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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3호 2022.9.14 (음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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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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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란 우리가 이미 대답을 알면서도 대답을 몰랐으면 싶을 때 요청하는 것. ― E.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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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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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들
말은 입에 사는 도깨비다. 입을 열면 나타났다 닫으면 이내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상황에 따라 튀어나오는 말도 다르다. 하지만 문자는 말에 실체성과 형태를 덧입힌다. 옷을 입은 도깨비랄까. 문자와 표기의 체계는 말을 하나의 기계나 물건처럼 통일성을 갖는 실체로 만든다.
실체가 된 말은 규율이 되어 틀리면 불편해한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면 충분한데, 왜 ‘감사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하나? 이치에 안 맞는데도 국립국어원에서는 ‘관행’이란 이유로 허용했다”며 씁쓸해한다. 방송에서 들은 ‘말씀 주시면’이라는 말도 거슬린다고 한다. “‘꼼장어’가 표준어가 아니라고?” “‘쭈꾸미’랑 ‘오돌뼈’도 틀렸다고?” “뭐? ‘겁나게’가 사투리라고?” 항의한다.
단골 복사집에서 ‘제본 다 되었읍니다’라고 보내온 문자를 받으면 반갑다. 나는 사람마다 말에 대한 기억과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이런 어긋남과 겹침이 좋다. ‘돐’이란 말도 그립지 아니한가. 북한말 ‘닭알’은 달걀을 다시 보게 한다.
문득 의문이 든다. 무엇이 바른가. 바르게 쓴다는 건 뭘까. 과거와 현재가 단절보다는 겹치고 뒤섞이는 말글살이는 불가능할까. 왜 우리는 하루아침에 ‘돐’을 버리고 ‘돌’을 써야만 하는 구조에 살고 있을까. 나와 다르게 쓰거나 바뀌는 말에 왜 이토록 화를 낼까. ‘올바르게 말하기’에 지나친 강박증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녹슨 양철문에 써놓은 ‘어름 있슴’을 보면 즐겁던데. 올바른 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잡종이듯 말도 잡종이다.
정재환님께 답함
지난주엔 방송인이자 한글운동가인 정재환님께서 실명으로 “김지네씨, 잘 바써요”라는 재미난 댓글을 달았다. 헌신적인 한글운동가가 굳이 맞춤법을 어기며 쓴 것도 말걸기의 방식이다. 환영한다. 아마 ‘되었읍니다’, ‘돐’, ‘어름 있슴’에 대한 나의 과도한 포용주의와 과거지향적 정서, 또는 그간의 ‘언어자유주의적, 언어시장주의적’ 태도를 보고 내놓은 반응인 듯.
지난 칼럼은 말(표기법)의 잡종성을 가로막는 제도에 질문을 하자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썼던 철자가 하루아침에 바뀌고, 비표준어이니 쓰지 말라고 하다가 갑자기 오늘부터는 써도 된다는 과정 자체를 문제 삼자는 것이다.
이 문제의 뿌리는 한글맞춤법에 있다. 맞춤법은 언어적 근대의 산물이다. 민족어라는 단일한 언어질서를 만들기 위해 동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다른 모든 정체성과 차이를 배제했다. 언어적 근대는 지역, 세대, 성별, 계급, 직업의 차이에 따른 말의 잡종성을 외면해야 가능하다. 표준어는 비표준어를 배제한다. 표준어 제정 권한을 국가나 엘리트들에게 집중시킨다. 지금도 똑같다.
언어적 근대를 넘어서자. 우리 시대는 말의 잡종성을 어떻게 전면화할지가 과제다. 일단 성문화된 맞춤법을 없애고 공통어의 결정권을 시민과 사회적 역량에 맡기자는 것이다. 맞춤법을 고치면 되지 않냐는 주장은 비본질적이다. 국가가 ‘이걸 표준어로 해줄까 말까’를 정하는 방식은 시대착오적이다.
한글운동 하시는 분들께 부탁한다. 말의 단일화보다 말의 다양화를 위해 더 애써 달라. 말은 구름 같아서 우여곡절을 겪을 뿐, 살고 죽는 문제는 아니다. 릴랙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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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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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旅愁) - 김수영
시멘트로 만든 뜰에
겨울이 와있었다
아무소리 없이 떠난
여행에서
전보도 안 치고
돌아오기를 잘했지
이 뜰에서
나는 내가 없는 동안의
아내의 비밀을 탐지하고
또
내가 없는 그날의
그의 비밀을
탐지할 수도 있었다
그대로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나
지쳤는지 모른다)
여행이 나를
놀래일 수 없었던 것과같이
나는 집에 와서도
그동안의 不在에도
놀라서는 안된다
상식에 취한 놈
상식에 취한
상식
상……하면서
나는 무엇인가에
여전히 바쁘기만 하다
아직도
소록도의 하얀 바다에
두고
버리고
던지고 온 취기가
가시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196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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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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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사(一字師)
鄭谷은 唐나라때 시인이다.
어느날 '제기(齊己)'라는 스님이 여러 편의 詩稿를 가져 왔다. 그 중 <조매(早梅)>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前村深雪裏 昨夜數枝開……'(앞마을이 깊은 눈 속에 파묻혀 있는데, 어제 밤에 몇 가지에 매화가 피었네).
이를 본 鄭谷이 말했다. "數枝(몇 가지)는 早梅(일찍 핀 매화)라는 詩題에 맞지 않으니 一枝(한 가지)가 좋은 것 같소." 그렇게 바꾸어 놓고 보니 과연 詩 전체의 느낌이 달라졌다.
이에 스님은 鄭谷에게 큰 절로 감사를 表했고, 사람들은 鄭谷을 가리켜 '一字師'(한 글자를 가르쳐 준 선생님)라고 했다.
自古로 공부하는 사람은 한 글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훌륭한 스승은 간단해 보이지만 핵심을 짚어 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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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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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2.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라
스스로에게 꼴사나워지도록 허락하라 - 잭 캔필드
나는 볼링 치는 방법을 알면서도 볼링을 치러 가기가 두려웠다. 나는 풋볼, 야구, 배구, 럭비, 달리기 등에 능했으므로 모든 스포츠에 만능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러므로 볼링에 신축내기처럼 보이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 상상에 나는 그대로 도망갔고, 그 결과 수많은 즐거움과 발전의 기회를 놓쳤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내 자신에게 배우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5학년 때와 같이 다시 스키 초보자의 입장으로. 당시 나는 처음에 선밸리의 산꼭대기 스키 리프트에서 고꾸라진 반면, 나와 함께 탔던 네 살짜리 꼬마는 스키 선수처럼 온갖 폼은 다 잡으며 능수 능란하게 활강했다. 나는 오늘이 나의 첫 수업이고, 그 꼬마는 분명 일년 이상 스키를 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했다. 그래, 나는 꼴사나울 권리가 있다. 또한 나는 좋은 코치를 찾고 적절한 조언을 받을 권리가 있다. 여러해 동안 나는 스포츠에 몰두하면서도 결코 실력이 향상되지 못하는 이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코치를 찾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기꺼이 코치와 충고를 활용해야 한다. 나는 매번 스키를 타거나, 테니스 수업을 받을 때마다 전보다 향상했다. 나 자신이 스스로의 향상에 놀랄 정도이다. 특히, 내가 틈틈이 연습했을 때.
거절을 실패로 받아들이지 말라 - 베티 매제티 해치
내 모델.탤런트 학교의 초창기 학생 중 한 명은 나보다 5살에서 10살 정도 연상이었다. 과정을 이수할 즈음, 그녀는 첫 번째 면접을 했다. 그녀는 면접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에이전시를 그만 두겠다고 했다.
"왜 딱 한 번 면접을 보고 그만 둔다는 거예요?"
나는 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치장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도 일을 따지 못했어요. 나는 이런 거절을 참을 수 없어요. 당장 그만 두겠어요!"
나는 그녀가 최선을 다해 꾸미고도 그 일을 얻지 못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가령 그녀가 고객이 찾는 '얼굴'이 아닐 수 있다. 그녀의 나이가 맞지 않았거나, 그녀의 눈 색깔이 틀렸다거나, 그녀가 우연찮게도 고객이 싫어하는 사람과 닮았을 수 있다. 거절은 그녀의 외모나 연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얼마든지 다른 이유에서 나왔을 수 있다. 나는 프로 모델로 데뷰했던 첫 주일에 당했던 그녀와 똑같은 경험을 들려줬다. 첫 면접에서 나는 '너무 미국적이다'는 평을 들었고, 그 다음에는 '너무 이국적이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키가 너무 작다'고, 그 다음 곳에서는 '키가 너무 크다'고 퇴짜 맞았다. 매번 면접을 할 때마다 그 전과 반대되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제의 그 학생은 반복적인 거절을 견뎌 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결국 그녀의 원대로 에이전시를 그만 뒀다. 그때부터 우리는 학생들에게 미래의 거절을 성장의 한 단계로 여기도록 가르쳐 왔다. 그들에게 거절을 예상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 보도록 가르친다. 모델과 탤런트 지망생은 거절이 성장의 기회인 동시에 절대로 뜻을 꺾을 수 없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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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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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8장 북방 토벌
3. 남방에 이는 바람
관중, 병차를 북으로 돌리다
"초나라의 임금이 바뀌었습니다. 동생 웅운이 형 웅간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자원이 문부인의 환심을 사려고 병차 6백 승을 일으켜 정나라로 쳐들어 갔습니다."
"자원이 문 부인을 품으려다가 실패하고 죽었습니다. 투곡어도가 새 영윤이 되었습니다."
관중은 부중에 앉아서 초나라에 밀파한 세작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제나라의 경우처럼 이름 대신에 자(字)로 투곡어도를 자문(子女)이라 부르도록 초성왕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보고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관중은 별다른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관중의 안색이 크게 변하는 보고가 들어왔다.
"자문이 영윤이 된 후 첫 번째로 문무 백관에게 선포하기를 모든 대소 신하들은 녹(祿)으로 받은 토지의 절반을 국가에 환납(還納)토록 하라고 한 후 먼저 투씨 집안부터 모든 식읍의 절반을 바치는 등 모범을 보이고, 이어서 도읍을 단양(丹陽) 땅에서 영도로 옮겼습니다."
마침 곁에 있던 영척이 물었다.
"상군께서는 어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몸이 불편하시기라도 하십니까?"
관중이 우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지금 우리 제나라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대국은 초나라 뿐입니다. 요즘 초나라에서 어진 이를 영윤 벼슬에 세우고 그 동안 신하들에게 내렸던 땅의 절반씩을 환납하게 하더니, 도읍마저 단양에서 영도로 옮겼다 합니다. 남방이 신경이 쓰이면 북방을 정벌하는 데 큰 지장이 올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서 그럽니다."
영척이 물었다.
"초나라의 어진이라면 굴완(屈完)이 있습니다. 그가 영윤이 되었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들리는 바로 투곡어도라는 이름인데 자는 자문(子文)이라고 합니다. 매우 뛰어난 인물인 듯싶소이다."
한편 자문은 몇 가지 조치를 취하고 나서 곧바로 병사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동족인 투장(鬪章)에게 군사를 맡기고, 투반을 신공 (申公)으로 삼고, 굴완에게 상대부의 대우를 받도록 했다. 그러고는 초성왕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원래 태공망이 주왕의 은총을 받아 영구에 봉해졌을 때 제나라 땅은 염분이 많은 습지인데다가 백성들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태공이 부녀자의 일을 권장하여 제조 기술을 극도로 습득하게 하고 또 생선과 소금을 유통시켜 크게 번성하게 한 것입니다. 이후 13대를 거치는 동안 제나라는 동쪽 바닷가의 천승지국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관중이라는 뛰어난 인재를 정승으로 삼아 이제는 천하를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관중은 물가를 조절하는 구부를 설치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나라간의 교역을 장려하여 매우 번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 제나라의 국력은 이제 어느 나라도 따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제환공은 벌써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언제 병사를 일으켜 우리 초나라로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어진 이를 발굴하여 벼슬을 시키고 유능한 인재에게는 소신껏 할 수 있게 기회를 베푸십시오. 특히 제나라가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병사를 위해 세금을 탕감해 주고, 가벼운 죄를 지은 자에게는 활이나 화살을 대신 받아 벌을 사해 주도록 하십시오. 또한 금과 주석, 단사 등의 개발을 위해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병역의 부담을 면하게 해주십시오."
초성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한 시책들은 모두 영윤께서 관장하시고, 짐에게는 차후 보고해 주시도록 하오."
이렇게 하여 초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한편 제환공은 초나라가 날로 강성해지고 있다는 걸 소문으로 듣고, 혹 훗날에 중원 땅을 두고서 다투게 되지나 않을까 매우 걱정하였다. 그래서 제환공은 모든 제후들을 일으켜 초나라를 치기로 작정하고, 관중에게 상의했다. 관중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문에게 정사를 맡긴 후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초나라는 결코 위세와 외교적 명분으로 다스릴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초나라를 다스려야 진정한 천하 패권을 쥐게 됩니다. 주공께서 이제 방백의 지위와 함께 열국 제후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마땅히 위덕(威德)을 넓히시어, 시기를 기다리며 앞날을 위해 준비해 두셔야 합니다."
제환공은 아무래도 초나라가 마음에 걸렸다.
"중부께서는 언제쯤 초나라를 칠 계획이시오?"
관중이 아뢰었다.
"우리가 초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북쪽을 평정해야 합니다. 북쪽 오랑캐(山戎)를 쳐서 후환을 제거해야만 오로지 남방 초나라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제환공이 입맛만 다시다가 다시 물었다.
"9대째의 원수인 기(杞)나라를 우리 선군은 쳐서 그 땅을 거뒀소. 그런데 장은 기나라의 땅이었건만, 아직도 과인에 게 복종치 않으니, 그들을 쳐 없애면 어떻겠소?"
관중이 역시 머리를 흔들었다.
"장은 비록 소국(小國)이긴 하나 그 조상을 살펴보면 강태공(姜太公)의 후손입니다. 그러하니 주공과 같은 동성인데 동성을 친다는 건 의리가 아닙니다. 주공께서 정 그러하시다면 왕자 성부(成父)에게 명하시어 대군을 거느리고 기성(杞城)을 순시하되 장을 정벌할 것처럼 보이면 장은 반드시 겁이 나서 곧 주공께 항복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동성을 쳤다는 말도 듣지 않고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환공은 관중의 말대로 군대를 보내어 시위토록 하니 장의 임금은 겁이나 항복해 왔다.
"중부(仲父)의 계책은 하나도 실수가 없도다."
제환공은 관중을 칭찬했다. 한편 군신(君臣)이 자리를 같이해 국사를 논하는데 신하 하나가 들어와 아뢰었다.
"연(燕)나라가 산융(山戎)에게 침범을 당해 사자가 와서 주공께 구원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관중이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이제야 기다리던 때가 되었습니다. 연나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걸고 이번 기회에 산융을 무찔러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하시면 주공의 뜻하심이 이루어집니다."
마침내 제환공은 관중의 말대로 산융 토벌을 결심하고 병사를 집결시켰다. 과연 어떻게 북쪽 토벌에 나설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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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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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헌구편"
이헌구(1905~1982)
평론가. 함북 명천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과 졸업. 문학 박사. 민중 일보 사장, 공보처 차장, 이화 여대 문리대학장 역임. 일제 시대에 민족적 자유 정신과 세계적 양식을 추구하는 일련의 평론을 발표하다가 일제 말기에는 붓을 꺾었었다. 해방 후에는 반공 자유 문화를 일관성 있게 제창하였다. 정확한 비평 논조와 문장으로 지목된 평론가였으며 그 면모를 여기에 실린 수필들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 그 지극하신 사랑! 사랑의 참뜻을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깊이 가르쳐 주신 어머니...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 그 때 우리 입에서 나온 최초의 언어는 '엄마', 곧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어머니를 부르고 어머니를 외치며 우리는 인간임을 알았고,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시로 어디서나 어머니를 부르고 어머니를 외쳤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운 곳에서나 괴로운 곳에서나, 마음이 아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머니를 찾으며 이렇게 자라 왔다. 어머니는 온통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무너짐 없는 성이었다. 어느 누구든지, 어머니의 품속에서는 이 세상에 무서워할 것도 없는 똑같은 왕자요 공주였다. 거기서는 항상 다사로움과 밝음과 꿈과 노래마저 숨어서 빛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엄마, 어머니를 생각하매, 나의 머릿속에는 문득 세 가지의 어머니의 상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 하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니오베이다. 자기만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누리는 듯이 안하무인으로 오만했던 왕비 니오베가, 아폴로의 노염을 사서 열넷이나 되는 아들딸들을 다 잃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마침내는 '니오베의 샘'이 되었다는 그 이야기. 아무리 현실적인 영화나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할지라도, 그 아들 딸을 잃어버린 한 여인, 한 어머니로 돌아왔을 때의 그의 슬픔은 결코 끝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임을 깊이 깨달은 니오베의, 그 끊임없이 흘러내리던 희한과 비통의 눈물...
다음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달려 숨진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비탄에 잠긴 마리아의 모습, 한 소박한 여인으로서, 그 아들이 부활할 것과 그 아들이 인류 역사를 꿰뚫은 거룩한 존재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항상 가난하고 헐벗었으며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던 그리고 마침내 극형으로 숨진 그 아들의 주검을 본 마리아의 슬픔. 누구의 위로도 없던,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행했던 그 어머니.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로 새겨진 그 모자의 상, 숨져서 고요히 그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안긴 예수의 모습,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의 무언의 무한한 대화, 삶과 죽음을 초월한 곳에서 영원히 빛날 그 어머니의 사랑...
끝으로, 한 젊은 아들을 형장에 보낸, 우리 나라의 어느 가난한 어머니의 모습. 북악산에서 몰아치는, 거세고 매서운 찬바람을 무릅쓰고 매일같이 교도소를 찾은 그 가엾은 어머니. 어느 날, 그는 품속에서 우윳병을 꺼내 그 아들에게 주었다. 일찍이 그 아들을 안고 젖을 먹여 주었던 어머니. 그러나, 이제는 늙고 만 어머니가, 식을세라 차질세라 하고 품속에다 품어 온 우윳병, 체온과 더불어 그 뜨거운 사랑으로 더워졌을 우윳병을 꺼내 준 그 어머니의 손길, 그 큰 사랑이 마침내 그 아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수기로 쓰게 했고, 그리고 그 수기를 읽으며 목메던 필자...
모든 어머니가 다 불행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많은 어머니들이, 견딜 수 없는 가지가지의 현실적 불행과 고난과 경멸과 모욕을 달게 받으며, 그 아들과 딸을 위해 한 몸을 온전히 바쳐 왔다. 당신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도 그런 상황 속에 살고 계시고 혹은 살다가 가셨다. 아무 보상도 없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온몸에 심한 오한을 느꼈다. 내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주름이 잡히고 조금도 미인이 아니신, 얼굴에 약간 자국마저 가지신 내 어머니의 모습. 한평생 그리움과 삶의 고됨에 시달리다 가신 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들에게도 좀더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겠다. 우리의 어머니는 영원히 웃으시고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셔야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한없는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이 선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 머리 위에 얹으신 그 손길의 따사로움이 영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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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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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어느 소년의 미소
`...자주 만나지 않아도 마음속에 있는 사람, 우리는, 우리형제들은 - 이제는 태고적 같기만 한 어린 날로부터 그대와 한 형제 되어 한 줄기 강물을 타고 흐르는 여정이 되었다네. 눈감아도 보이는 그 강물은 언제나 그리움 그 자체, 잊을 리가 있겠는가, 그대를... `
지금은 이름난 화가로 활동중인 진의 언니의 엽서를 받고 나는 문득 옛 생각에 잠긴다. 나를 열 살 먹은 소녀로 돌아가게 하는 한 소년의 그리운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그의 삼형제의 이름 가운데에 `진`자가 들어가므로 나는 그들을 묶어서 `진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나는 늘 새침하고 조용한 아이, 책 속에 파묻혀 꿈을 꾸는 아이였다. 4학년 때 나는 5반 부반장이었고 소년 진은 3반 반장이었는데, 그애는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외모도 이국적이어서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반은 달랐어도 나 역시 호감을 갖고 있던 차에 한 번은 3반 담임선생님이 편찮으셔서 며칠 결근을 하셨는데 그 반의 반장과 임원들이 문병을 가고 싶어도 집을 몰라 못 간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마침 나는 그 여선생님과 한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의 여동생과도 친구여서 내가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을 방문하던 날, 우리는 그 댁에서 준비한 맛있는 과자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이후로 나는 장난기 가득하지만 따뜻하고 인상적인 소년 진의 미소를 기억하며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혜화동 성당에서 함께 첫영성체를 받은 친구임도 알게 되어 집에 와 사진을 보니, 하얀 너울을 쓰고 잔뜩 긴장해 있는 내 옆에 푸른 띠를 두르고 손을 모은 그 소년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5,6학년 때 그는 사생대회에서 입상을, 나는 백일장에서 입상을 해 나란히 상을 받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
서로 반이 달라 접촉할 기회가 없던 우리는 졸업 전에 꼭 한 번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짧은 순간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비원 돌담길을 끼고 나는 친구 집을 향해 걷고 있었고, 그는 반대편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새삼 반가우면서도 서로 아무 말 못하고 그냥 웃음만 교환했다. 참으로 따스하고 정감 어린 표정으로 미소짓던 진의 모습은 어린 내 가슴을 콩콩 뛰게 만들었고,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걷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후론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문득문득 그가 궁금하고 보고 싶기도 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빨강 머리 앤>의 남자 주인공인 길버트의 모습에서 자주 그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 하루는 우리집에 자주 놀러오던 오빠의 성당 선배인 B아저씨가 당신의 먼 친척뻘 되는 댁이라며 나를 데려가셨는데 그 집이 바로 진형제들의 집이었고, 나는 뜻밖의 반가움 속에 모든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소년은 더 멋져 보였고 수줍은 듯하면서도 내가 늘 좋아했던 그 미소로 정답게 대해 주었다. 나를 포함해 그와 그의 누나들, 그리고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정신적인 스승 역할을 했던 B아저씨의 영향으로 우리는 성직자, 수도자를 가장 아름다운 미래의 꿈과 이상으로 지니게 되었다. 진 역시 사제직을 지망하여 소신학교에 들어갔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일반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나는 생각보다 빨리 대학도 포기하고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와 나는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내가 수녀원에 오고 나서는 몇 번의 연락을 끝으로 자연 멀어지게 되었다. 가끔 그의 누나들로부터 그가 프랑스 유학중에 아리따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공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결혼을 했으며, 아이도 셋이나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그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그는 캐나다 퀘벡시의 유능한 도시환경 건축가가 되어 한국을 다녀갔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의 누나들은 내게 가끔 얘기하곤 했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흰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동생이 마당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줍고 있어서 살펴보니 강아지가 다 뜯어 놓아 읽을 수 없게 된 내 편지봉투 속의 시 조각들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낱말을 맞추고 있었는데, 그 정성스런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항상 나의 시를 제일 먼저 읽는 독자가 되어 주고, 어른이 되면 제일 먼저 나의 시집을 묶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싶다고 말하던 친구, 수도자로서 멋있게 살려면 판에 박힌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져선 안되며 생각의 폭을 더 넓혀야 한다고 충고하던 친구, 때로는 조개껍질과 도화지에 아름다운 그림도 그려 주고, 수녀원에 뜻을 둔 내가 나를 좋아하던 다른 소년 때문에 괴로워하며 다른 생각을 할라치면 정색을 하며 "그도 나도 널 좋아하지만 벨라뎃다(필자의 세례명) 소녀는 하느님 외의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너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우리는 마음이 아프더라도 슬픔을 견뎌야 하고, 너도 마찬가지야" 하고 짐짓 오빠라도 된 것처럼 단호히 말해 주던 좋은 친구를 나는 수녀원에 와서 더욱 고마워할 때가 많았다.
나의 첫시집을 보면 그가 제일 기뻐할 것 같기에 간단한 사연과 함께 우편으로 보낸 일이 있는데 돌아온 답은 뜻밖에도 `시집은 간데없고 웬 반공서적만 봉투 안에 몇 권 들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번번이 훼방꾼이 나타나는 것도 심상치 않아 난 그후로 아예 연락을 안하는 게 현명하겠다고 판단하고 열심히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못 만난 세월 동안 많이 변했을 그 친구를 종종 기도중에 기억하는 가운데 나는 어느새 중년의 나이로 수도서원 2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그해 나는 우연히 수녀원의 심부름 겸 초청강의도 할 겸 캐나다 토론토에 갔다가 본래는 예정에 없던 몬트리올에서 강의 관계로 이틀을 묵게 되었다. 그곳 본당 신부님께 혹시나 하고 그의 이름을 댔더니 대뜸 잘안다며 그 자리에서 즉시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주셨으나, 아직 퇴근 전이어서 우리는 저녁미사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친구는 전갈을 보내 우리의 다른 일정을 취소하게 하고 그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초대했다. 하도 오랜만이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그 옛날의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프랑스풍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집의 현관 앞에서 친구도 이젠 중후한 아저씨가 되어 환히 웃는 얼굴로 두팔을 벌리고 나를 맞아들였다.
"이게 분명 꿈은 아니겠지? 30년 만이야. 그렇지? 며칠 전엔 내가 코스모스꽃을 보다가 문득 네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이상하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 아닐까?"
그는 몇 번이나 말하며 내게 포도주를 따라 주었고 옛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우리의 모습을 내가 처음 보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도 바라보며 함께 기뻐했다. 멋과 낭만이 넘치는 소설가이기도 하신 K신부님은 식사중에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는 특별기도도 해주셨다. "너무 오랜만인데도 어색하지 않고 반말이 절로 나오네"하고 나도 친구에게 웃으며 이야기했다(`이런 자연스러움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참으로 순결하고 애틋한 우정을 나누었기 때문이겠지?`하고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시종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또 물었다.
"너, 수녀원에 간 것 후회 안하니?"
"아니."
"수녀로서 행복하니?"
"응."
"그럼 됐어."
다정한 작은오빠같이 말하던 그는, 내가 떠나던 날 이른 아침 몬트리올 공항에 나와 그의 팀이 구상해서 만들었다는 도시 건축 예술관련의 불어 서적 한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최근에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느낀 것, 그동안 체험한 자신의 인생, 신앙, 예술에 대해 짧은 시간이지만 담담하고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30년 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2년 전 가을, 캐나다에서 가져온 단풍잎 몇 개가 지금도 내 책갈피에서 고운 추억의 빛깔로 불타고 있다. 단풍잎 속에서 그 옛날의 소년 진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넨다.
"생각나니? 네가 수녀원에 가기 전에 내게 주었던 그 빨간 노트 말이야. 내가 제일 소중히 생각하는 그 노트는 아마 누나가 갖고 있을 거야."
"그래, 그런데 넌 그 귀한 노트를 네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에게 내 허락도 없이 보여 주었잖아. 그애가 너와 헤어지고 나서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나한테까지 찾아왔던 일 너는 모르지? 자기는 떠나지만 날더러 요한의 영원한 친구로 남아 달라는 부탁을 하러 일부러 수녀원까지 왔다고 해서 나는 누군지도 모르고 면회실에 나갔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곤란하고 마음이 아팠겠네?"
"아니야. 그래도 너에겐 고마운 일이 더 많아. 어린 시절에도 그토록 어른스럽고 절제 있게 행동한 네가 지금도 무척 기특하고 신기하게 생각될 때가 있어."
"고마워, 어쨌든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쓰고 건강해. 알았지?"
"응, 알았어. 나도 늘 너를 위해 기도할게. 그런데 있잖니. 비행기가 하늘로 뜨고 나서 이제 어쩌면 너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서 조금 울었어. 나 우습지?"
"아니..."
아직도 투명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캐나다의 빨간 단풍잎 속에서 친구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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