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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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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가운데 가장 소중한 재능은 한 마디면 될 때 두 마디 말하지 않는 재주. ― 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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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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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소리
나는 목소리가 작고 가늘다. 마초처럼 안 보이는지 상대방에게 별다른 경계심을 사지는 않는다. ‘말발’이 잘 안 먹히는 게 문제이긴 하다. 주요 인물이 아닐 듯하고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뭐, 어떠랴, 틀린 말도 아니니. 말수도 적은 편이라, 그야말로 ‘민주평등사회’에 어울리는 목소리이다.
나는 목소리가 큰 것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내 얘기가 타인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건 싫다. 친구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남이 들으니 작게 말하라 한다. 반면에 타인의 큰 소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뿐더러 즐기기까지 한다. 모르는 사람이 거침없이 떠드는 걸 듣는 게 좋다. 버스에서 딴 사람도 들리게 ‘혼잣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운이다. 영화를 보며 “어이구, 거길 왜 또 들어가!” 하며 안타까워하는 어르신의 외침은 얼마나 정겨운지.
그 사람들은 왜 ‘공공장소’에서 크게 말을 할까 궁금하다. 하지만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다. 왜 우리는 큰 소리로 말하는 걸 ‘무례함’이나 ‘무식함’이라는 가치판단과 연결시키는 걸까? 때와 장소를 가려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건 현대인이 갖춰야 할 예의범절이라고 보는 것일 텐데, 그런 감각의 출처는 어딘가? 식당에서 잠시 앉는 자리처럼 시시때때로 생기는 사적 공간은 정말로 나만의 공간인가? 큰 소리는 그 공간을 침범하는 게 분명한가?
사회질서가 무서운 건, 그것이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한덩어리로 구조화함으로써 이 세계를 유일하고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는 나의 이 얄팍한 감각이 의심스럽고 마음에도 안 든다.
간장하다
접시에 초밥을 얹어주며 주인장은 ‘짭짤하니 간장하지 말고 먹으라’고 한다. ‘간장을 찍다’는 뜻일 텐데, 초밥집이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거다. 어느 고깃집 외벽에 굵은 글씨로 ‘고기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흐음, 고기를 먹으라는 뜻이렷다.
영어에는 명사였던 단어가 꼴바꿈 없이 그대로 동사로 쓰이기도 한다. ‘fish’는 ‘낚시를 하다’, ‘e-mail’은 ‘이메일을 보내다’라는 뜻인데, 그 명사로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bus’는 ‘버스로 이동하다’, ‘text’는 ‘문자를 보내다’라는 식.
한국어는 ‘하다’를 붙여야 한다. ‘공부하다, 운동하다’처럼 앞말에 대부분의 뜻이 담겨 ‘하다’가 할 일이 크게 없는 경우가 많지만, ‘나무하다’나 ‘밥하다’처럼 사물 명사가 오면 달라진다. ‘땔감을 마련하다’, ‘밥을 짓다’라는 뜻을 가지니 말이다. ‘약하다’는 ‘마약을 복용하다’, ‘머리하다’는 ‘머리를 다듬다’, ‘한잔하다’는 ‘한잔 마시다’를 뜻한다. 가만히 보면 그 행동과 결부된 사회문화적 관행과 연결되어 있다. ‘나무하다’가 나무를 심거나 나무로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땔감을 마련한다는 뜻인 것도 나무를 ‘땔감’으로만 대했던 시대상황과 닿아 있겠지.
맥락에 따라 다른 뜻을 갖기도 한다. ‘선물로 귀걸이했어’와 ‘귀걸이하고 권투를 했어’가 다르듯이, ‘저녁해 놓았어’라는 말에 ‘저녁하고 들어갈게’라 답하면 싸움이 날 듯. ‘택시하다, 버스하다’가 노동자에게는 운전으로, 사장에게는 회사운영으로 읽히는 걸 보면, 말 속에는 사람이 들어앉아 있는 게 분명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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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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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란넬 저고리 - 김수영
잠을 자고나서 들어보면
후란넬 저고리도 훨씬 무거워졌다
거지의 누더기가 될락말락한
저놈은 어제 비를 맞았다
저놈은 나의 勞動의 象徵
호주머니 속의 소눈깔만한 호주머니에 들은
물뿌리와 담배부서러기의 오랜 親近
윗호주머니나 혹은 속호주머니에 들은
치부책노릇을 하는 종이쪽
그러나 돈은 없다
―돈이 없다는 것도 오랜 親近이다
그리고 그 무게는 돈이 없는 무게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 있나 나의 호주머니에는?
연필쪽!
옛날 추억이 들은 그러나 일년내내 한번도 펴본 일이 없는
죽은 기억의 휴지
아무것도 집어넣어본 일이 없는 왼쪽 안호주머니
―여기에는 혹시 휴식의 갈망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휴식의 갈망도 나의 오랜 親近한 친구이다……
<196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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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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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침안면(高枕安眠)
高:높을 고. 枕:베개 침. 安:편안할 안. 眠:잘 면.
[동의어]고침이와(高枕而臥).
[출전]《戰國策》〈魏策 哀王〉, 《史記》〈張儀列傳〉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잔다는 뜻. 곧
① 근심 없이 편히 잘 잠. ② 안심할 수 있는 상태의 비유.
전국 시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종횡가(縱橫家)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합종(合縱), 장의는 연형(連衡)을 주장했다. 합종이란 진(秦)나라 이외의 여섯 나라, 곧 한(韓)위(魏)제(齊)초(楚)가 동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며, 연횡이란 여섯 나라가 각각 진나라와 손잡는 것이지만 실은 진나라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 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문왕(惠文王) 10년(B.C. 328)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哀王)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애왕에게 말했다.
“전하, 만약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화만 없다면 전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주무실 수 있사옵고[高枕安眠]’ 나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애왕은 결국 진나라와 화목하고 합종을 탈퇴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방문, 설득하여 마침내 주(周)나라 난왕 4년(B.C. 311)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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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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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타인의 입장에 서서 요청하라 1 - '화자 근원서'에서
대기업의 구매 담당은 세일즈맨에게 특히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그는 세일즈맨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저 전화할 뿐이다. 수많은 세일즈맨이 그의 요새와 같은 사무실로 통과하려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한 세일즈맨이 마침내 그의 방어벽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한쪽 다리에 메모를 묶은 교신용 비둘기를 그에게 보냈다. 그 카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상품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우리 대사를 창문 밖으로 날려보내세요."
- 베티 마제티 해치
모델과 탤런트의 강사이자 에이전시로서 나는 어떤 일이든 원하는 입장이 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결과, 우리의 영화 및 텔레비전 성격 배우 중 한 명인 행크 언더우드는 광고의 건설 노동자를 뽑는 면접에 가면서 안전모와 작업복에게 연장 벨트까지 갖췄다. 그는 그 사무실 안내원에게 말했다.
"행크 언더우드라고 하는데, 뭘 하면 될까요?"
안내원은 대답했다.
"아닙니다. 나는 광고의 건설 노동자를 뽑는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물론 그는 일을 따냈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요청하라 2 - 베티 마제티 해치
어린 시절, 남부 시골에서 살 때 나는 우리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관람한 후에 '크리스탈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나보다 더 어린 소년이 신문을 팔고 있다가 우리 아버지에게 한 부 사시라고 했다.
"됐다, 벌써 읽었다."
"사모님은 어떠세요? 신문을 읽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소년은 끈질겼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농을 걸었다.
"아, 이 사모님은 글을 못 읽는단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린 소년은 검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신문 한 부를 사서 사모님의 뒷주머니에 넣으면, 그분이 그렇게 멍청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놀라는 한편 배가 아플 때까지 웃었다. 소면은 거절에 대하여 빠르고, 긍정적이고, 영리한 반응을 보였다. 우리 아버지는 큰 감명을 받아 그 신문을 샀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요청하라 3 - '달을 따달라고 요청하기'에서
이 이야기는 '친구를 얻고 사람들을 감명시키는 법'이라는 책에 실린 것으로, 데일 카네기가 즐겨 말했었다. 몇 년 전, 베들레햄 철강회사는 저돌적인 사장 찰스 스왑에게 연봉 1백만 달러를 지불했다. 스왑이 그 월급을 받은 이유는 그가 사람들로부터 원하는 결과는 얻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세 명의 직원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적발했다. 흡연은 사규에 위반되었으므로 그는 그들에게 경고와 함께 질책할 권리가 있었다.
"담배는 안돼, 자네들은 규칙을 알잖나."
하지만 스왑은 그런 말이 '우리'라는 공동체 정신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런 말은 사원들을 위축시키고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질책 대신 주머니에게 담배 세 개비를 꺼내 한 사람씩 나눠주며 말했다.
"이보게, 내 담배를 피우게. 하지만 자네들이 그 담배를 근무 시간에 피우지 말아 줬으면 고맙겠네."
누군가 한 번 스왑에게 그렇게 충성스럽고 근면한 직원을 두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도 비판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최고를 이끌어 내는 방법은 칭찬과 격려입니다."
그는 요청하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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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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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9장 초나라로 쳐들어가다
3. 鶴이 오랑캐를 막아 주나
好鶴亡國
더구나 우스운 것은 위의공이 기르는 학은 다 직품(職品)과 직위(職位)가 있어서 녹을 받았다. 가장 좋은 학은 학대부라 하여 대부의 녹을 받고, 그만 못한 놈은 선비의 녹을 받았다. 위의공이 행차할 때면 수레 앞에 태우는 학을 학장군이라고 불렀다. 이래서 학대부, 학장군이란 말이 생겼다. 벌써부터 백성들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자조 섞인 풍조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학에게 물어보면 될 게 아니냐."
한편 오랑캐 북적(北狄)은 원래가 거칠고 강성한 족속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북적의 주장(主長)은 수만이란 자였다. 수만은 야심이 컸다. 평소에도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준비하면서 중원 땅을 노렸다.
"제환공이 이번에 산융을 쳐서 영지와 고죽국을 멸망시킨 것은 우리 적(狄)도 멸시한 것이나 다름없도다. 내 마땅히 중원을 쳐 이를 갚으리라."
이러한 명분으로 수만은 오랑캐 족속들을 유혹했다. 마침내 수만은 기병 2만을 거느리고 형(邢)나라를 짓밟더니 곧 위나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 때 위의공은 학을 수레에 싣고 또 궁 밖으로 놀러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변경에서 달려온 사자가 급보를 전했다.
"오랑캐 적(狄)의 내침!"
위의공은 크게 놀라 즉시 군사를 모으고 적을 막도록 서둘렀다. 그러나 군사들이 모이지 않았다. 백성들이 모두 멀리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위의공은 병역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수일 동안에 수백 명의 백성들이 잡혀 위의공 앞으로 끌려왔다. 위의공이 물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병역을 기피하고 도망쳤느냐?"
그들이 이구 동성으로 대답했다.
"주공께서는 한 가지만 쓰시면 능히 오랑캐를 물리칠 텐데 무엇땜에 저희들 백성들을 동원하려 하십니까?"
위의공이 의아해서 물었다.
"한 가지를 쓰라니, 그게 뭔가?"
"그건 학입니다. 학에게 명령하시면 될 게 아닙니까."
위의공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다시 물었다.
"학이 어떻게 북쪽 오랑캐를 막는단 말이냐?"
"학이 능히 싸울 줄을 모른다면 그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 아니오이까. 상감께선 유용한 백성은 돌보지 않고 무용한 학만 기르시기 때문에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위의공이 사정하듯 물었다.
"과인의 잘못을 이제야 알겠도다. 학을 다 날려 보내면 백성이 내 명령에 복종하겠는가?"
석기자가 아뢰었다.
"주공께서는 속히 그렇게 하십시오. 오히려 시기가 늦지 않았나 두렵습니다."
이에 위의공은 학을 다 날려 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모든 학은 워낙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아서 하늘 높이 빙빙 돌다간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학은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석기자와 영속 두 대부가 친히 거리에 나가서 연설했다.
"우리 상감께선 자기 잘못을 후회하고 계신다!"
그제야 백성들은 차차 모이기 시작했다. 이 때 오랑캐 북적 군사들이 벌써 형택(榮澤)에까지 쳐들어왔다. 잠깐 사이에 급보가 세 번이나 이르렀다. 석기자가 아뢰었다.
"북적 군사는 강합니다. 가벼이 당적할 순 없습니다. 신은 이 길로 제나라에 가서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위혜공이 근심했다.
"지난날 제양공이 5로 연합군을 편성하며 열국 제후와 함께 망명중이던 과인의 아버지 위혜공을 임금 자리에 다시 복위시킨 일이 있었건만 그 후 우리 나라는 사람을 제나라에 보내어 한 번도 감사하다는 뜻과 친교하는 예를 베푼 일이 없다. 오히려 지난번에는 주천자에게 불경했다 하여 우리가 그들에게 항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 제나라가 어찌 우리를 도와 주리오. 차라리 오랑캐와 한 번 싸워 존망을 판가름하는 수밖에 없다."
병사들의 불평
영속이 아뢰었다.
"청컨대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오랑캐와 한판 승부로 그 기세를 막아 보겠습니다."
위의공은 무엇을 생각하다가 처량히 말했다.
"아니, 내가 친히 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싸움에 전력을 다 하지 않을까 두렵다."
위의공은 허리에 찬 구슬 패물을 석기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경은 모든 일을 결단하되 이 옥돌처럼 깨끗이 하여라."
그리고는 영속에겐 화살을 주었다.
"항상 전력을 다해 나라를 수호하여라."
이어서 슬픈 목소리로 비장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장차 위나라 정사를 그대 두 사람에게 모두 맡기노라. 과인은 오랑캐를 맞아 이번에 가서 적을 무찌르지 못하면 능히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석기자와 영속은 하염없이 울었다. 마침내 위의공은 군사와 병차(兵車)를 크게 일으켜 대부 거공(渠孔)으로 장수를 삼고, 우백(于伯)으로 부장(副將)을 삼고, 황이(黃夷)로 선봉(先鋒)을 삼고, 공영(孔孀)으로 후대(後隊)를 삼고, 일시에 출발했다. 군사들은 행군하면서도 원성이 분분했다. 위의공은 밤에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리기에 가만히 나가서 야영(野營)하는 군중(軍中)을 살펴봤다.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점점 똑똑히 들려왔다.
학이 국록을 먹을 때 백성은 힘써 농사짓네
학은 대부가 타는 초헌을 타고 백성은 무기를 들었네
오랑캐 창날의 흉악함이여 그들과 겨루지 못할지니
싸워야 할 것인지 망설이노라 과연 몇 사람이나 살아 남을까
학은 지금 어디 있는고 우리는 싸우러 가는데
'내 이다지도 백성들이 고초를 몰랐다니.......'
위의공은 군사들의 노랫소리를 듣자 몹시 괴로웠다. 이렇게 백성들의 불만이 있는 데다가 대부 거공의 군법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군사들의 불평은 날로 늘었다. 위군이 형택 땅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오랑캐들은 겨우 천여 명밖에 없었다. 그나마 오랑캐들은 각기 제멋대로 달리고 있을 뿐, 전혀 질서가 없었다. 이를 보자 거공이 말했다.
"사람들은 오랑캐 북적을 용맹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도 않구나."
이에 거공은 곧 북을 울리고 위군을 진격시켰다. 오랑캐들은 패한 체 달아나면서 위나라 군사를 자기편 군사가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신호가 오르자 사방에서 숨어 지키고 있던 적병(狄兵)들이 일시에 쏟아져나왔다. 위군에겐 일시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는 듯했다. 오랑캐 군사들은 위군을 셋으로 나누어 에워쌌다. 위나라 군사들은 서로 돌아볼 여가도 없었다. 더구나 원래부터 싸움엔 뜻이 없었던 그들이었다. 위군은 적세(狄勢)가 흉악하고 용맹한 걸 보자, 병차와 무기를 버리고 일제히 달아났다. 오랑캐 군사들은 위의공만 첩첩이 에워쌌다. 거공이 다급하여 아뢰었다.
"사태가 몹시 급합니다. 청컨대 큰 기를 버리고 주공께서는 병졸의 옷으로 바꿔 입고 수레를 버리고 도망치십시오. 그래야 저 오랑캐놈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위의공이 탄식했다.
"차라리 내 한목숨을 바쳐 백성들에게 지은 죄를 이 곳에서 사죄하겠노라."
이렇게 하여 위나라 병사들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해 보고 오랑캐 말발굽 아래 무너졌다. 오랑캐들은 철저히 위나라 군사들을 도륙했다. 어찌나 심 했던지 위의공이나 장수들의 시체는 마치 어육처럼 찢기고 뭉개졌다. 그리고 죽은 이가 열중에 아홉이었다. 단 두 사람 태사(太史) 화룡활과 예욕은 사로잡혀 끌려가게 되었다. 태사 화룡활은 오랑캐 풍속에도 귀신을 섬기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만 앞에 끌려나가자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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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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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퇴색치 않는 사랑 / 왕후의 밥, 걸인의 찬
그 내외는 가난했다. 보통이면 사내가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을 지키기 마련이건마는 그 내외는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로 아내가 직장으로, 교사이던 남편은 학교 일을 그만두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실직자였다. 어린것은 아직 없었다. 젊은 아내의 직장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단칸방에서 과히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어느 개인 회사에서 회계 사무를 맡아 보는 것, 그것이 그 젊은 아내의 직업이다. 어느 날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밥을 굶은 채 직장으로 나갔다가 점심 시간을 틈타서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나갈 때 남편의 한 말이 있다.
"어떻게라도 변통해서 점심을 지어 둘께 시장해도 그 때까지만 참으라우."
방 안에는 밥상이 나와 있고, 남편은 어디로인지 외출하고 없었다. 신문지로 덮은 밥상에는 남편이 지은 밥 한 그릇-반찬이라고는 간장 하나-그 밥상 위에 써 두고 간 쪽지가 얹혀 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걸로 시장기만 속여 두시오.'
쌀은 간신히 샀는데도, 남편이 마련한 돈으로는 반찬에까지 손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밥을 간장 하나로 먹으면서 젊은 아내는 미상불 왕후가 부럽지 않도록 가슴이 뿌듯했다. 촌철이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지마는, 표어도 격언도 아닌, 남편이 적어 두고 간 그 한 마디 말에 아내는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다. '가난'이란 결코 환영할 것이 못 된다. 안빈 낙도니 청빈이니 하는 빛좋은 문자들이 있기는 하나, 인간을 시궁창에 뒹굴게 하는 것도 가난이요, 가까운 일가 친척이며 친한 벗들 사이에 길을 막고 담을 쌓게 하는 것도 역시 가난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이 가난이 만금으로 못 살 보석을 경품으로 갖다 주기도 한다니 신기한 조화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어느 부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역시 남편은 실직-실직이라는 말은 가졌던 직업을 잃었다는 뜻이니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 남편에게는 본래 직업이 없었다. 남들은 그를 시인이라고 부르지만, 이 나라에서 싯줄이나 쓴다고 해서 그걸로 호구책을 삼는다거나, 가족을 먹여 살릴 의젓한 직업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사내는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아침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누라가 쟁반에는 삶은 고구마 몇 개를 얹어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이 좋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길래 우리도 몇 개 사 왔답니다. 하나 맛이나 보세요."
사내는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식전에 그런 것을 먹는 게 꺼림해서 잠시 주저하다가 마누라 대접으로 그 중 제일 작은 한 개를 집어서 입에다 넣었다. 그리고는 쟁반 위에 같이 놓인 홍차를 마셨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집으세요."
별로 달갑지는 않으나 이번에도 마누라의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두개 째를 손에 집었다. 밖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인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사내가 재촉하자 아내는 태연 자약,
"지금 잡숫잖았어요, 그게 오늘 우리 아침밥이랍니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떼었다.
"뭐요? 그게 아침이라?"
사내는 그제야 쌀이 없어진 것을 알고, 무안과 미안을 뒤섞어서 마누라에게 한 마디 쏘았다.
"쌀이 없어졌으면 없어졌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하는 거요, 사내 봉변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그 말에 대답이,
"제가 XX장관 조카랍니다.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을라구요. 하지만 허구한 인생에 이런 때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지요."
웃음을 지으면서 하는 아내의 그 한 마디 말에 내 친구는 대꾸를 잃고 묵연했다. 때마침 그의 처삼촌이 장관이었고, 그 장관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는 청도 몇 차례 없이 들어와서 성화를 겪던 터이다. 그 날로 쌀 한 가마를 주변해서 짐꾼에게 지위 들여가기는 했으나 내 친구는 그런 마누라를 가진 것이 무척 흐뭇했던지, 팔불출이는 자인한다면서 걸핏하면 이 이야기를 남의 앞에서 되씹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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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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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첫영성체의 하얀 기쁨
누가 나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은,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가 첫영성체를 하던 해의 크리스마스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게 되면 내게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 준 혜화동성당을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곤 합니다.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고, 아홉살 먹은 어린 소녀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던 12월의 그날, 유난히 날씨는 추웠지만 마음은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 성탄절을 잊지 못합니다. 한 장의 빛 바랜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어린 모습의 나와 옆의 동무들이 문득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늘 신비하게 보였던 하얀 고깔의 수녀님과 그분의 하얀 미소, 우리가 입었던 하얀 옷과 제대 위의 하얀 초, 신자들이 쓴 하얀 미사보, 성당에서 어린이들에게 끓여 준 하얀 떡국 등등 모든 것이 다 하얗게 눈부신 기억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었던 예수님의 몸(밀떡) 또한 거룩하고 순결한 흰 기쁨으로 나를 압도하였습니다. 첫영성체 때의 기도는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수녀님의 말씀에 난 구체적인 내용은 잊었으나 `앞으로 예수님을 닮은 가장 착하고 올곧은 삶을 살겠습니다`는 결심을 봉헌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수녀원에서 해마다 성탄을 지내면서 난 그토록 아름답고 순결했던 첫영성체 때의 첫 결심을 다시 기억하며 행복해지곤 합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면 눈이 오지 않았어도 눈나라에서 있는 것처럼 하얗게 황홀했던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훗날 주님이 불러 주신 사랑과 믿음과 희망의 하얀 길, 좁은 길로 들어서길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는 길이 힘겹게 느껴질 때도 그분이 함께 계심을 믿기에 마음 든든한 나는 지금껏 많은 성탄선물을 받았지만 첫영성체의 선물만큼 아름답고 큰 선물은 다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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