 말씀을 잘 듣게 하여 주소서
언어로 몸짓으로 마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이웃의 언어에
민감히 귀기울일 줄 알게 하소서
말하기 전에
듣기를 먼저 배우는
겸손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현재의 순간이 마지막인 듯이
성실을 다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들음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는
들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잘 들어서
지혜 더욱 밝아지고
잘 들어서
사랑 또한 깊어지는 복된 사람
평범하지만 들꽃 향기 풍기는
아름다운 들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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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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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낚시의 즐거움
1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즐거웠던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본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즐거움에도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세분과 아이는 차치하고 개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내 경우엔 그 즐거웠던 나날은 낚시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만큼 내 생활의 즐거움은 낚시질하는 행위가 실어다 준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낚싯줄을 물에 드리우고 있지 않더라도 낚싯대나 낚시 연장을 매만질 때가 하루 중에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가난한 묵객은 시름이 있거나 무료할 땐 벼루에다 연적의 물을 부어 먹을 벅벅 갈아 거기에서 안겨 오는 향기로움으로 인생을 달랬다고 한다. 참으로 운치를 담은 경지라 하겠다. 낚싯대를 닦고 매만지는 심정도 이와 상통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낚싯대를 매만지는 것은 반드시 앞으로 고기 수확에 더 큰 기대를 거는 데서가 아니라 세상의 번거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묵연히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낚시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하루에 한동안이나마 생활의 실무에서 휴식을 주는 시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낚싯대를 매만지면서 무료를 끄며 일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이야말로 하루하루가 흐뭇해진다. 즐거움은 반드시 큰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즐거움은 크면 클수록 오히려 지속이 안 되거나 반비례되는 일이 따를 가능성이 짙다. 조그만 은은한 즐거움이야말로 영속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까닭인지 모른다. 낚시에는 은근한 정미와 조그만 즐거움이 있는 대신 큰 즐거움이 따르지 않는 것은 곧 영속적인 의미가 내재하고 있어서이리라. 언젠가 어느 낚시인의 글에서 읽은 한 대목이다.
낚시 시즌이 지나고 한참 지루한 겨울 한밤중의 일이다. 가족들이 모두 고이 잠든 방 안에서 주인공은 낚싯대를 꺼내 홀연히 휘둘러 고기를 낚아 본다. 그의 얼굴에서는 회심의 미소가 흐른다. 이 때 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낚시의 즐거움이고 낚시꾼의 즐거움의 표현일 것이다.
2
낚시꾼에겐 물은 향수와도 같다. 물만 보아도 낚시꾼에겐 저절로 미소가 안겨 온다. 이것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그리는 마음에서이리라. 논바닥에 고인 하잘것없는 물이건, 벌판 한구석에 웅크린 웅덩이건 물이면 그저 좋다. 하물며 호연한 물바다를 보았을 땐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나오고 속이 후련해진다. 이건 낚시꾼이면 누구나 느껴지는 감회이고 또 낚시꾼만이 누릴 수 있는 흥취일 것이다. 그러나 기실 따지고 보면 물이 그립다는 그 자체는 물과 불가분의 사이인 물고기를 그리는 심정일 것이다.
고기가 살지 않는 물은 나무 없는 산처럼 낚시꾼에겐 무의미하니까.
해발 1천 미터 이상 높이의 고원에 가로놓인 장진호는 묘묘한 바다나 다름없다. 추운 지대이고 워낙 물이 깊어서인지 물고기가 놀지 않는다. 물빛이 짙다못해 검다. 고기가 놀지 않는 물은 사수나 다름없이 매력이 없고 그 검은 물은 두렵기만 하다. 바라보이는 물은 다 아름답고 시원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낚시꾼이라도 붉은 불이나 더러운 물보다는 물의 본연의 자세인 맑은 운치를 아쉬워하게 된다. 고름을 담그면 파란 물이 들 듯한 물이야말로 눈을 감으면 낚시꾼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마음의 소우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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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 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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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살리고 말을 살리려면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썼다고 하는 신시와 우리 나라에서가장 훌룡한 시를 썼다고 모두가 말하는 두 사람이 쓴 시를 들어 시와 삶과 말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다음에는 오늘날 씌어 나오는 시에서 우리말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피기로 하겠다. 여기 들어 놓은 시 구절들은 모두 신문에 발표된 시에서 따온 것이다. 문제가 되는 말에는 밑줄을 그은 다음에 묶음표를 해서 바람직한 우리말을 적어 놓았는데, 내가 바로잡아 놓은 말보다 더 좋은 우리말이 있는 경우도 나올 듯하다.
어머니는
꽝꽝 언 대지 안에 (땅)
사랑을 품고 키우는
나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
이것은 시의 제목인데, 제목이든지 본문이든지 내 느낌으로는 우리 어머니 라야 우리말답고 우리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옛날 사람이 가졌던 느낌 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다. 또 모두가 우리말을 이렇게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될 수 없다. 사실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집 우리 고향 우리 학교 를 죄다 나의.. 로 쓰기 시작해서 끊임없이 우리말을 더럽히는 데 앞장선 것은 바로 문학작품을 쓰는 시인과 소설가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글말에 중독이 되어있지 않는 사람은 우리... 를 쓰고 있으니 마땅히 우리말을 살려야 한다.
우수의 바람..(근심)
봄이면 모든 것이
거듭나기를 기원한다(빈다)
뒤척이는 몸짓으로
그리운 언어를 띄우거나 (말)
비상하는 기쁨으로 (날아오르는, 솟구치는)
살아 있음을 노래하는
아침은 한잔의 생처럼 (시제목)
아침은 산사에서 마시는 (산속 절)
한잔의 생수처럼 온다.(샘물)
생처럼 이라 썼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산사 라고 더러 쓰는데, 우리 글자로 쓰면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고, 또 귀로 들어도 모른다.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다. 산속 절 하든지 그냥 절 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푸른 치마자락으로 몸을 가리우고 (가리고)
굽이치는 바다
깊은 해심의 속살이 보인다.(한가운데)
가린다 란 말은 가리운다 고 쓰는 것은 잘못되었다. 해심 은 바다 가운데 란 뜻의 한문글자말인데, 우리 글자로 쓰면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든다. 이런 말은 쓸 필요가 없다. 그 앞에 또 바다 란 말이 나왔으니 한 가운데 로만 쓰면 될것이다.
정오의(한낮) 햇살이 용해되어 (녹아서)
투명해질수록 (환히 비칠수록)
뜨거운
한 잔의 커피를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예쁘고 작은 스푼으로 (숟가락)
커피와 프림 설탕을 담아
앞에 예쁘고 작은이 나와 있으니 양숟가락 이니 차숟가락 이니 오목숟가락이니 할 필요도 없다.
나도 예수처럼
자유에의 깃발 펄럭이며 (자유의)
내 낡은 수첩 속에 서투른 시의 제목으로
녹두꽃 사내 라 이름하고 널 지우려 했다. (이름 적고)
이름한다 , 이름하고 이런 말은 없다. 이것은 아주 일본말을 직역한 것이다.
황혼을 등지고서 (저녁 어스름)
차가운 손 흔들며
별들이 비행하는 불멸의 시간 속에 (날아가는 영원의)
불멸 보다는 영원 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잔설도 사그라진 황량한 강변을 본다. (남은눈, 쓸쓸한 강가)
강변 이란 말은 아주 널리 써서 우리말로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강가 가 더 낫다고 본다.
눈끝엔 절단된 산맥 성큼성큼 매달린다. (끊어진 산줄기)
새들이 돌아온다 사계의 저녁이다 (사철)
가출했던 마음이여 전우를 맞았는지 (집 나갔던, 천둥비)
가슴 한켠 둥지에로 돌아와 잠드는 새 (둥지로)
일몰을 배웅하는 (저물녁, 저문날, 지는해)
낮은 처마 연기 자락
겨울철 피난살이
후조의 날개짓에 (철새)
숨죽인
천삼백리 강
식탁 위를 채우리 (밥상)
육백년 한을 접어서
침묵으로 앉았다.(말없이)
세월의 뼈마디를
침묵으로 딛고 서서 (말없이)
여명의 날개 자르고 (새벽)
추락하는 벼랑 저 끝 (떨어지는)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있는 (어릴적)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버린 물 그위로 그림자만)
전생의 이름표를 들고 꿈길 향해 달려오네 (꿈길로)
이 밖에도 얼마든지 보기를 들 수 있지만 이쯤 해두기로 한다. 내가 보기로 우리 나라의 시인들은 우리말에 너무 관심이 없고 감각이 무디다. 문학이라면 말을 다루는 예술이고 말로 빚어내는 예술인데, 더구나 시는 말을 고르고 다듬는 일에 그 어떤 글쓰기보다 힘들여야 하는데, 시인들이 이렇게 어설픈 남의 글자말, 일본말법 따위를 일부러 자랑스럽게 쓰면서 살아 있는 우리말을 버리고 있으니, 이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늘날 시인들은 새벽이란 말을 쓰면 시가 안 되고 반드시 여명 이라고 해야 시가 되는 줄 안다. 저녁무렵 이라든지 저물녘 저녁어스름 땅거미 이렇게 얼마든지 좋은 우리말을 안 쓰고 비애 환희 우수 이런 따위 한자말이라야 시가 된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모두 어제 오늘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김소월이나 정지용같은 그 유명시인 때부터, 아니 맨 처음 일본시와 서양시를 따라 쓰기 시작했던 최남선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제시대에는 잘못된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는 않아서 우리말이 많이 살아 있는데, 갈수록 나빠져서 오늘날에는 시가 우리말을 죽이는 주범이 되고, 말자랑, 말치장, 말장난의 글쓰기가 되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 가는가? 원인은 환하다. 시인들이 모두 삶을 등지고 방안에 앉아 머리만 가지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 시가 병든 것은 시인이 병든 까닭이요, 시가 죽은 것은 시인이 죽은 것이다.
어른들의 잘못된 시 쓰기는 아이들의 시 쓰기 교육도 그릇되게 하고 있다. 오늘날 아이들은 초등 학생이고 중고등학생이고 모두가 어른들이 쓰는 시나 동시를 흉내내어 쓴다. 어른들의 흉내를 내도록 하는 것이 시쓰기 지도가 되어 있느니 기가 막힌다. 어른들의 시 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흉내내기를 가르친다면 절대로 시가 쓰일 수가 없고 도리어 시를 쓰는 마음을 죽여 버리는 것인데, 잘못된 말로 써 놓은 시를 그대로 따라서 쓰도록 하고 있으니 무슨 시가 되겠는가? 이래서 아이들이 써 놓은 시란 것도 말의 오염이 될 대로 되어간다. 초등 학생들은 동시란 것을 쓰면서 흉내와 말장난을 하고, 중고등학생이나 청소년들도 유식한 말이나 근사한 외국말법으로 글장난하는 짓을 시 쓰기로 알고 있다.
학생들이 시를 살리고 말을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 따라가는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어른들의 글에서 말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저보다 더 어린 아이들한테서 말을 배우고, 더 어렸을 적에 익힌 말을 살려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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