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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9호 2022.10.7 (음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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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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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법이 발달되고 나서 사람들은 필요한 것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음식을 먹는다.
―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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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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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는 여성?
세상이 케이크라면 말은 칼이다. 한국 사람들 눈에는 명사를 남성과 여성으로 자르는 프랑스어가 마냥 신기할 뿐. 이유를 당최 모르겠거든. ‘기타’가 여성형인데, ‘우쿨렐레’는 남성형이라니! 이런 나라에서는 새로 생겨난 단어를 둘러싼 논쟁이 붙곤 한다. 작년엔 코로나를 뜻하는 ‘코비드19’로 시끄러웠다더라. 돌림병이 처음 확산되었을 땐 다들 남성형으로 썼는데, 프랑스의 국립국어원 격인 ‘아카데미 프랑세스’에서 갑자기 여성형으로 쓰라 한 것. 당연히 성차별적이라며 시끌시끌했겠지.
한국어는 명사를 남녀로 ‘반듯이’ 구분하지는 않지. 다만, 간헐적으로 하긴 한다. 세상을 남녀, 음양, 생사,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버릇을 어찌 피해 갈꼬. ‘여학생/남학생’, ‘암탉/수탉’처럼 접두사를 붙여 사람이나 동물을 남녀로 구분한다. ‘암술/수술, 암꽃/수꽃, 암나무/수나무’처럼 식물도 마찬가지.
출신 학교를 ‘모교’라 하고 자라면서 배운 말을 ‘모어’라 하듯이, 사물을 의인화하고 암수로 나누는 건 오래된 습성이다. 오목한지 튀어나왔는지 하는 생김새(요철凹凸)나 기능을 암수에 빗댄다. ‘암나사/수나사, 암키와/수키와, 암단추/수단추’가 그렇고, 전통 줄다리기에 쓰는 ‘암줄/수줄’이나, 꽹과리를 ‘암꽹과리(중쇠), 수꽹과리(상쇠)’로, 똥꼬에 나는 치질을 ‘암치질/수치질’로 나누는 건 다 그런 연유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한글을 ‘암글’, 한자를 ‘수글’이라고 한 건 암수에 경중을 들씌운 것이고. 프랑스어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세계관도 말에 달아놓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의 영향을 받는다.
댕댕이
노인이 있었다(철부지가 아니라).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인 이 노인은 딱딱하게 굳은 채 반복되는 일상을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은 철학적인데, 왜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 불러야 하냐는 것이었다. “달라져야 해. 달라져야 한다고!” 그는 책상을 ‘양탄자’, 침대를 ‘사진’, 의자를 ‘시계’라 부르는 식으로 모든 사물에 딴 이름을 붙인다. 세상을 새로 만들어내는 일에 환호했지만, 결국 소통은 실패하고 침묵에 빠져든다.
‘댕댕이’. 멍멍이를 ‘댕댕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멍멍이가 어찌 ‘멍멍이’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기세도 좋다. 최근엔 강아지를 몰고 나와 ‘댕댕이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반려견 잔치를 벌였다. ‘댕댕런’(반려견 마라톤), ‘댕댕트레킹’(반려견 트레킹) 따위의 행사를 진행했다. 자원봉사자는 ‘댕봉이’(댕댕이 자원봉사자). 이들은 ‘커엽다’(귀엽다), ‘띵곡’(명곡)을 만들고 글자를 뒤집어 ‘옾눞’(폭풍), ‘롬곡’(눈물)이란 말을 만들며 킥킥거린다.
노인 옆엔 아무도 없었고 ‘댕댕이’ 일파는 여럿이었지만, 공통점도 있다. 사물과 말의 결합이 필연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변용되는 습관이라는 걸 보여준 점. 우리의 상징질서는 유일하거나 고정되거나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세계는 ‘A는 A다’라는 동어반복에서 ‘A는 B일 수도, C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무한 확장해 나간다. 소통 단절과 소외를 걱정하지만, 소외 없는 언어는 불가능하다. 믿기지 않는다면 옆 사람에게 ‘마수걸이’가 뭔지 물어보라. 말과 민주주의는 단수가 아닌 복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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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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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 김수영
音樂을 들으면 茶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
나비날개처럼 된 茶잎은 아침이면
날개를 펴고 저녁이면 체조라도 하듯이
일제히 쉰다 쉬는 데에도 규율이 있고
탄력이 있다 九月中旬 茶나무는 거의
내 키만큼 자라나고 노란 꽃도 이제는
보잘것없이 되었는데도 밭주인은
아직도 나타나 잘라가지 않는다
두 뙈기의 茶밭 옆에는 역시 두 뙈기의
채소밭이 있다 김장무나 배추를 심었을
因習的인 분가루를 칠한 밭 위에
나는 걸핏하면 개똥을 갖다 파묻는다
밭주인이 보면 질색을 할 노릇이지만
이 밭주인은 茶밭 주인의 小作人이다
그러나 우리집 여편네는 이것을 모두
자기 밭이라고 한다 멀쩡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을 해도 별로
성과는 없었다 성과가 없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편네의
거짓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音樂을 들으면 茶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가시가
점점 더 똑똑해진다 동산에 걸린
새달에 비친 나무가지처럼
世界를 배경으로 한 나의 思想처럼
죄어든 人生의 윤곽과 비밀처럼……
曲은 舞踊曲―모든 音樂은 舞踊曲이다
오오 폐허의 질서여 수치의 개가(凱歌)여
茶나무냄새여 어둠이여 少女여
休息의 休息이여
분명해진 그 가시의 意味여
모든 曲은 눈물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의 얼굴의 사마귀를 떼주었다
입 밑의 사마귀와 눈 밑의 사마귀……
그런 사마귀가 나의 아들놈의 눈 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도 꼭 빼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 눈 아래에 다시 생긴 사마귀는
구태어 빼지 안을 작정이었다
「눈물은 나의 장사이니까」―오오 눈물의
눈물이여 音樂의 音樂이여
달아난 音樂이여 반달이여
내 눈 아래에 다시 생긴 사마귀는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다
<1963.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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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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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管鮑之交)
管:대롱 관. 鮑:절인 고기 포. 之:갈 지(???의). 交:사귈 교.
[동의어] 관포교(管鮑交). [유사어] 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반의어] 시도지교(市道之交). [출전]《史記》〈管仲列傳〉, 《列子》〈力命篇〉
관중(管仲)과 포숙아(鮑淑牙) 사이와 같은 사귐이란 뜻으로,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
춘추 시대 초엽, 제(濟)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 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보좌관)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나라와 거(?)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창름실즉 지예절]’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 知榮辱(의식족즉 지영욕)]’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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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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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똑같은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요청하라
기다리지 말아라. 적당한 때는 절대 오지 않는다. - 나폴레옹 힐
매우 흥미있는 조사 결과가 있다. 모든 판매원이 46%가 한 고객에게 한 번 요청했다. 모든 판매원의 46%가 한 고객에게 한 번 요청했다. 모든 판매원의 14%가 한 고객에게 세 번 요청했다. 모든 판매원의 12%가 한 고객에게 네 번 요청했다. 그리고 단지 4%의 판매원이 똑같은 사람에게 그들의 사업을 위해서 다섯 번 요청했다......그리고 그중 60%가 팔았다...... 그러니, 요청하고, 요청하고, 요청하고, 또 요청하라!
한 번만 더 요청하라 - '화자 근원서' 제2권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에 담긴 메시지는 강력했다. 다음은 1942년에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라파엘 솔라노는 육체적으로 지치고 탈진했다. 그는 마른 강가의 둥근 돌에 앉아 동료들에게 선언했다.
"내가 다 훑어봤어. 거기에는 쓸 만한 것이 없어.저 조약돌을 좀 봐. 나는 999,999개의 돌을 집었지만 다이아몬드는 단 한 개도 없었어. 이제 딱 한 개만 더 집으면 백만 개가 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야? 난 포기할래!"
수색대가 베네쥬엘라의 수로 바닥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은 것도 벌써 여러 달째였다. 그들은 정신적, 육체적, 감정적으로 지쳤다. 그들의 옷은 너덜너덜한 넝마였고, 그들의 의욕은 바닥을 맴돌았다. "딱 한 개만 더 집어서백만 개를 채우자." 한사람이 말했다. 솔라노는 동의하고 달걀 크기만한 조약돌을 집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과 달랐고, 그들은 다이아몬드를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뉴욕 보석상 해리 윈스톤이 그 백만 번째 돌에 20만 달러를 지불했다. 그것은 '해방자'라 명명되었고,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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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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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9장 초나라로 쳐들어가다
5. 팔로 대군의 기치를 드높이며
초성왕의 질투
한편 남방의 초나라는 점차 국력이 충실해져 갔다. 초성왕 웅운은 은근히 천하를 쥐고 싶은 야심이 생겼다. 당시 한동(漢東) 땅 일대의 크고 작은 나라들은 이미 초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중원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언제나 제환공을 칭송하는 것이었으니 초성왕은 매우 불쾌해 하고 있었다. 더욱이 지난 해 산융을 정벌하고 얻은 5백 리 땅을 아낌없이 모두 연나라에 내주었다는 소식은 가뜩이나 큰 야심과 명성을 좋아하는 초성왕의 질투심을 자극하고 속을 몹시 상하 게 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형나라, 위나라를 도와 적(狄)을 물리치고 성(城)까지 쌓아 주었다 해서 모든 나라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는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초성왕은 매우 불쾌했다. 마침 영윤 벼슬에 있는 자문이 곁에 있었다. 초성왕이 탄식했다.
"제후(齊侯)는 덕을 펴서 이름을 드날리고 인심을 얻었다지. 그런데 과인은 한동(漢東) 구석에 있으면서 덕은 족히 인심도 이끌지 못하고 위엄은 족히 민중을 누르지 못함이라. 오늘날 세상에 제나라만 있고, 우리 초나라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과인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노라."
자문이 대답했다.
"제후가 패업을 경영한 것이 근 30년이나 됩니다. 그는 주왕(周王)에게 충성하는 걸로 명분을 내세우느니만큼 세상 모든 제후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히 그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북 사이에 위치한 정나라는 마치 병풍의 안팎 같습니다. 왕께서 만일 중원(中原)을 도모하고자 하실진대 먼저 정나라부터 정복하십시오."
초성왕이 물었다.
"누가 능히 과인을 위해 정나라를 정벌하겠느냐?"
대부 투장(鬪章)이 앞으로 나서며 청했다.
"신이 정을 치겠습니다."
초성왕은 투장에게 병차 2백 승을 내줬다. 이에 초군(楚軍)은 정나라로 쳐들어갔다.
한편 정나라는 늘 초나라에 대한 불안 때문에 성을 쌓고 초나라 거동만 주시하고 있었다. 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온다는 세작의 보고를 듣고 정문공은 크게 놀라 즉시 병사를 모아서 내주며 대부 담백을 순문으로 보냈다. 담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순문을 지키러 갔다. 동시에 정나라 사자는 이 급한 사태를 제환공에게 고하여 구원을 받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쪽으로 달렸다. 제환공은 정나라 사자를 인견하고 즉시 모든 나라 제후에게 격문을 보냈다. 격문을 받은 모든 나라 제후는 제환공의 지시대로 장차 제나라 정(檉) 땅에 가서 일단 모인 후에 정을 구원할 요량이었다.
한편 초나라 투장은 도중에서 정나라에 모든 준비가 갖추어 있고 또 제나라 구원병이 올 것이란 소문을 듣자, 아무리 생각해도 불리할 것만 같아서 정나라 경계 가까이까지 갔다가 일단 시위만 하고 돌아왔다. 군대가 정나라를 치러 갔다가 아무 성과없이 돌아온 걸 보고 초성왕은 대로했다. 그는 차고 있던 칼을 풀어 투렴에게 주며 말했다.
"곧 군중(軍中)에 가서 투장의 목을 참하여라."
투렴은 바로 투장의 형이었다. 투렴은 군중에 가서 초왕의 말은 하지 않고 동생 투장과 만나 비밀리 상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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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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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윤오영편"
윤오영(1907~1976)
수필가. 서울 출생. 양정 고보 졸업. 장기간 교편 생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시선에 잡히는 모든 사물을 고전의 세계에 접합시켜 독특한 아취를 자아내곤 하였다. 정묘한 문장을 추구하였고 역대 문장가들의 글을 깊이 연구하여 "연암의 문장" "노계 가사의 재평가" 등의 논저를 남겼다. "한국의 창 연구"는 특히 주목을 끈 논문이다.
백사장의 하루
눈이 떠지자 창을 여니 아청빛 푸른 하늘이 문득 가을이다. 어제까지의 분망과 노고가 씻은 듯 걷히고 맑고 서늘한 기운이 흉금으로 스며든다. 소제를 마치고 나도 모르게 길에 나서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등산객들과 소풍가는 남녀들로 근교행 버스는 바쁘다. 복잡을 피하여 사잇길로 빠지니 곧 경춘선로의 교차점이 아닌가. 예정 없이 버스에 올라, 가는 대로 맡기니 버스는 군말없이 달린다. 이윽고 강안을 지난다. 강이 아름다워 차를 스톱시키고 내리니 인적이 고요한 소양강 하류의 이름 모를 백사장, 하루의 유정을 풀기에 가장 좋을 곳인상 싶다. 백사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청한을 읊조린다. 단풍은 아직 일러 산봉우리는 푸르고 거울같이 맑은 물 위에 떠가는 구름이 가끔 짙은 시름을 던진다. 그러나, 끝없이만 보이는 백사장에는 갈매기 그림자 하나 없고, 10년에 한 번인 듯 느껴지는, 가물거리는 포범이 아쉽게 반갑다. 나는 누워서 문득 생각한다. 천추 일심이요 만리 일정이라고.
고왕금래 수년 만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우리의 혈관을 끓어오르게 한다. 사책을 헤치거나, 전설을 뒤지거나 혹은 저기를 보고 혹은 소설을 읽다가도 옳은 것을 위하여 의분을 느끼고 악한 것을 위하여 증오하고 타기하며 사리에 그릇됨을 개탄하고 인생의 과오를 슬퍼함은 너나가 없건만, 매양 같이 슬퍼하고 같이 분개하던 그들이 한 번 현실에 발을 들여놓자 드디어 스스로 증오와 타기의 인간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간이 사는 곳에 비환이 있고, 비환이 있는 곳에 정회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알지 못하는 고도의 이족과도 정은 통할지니 어찌 서로의 애정이 없으며, 저 가물거리는 포범과 같은 반가움이 없으랴마는 어찌하여 서로 적대하고, 시의해야 하며, 심하면 동족도 구수같이 상잔해야 하며, 이웃도 헤치고, 가족도 등지며 배반하고, 모해와 살육이 사상에 그칠 날이 없어야 하는가. 서로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이요, 창해에 뜬 좁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진부한 옛 말을 굳이 되씹어 본다. 와우각상에 쟁하사요, 석화광중에 기차신이란 감상적 애수가 스며드는 것은 최근 나의 과로로 인한 신경의 쇠약에서 오는 것일까.
천추의 느끼는 그 마음은 하나요, 만리에 느끼는 그 정은 하나다. 불가에서 생사를 허무에 돌려, 생야에 일편부운기요, 사야에 일편부운멸이라 했다. 그러나, 한 조각 구름은 떠난 뒤에 남는 것이 없지만 사람은 간 뒤에도 정이 남지 않는가. 고래로 뜬 구름같이 사라진 사람들이야 이제 그 잔해인들 남아 있으랴마는 인류가 존속하는 날까지 면면이 지속해 오는 것은 이 정이다. 불가의 만유귀심이란 그 법심이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심심심이 곧 정이다. 정근을 버리고 미망에서 벗어나 대오귀심을 외치는 대덕에게 심심심이 정이라면 속성의 완미함을 연민해할지 모르나, 나는 원래 그런 묘망한 진리와는 연이 없는 듯하다. 나에게 철학이 있다면 정의 철학이요, 나에게 생활이 있다면 정을 떠나서 따로 없다. 혹 나의 깨닫지 못하는 완미를, 혹 나의 지성 부족한 우둔을 비웃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이것이 아니고는 인생을 맛보며 살 길이 없다. 인간이란 신과 짐승의 사생아라고 한 이가 있다. 그렇다면 정이란 사생아의 개성이다. 신은 이미 정을 초월해 있을 것이요, 짐승을 아직 이 정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말은 영리한 사생아들의 엉뚱한 어휘다.
성리학자들은 성이니 정이니 하는 말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서 설명한다. 심은 일신의 주재니 성과 정을 통솔하고, 성은 천부의 이니 칠정을 낳는다. 희노애구 애오욕은 기질의 청탁에 따라 때로 선이 되고 때로 악이 되지만 그 본원은 천명의 성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이 선일진대 중화의 덕을 길러 삼재의 하나로서 천지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합리적이요 오묘한 철리엔 둔하다. 또 굳이 형이상학적으로 그 본질을 캐고 체계를 세워 논리를 정리하는 수고를 청부받을 생각도 없다. 무릇 곡소비환이 생활의 표현일진대 이것이 진정이요 인생이 아닌가.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심정의 세계를 나는 지금 체감하고 있다. 심이라 해도 좋고 성이라 해도 좋고 정이라 해도 좋다. 나는 적절한 용어를 모른다. 오직 천추일심만리일정, 심즉정이다. 심은 추상적인 존재요, 정은 구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실로 영속적인 생의 실체요 영속적인 인간의 내용이 아닌가.
흰 구름장이 바람에 불려 강상으로 떠가더니 산봉우리에서 사라진다. 강 속의 그림자도 사라진다. 문득 채근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풍래소죽에 풍과우 죽불유성이요, 응도한담에 응법우 택불유경'
그렇다. 바람 간 뒤에 소리는 대밭에 남아 있지 않고, 기러기 날아간 뒤에 그림자는 담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나는 채근담 저자의 낯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눈 위에 기러기 발자취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떨어지는 꽃잎에서 또 그것을 느껴야 한다. 이 곧 천추일심이요, 만리일정이다. 강안 길로 되돌아 허튼 걸음으로 한식경을 걸었다. 버스가 이삼 차 지나갔을 뿐 고요한 강안의 길이다. 길가에 한 주점이 있다. 막걸리 안주로 도토리묵이 있다. 요기하기에 족했다. 숭굴숭굴하고 부드러운 주모의 씩 웃는 인사가 제법 구수하다. 친절, 불친절 없이 늘 보는 이웃에 대하듯 태연한 인사, 영접을 위해서 마음을 쓸 필요조차 없는 한적한 주점인 까닭이다. 이해의 득실이 없으면 스스로 담연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가는 말이 구수하다. 버스가 왔다.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몸을 실었다. 녹색의 산봉우리들은 석양에 물들어 빛이 더욱 곱고, 강물은 그늘이 져서 검푸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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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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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캘커타의 아침 해처럼 - 마더 데레사께
`나는 목마르다`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말씀을 새기며
우리를 사랑의 길로 초대하시는 수녀님
"마리아를 통해 예수께로 가자"
"우리가 먼저 기쁘게 살고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자"고 항상 외치시는 수녀님
캘커타의 어느 감옥의 벽에
마하트마 간디와 나란히
큰 얼굴로 그려져 있던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을 완전하게 사랑할 순 없어도 모든 이를 완전하게 사랑할 순 있다"
고 의미있는 말씀을 하셨지요?
예수 안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당신은 세상 곳곳 벽을 넘어 날개도 없이 날아다니는
사랑의 천사이며 희망의 어머니임을 사람들은 압니다
인도에서 만난 많은 이들도 당신을
위대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살아 있는 성녀로 칭송의 표현을 했지만
그 어떤 칭호에도 관심없다는 듯
당신은 오직
예수안에만 깊이 잠겨 계시고
예수가 그토록 사랑했던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십니다
오후 네 시가 넘으면 해가 지기 시작하던
캘커타의 그 길고 긴 강처럼
가슴엔 긴 사랑이 넘쳐
세계로 흘러가는 어머니
우리가 편히 쉬고 즐기며
각자의 취미생활에 빠져 있는 순간에도
당신은 발이 부르트도록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시느라
자신의 안락한 삶은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러한 당신을 생각하면
찡한 감동으로 눈물이 나면서도
당신을 닮지 못하고
여전히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부끄러운 제 모습을 봅니다.
이제 당신은 멀리 계셔도
저는 가까이 듣습니다.
"우리가 깊이 기도할 땐 영원을 만난다"는 그 말씀을 깊이 새기며
캘커다의 아침 해처럼
가난한 이의 마음에 떠오르는
당신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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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 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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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서사문 쓰기1 (2/2)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부터
우리가 쓰는 글에서 가장 많은 글이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 어찌 되었다는 이야기를 쓰는 서사문 이다. 소설도 서사문이다. 어린이고 어른이고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쓰는 일기도 거의 모두 서사문이다. 기행문도 서사문이라 할 수 있고, 감상문도 서사문이 그 안에 들어 있기가 예사다. 수필이나 조사 보고문에서도 서사문이 끼어드는 수가 많다. 이 서사문은, 그 글 안에서 동물이나 식물이 임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사람이 임자가 되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사람의 이야기를 쓴 글은 나 곧 자기가 무엇을 한 이야기를 쓰는 글과, 자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쓰는 글,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경우, 초등 학생이라면 제 동생의 이야기를 많이 쓰겠지만, 중고등학생이라면 부모님 이야기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를 흔히 쓰게 된다. 여기서 부모님 이야기를 쓰는 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부모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구든지 한 차례는 부모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부모님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사람이기에 자기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가족의 역사를 적은 일이다. 가족의 역사를 찾는 일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고, 자기를 올바르게 지키고 키워갈 수 있다.
셋째,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살아오신 이야기를 쓰게 되면 저절로 깨끗한 우리말로 쓰게 된다. 적어도 다른 글보다는 덜 오염된 글을 쓰게 된다. 그 까닭은, 책에 씌어 있는 글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고, 지식이나 교훈은 귀로 들었던 말로 쓰는 이야기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세상을 몸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쓰기 때문이다. 앞에서 부모님 이야기를 나 가 아닌 남 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것은 나 와 나 아닌 사람을 구별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사실 어머니 아버지는 남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라고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쓸 때는, 자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고 함께 살아온 동안의 일들은 바로 겪었던 일이기에 잘 생각해 내기만 하면 쓸 수 있지만,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나 나서도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의 일은 부모님이나 그 밖의 가족들한테 들어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듣고 또, 더러 필요할 때는 조사도 해서 쓰게 되는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이 예사다.
어느 정도로 길게 쓰나 하는 것도 미리 작정해서 얼거리를 잘 잡아야 한다. 2백자 원고지로 백 장 쓸 수도 있고, 열 장이나 스무 장쯤 쓸 수도 있다. 길이에 따라 쓸 내용도 정한다. 물론 문체도 합니다 로 할지 한다 로 할지 미리 작정해 두어야 되겠지.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만든 문집에 들어 있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오신 길을 저마다 찾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 씌어 있는 말도 눈여겨보기 바란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길 - 이연자
1931년 6월 14일 새벽, 사람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사이에 평일도의 풀 냄새 나는 골짜기에서 우리 어머니는 태어나셨다. 차근차근 나이를 먹어서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학교는커녕 밥 한 끼도 제대로 배불리 먹어 볼 때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남의 아이를 봐 주면서 자랐다. 해가 동산에서 뜨기도 전에 일어나 험한 삼으로 나무를 하러 가곤 하셨다. 촌구석에서 이렇게 저렇게 사시다가 어느 아주머니의 소개를 받고 18살 한찬 꽃다운 나이에 월송리라는 아주 큰 동네로 시집을 왔다. 그러나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래서 생활하면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몇 년이 흘러서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만 남으셨다. 맨 처음 시집 왔을 때는 시아버지께 사랑을 받았으나 이제는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남의 마을 산까지 올라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해와서 아침밥을 지으셨다. 또 집안 일을 조금 하다가 점심이 되면 산을 향해 달렸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다쳐서 멍들기도 했지만 꾹 참고 살아오셨다. 23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우리 큰언니를 낳으셨다. 힘들게 낳은 아이가 딸이었기 때문에 월송리에서 무섭다고 소문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께 밥 한 깨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계속 일만 하셨다. 몇 년이 흘러 우리 둘째 언니가 태어났다. 이제는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시누이한테까지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을 받았다. 그후 우리 어머니는 더욱더 실망과 좌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딸만 낳는다고 허구헌날 아이를 등에 업도 일을 하게 했다. 그후 몇 년이 흐르고 또 흘러 어머니는 아이를 또 낳으셨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난리인가? 또 딸이었다. 시어머니와 아버지는 쓸모 없는 딸만 낳는다고 하시면서 재혼까지 하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과 괴로움 속에서 사셨다. 또 몇 년이 흘렀다.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이젠 동네 사람들조차도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갈 때마다 고개를 못들고 다니셨다. 날마다 마음만 아플 뿐이었다.
몇 년이 흘렀다. 어머니는 또 아이를 낳으셨다. 듬직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동네 잔치를 벌일 만큼 기분이 좋으셨다. 시어머니는 손자를 보고 몇 달 더 사시다가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이제 안심이 되었다. 아들을 낳으셨으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업고 춤을 추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러 다니셨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께 고생했다고 등도 두드려 주고 하면서 잘 대해 주었다. 몇 년이 흘러 어머니는 또 아들을 낳으셨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풍이 많이 걸려서 고생을 하셨다. 몇 년이 흘러 아이를 또 낳으셨다. 또 아들인 줄 알았는데 쓸모 없는 딸이었다. 나이를 많이 먹도록 아이를 낳으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병을 얻으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탕약을 사서 어머니를 보해 주셨다. 그 탕약을 먹고 나서 몸이 점점 좋아지셨다.
세월이 흘렀다. 막내딸이 5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신장을 앓으셨다. 몸이 부었다. 그래서 가난한 살림에도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는 돈도 없었고 또 수술을 한다 해도 어머니 몸이 너무 약해서 수술을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그냥 약만 먹고 몸 부은 것만 빼고 집에 돌아오셨다. 1년이 흘러 막내딸이 6학년이 되었다. 갑자기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힘이 더 빠지셨다. 막내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또 병이 악화되어서 병원에 가셨다.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오면 또 악화되고 그랬다. 막내딸이 바로 나, 이연자다. 딸들은 막내만 빼고 다 시집을 갔다. 어머니는 더 많이 늙으셨지만 즐겁게 살고 계신다.
- 금일 중학교 3학년 5반 졸업문집
보리처럼 꿋꿋하게 에서 참으로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걸어오신 어머니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 나라어머니들은 이렇게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어쩌다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거의 모든 어머니들이 이 어머니처럼 험악한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어머니가 딸을 낳았다고 해서 시부모나 남편한테 학대를 받는 것은 사람의 권리를 짓밟히는 일이지만, 지난날에는 이런 인권유린을 당연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옛날의 왕조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얼마전까지도 있었다. 다음은 1985년 4월 경북 울진군 온정국민학교 3학년 김은정이란 어린이가 아기 라는 제목으로 쓴 시다.
아기가 남자가 아니라고 집안 식구들은
매일 욕을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수건을 들고
우는 모습을 본다.
어머니, 왜 우세요?
하고 물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할머니께서는 아기 얼굴마저도
돌아보시지 않는다.
여자 놓든 남자 놓든
엄마 마음대로 놔,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차라리 태어나지나 말지,
설움만 받고 크는 아기.
어째서라도 나는
아기를 키우고 말겠다.
나는 지금까지, 초등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쓴 시에도 이만한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시인이라는 어른들이 쓴 요즘의 시에서도 이만큼 감동을 받은 시를 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국민하교 3학년 아이가 과연 이렇게 썼을까, 하고 놀라고 의심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른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 마음이 병들고 재능이 시들어 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착한 마음과 올바른 생각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아이들은 가끔 이런 훌룡한 시를 쓰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온갖 험한 고난의 길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어머니가 정성을 들여 기르는 아이한테서는 이런 감동이 넘치는 시가 나오게 되어 있다고 본다. 아무튼 딸아이를 천대하는 이 어리석고 야만스런 풍습이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그 뿌리가 뽑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이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고, 그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옛날에 견주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것을 우리 스스로 바로잡지 않고 민주 사회를 세울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제 글에 나타난 말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은 아주 깨끗한 말로 썼다. 이중과거형 었었다 가 한 군데도 없고, 일본말법이 없고, 어려운 중국글자말도 안 썼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게 되니까 말도 저절로 쉬운 우리말이 된 것이다. 더구나 가난해서 학교에도 못 가고 남의 집에서 아이를 봐 주면서 밥 한끼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자라난 어머니가, 시집을 가서는 또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적는데 어찌 우리말이 안되겠는가. 우선 제목부터 어머니의 살아오신 길 이라 하지 않고 어머니가 살아오신 길 이라 한 것이 잘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요즘은 초등 학생들이 쓴 글에도 나의 어머니 란 말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우리말을 쓴 것이 반갑다. 우리말로 쓴 글에 우리말이 나왔다고 칭찬을 해야 하는 것이 기가 막힌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쓰기 사정이다.
- 또 몇 년이 흘렀다.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때에 다라서 이렇게 글월을 짧게 쓴 것도 읽기가 좋다. 긴 사연을 줄여서 쓰자니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으로 쓰는 말이라도 좀더 깨끗한 우리말이 있으면우리말을 살려서 쓰도록 하는 것이 좋다. 가령 생활 이란 말도 때에 따라서 쓸수도 있지만 살아간다 고 해도 될 자리에 생활한다 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래서 생활을 하면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이 대문에 나온 생활을 하면서 는 살아가면서 라고 쓰는 것이 좋다.
-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이것은 그대로 두어도 되겠지. 만약에 고친다면 지옥 같은 시집살이를 했다고 하면 될 것이다.
다음은 1년 이란 말인데, 10년, 20년, 100년 할 때는 년 이라야 되겠지만 1년 2년은 한 해 두 해 가 낫겠다. 이것은 한 해가 지나 로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몇 년 도 마찬가지다.
- 몇 년이 흘러
- 또 몇 년이 흘렀다.
이 글에는 이렇게 몇 년 이 많이 나온다. 모두 몇 해가 지나 라든지 몇 해가 흘렀다 고 쓰면 좋겠다.
- 산을 향해 달렸다.
이것은 산으로 올라갔다 고 쓰는 것이 낫다. 흔히 학교로 갔다 든지 집으로 갔다 고 쓸 말을 학교로 향해 갔다 집으로 향해 갔다 고 쓰는데, 좋지 못한 글버릇이다. 학교로 향했다 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 그후
이것도 그 뒤 라고 쓰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다.
- 더욱더 실망과 좌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부분이 좀 마음에 안든다. 좌절 속으로 빠져 와 같은 유식한 말을 쓰지말고, 정말 어머니가 들려줄 것 같은 말로 쓰는 것이 좋겠다.
- 병이 악화되어서
- 또 악화되고
이렇게 나오는 이 악화란 말도 따지고 보면 글에서나 쓰던 유식한 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입으로 하는 말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이 나빠져서 또 병이 나빠지고 이렇게 말하니 글도 말 그대로 쓰는 것이 옳다. 또 우리말에는 저친다는 말이 있고 도진다는 말도 있다. 병이 더쳐서 또 더쳐서 라든가 병이 도져서도 도져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우리말을 살려서 쓰는 일이 아주 급하고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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