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양주동편" 양주동(1903~1977)
시인, 국어 국문 학자. 호는 무애. 경기도 개성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문학 박사. 일찍이 향가의 해독에 큰 공격을 세운 바 있으며, '국보'라는 별명과 함께 변설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지적이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수필이 많으며 문장은 건축감이 있어 선명한 인상을 준다.
몇 어찌
내가 중학교의 전 과정을 단1년 간에 수료하는 J중학 속성과에 입학한 것은 3.1운동 이듬해였다. 그 때까진 고향에서 한문학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문학이라면 노상 무불통지를 자처하는 나였으나, '처녀작','삼인칭' 같은 신식 말 때문에 크게 고심하던 중이어서, 나는 참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신학문을 배우러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개학 전날, 교과서를 사 가지고 하숙에 돌아와 큰 호기심을 가지고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처녀작', '삼인칭'에 못지않은 참 기괴한 또 한 단어를 발견했는데, 그게 곧 '기하'라는 것이었다. '기하'의 '기'는 '몇'이란 뜻이요, '하'는 '어찌'란 뜻의 글자임이야 어찌 모르랴만, 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기하'란 말의 뜻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기하'라? '몇 어찌'라는? 첫 기하 시간이었다. 나는 자리를 정돈하고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예를 받으시고, 막 강의를 시작하려 하실 때였다. 맨 앞줄에 앉았던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 대체 '기하'가 무슨 뜻입니까? '몇 어찌'라뇨?"하고 질문을 했다. 선생님께서는 이 기상천외의 질문을 받으시고, 처음에는 선생님을 놀리려는 공연한 시문으로 아셨던지 어디서 왔느냐, 정말 그 뜻을 모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곧, 나에게 아무 악의도 없음을 알아채시고, 그 말의 유래와 뜻을 가르쳐 주셨다. 가로되, 영어의 '지오메트리(측지술)'를, 중국 명나라 말기의 서광계가 중국어로 옮길 때, 이 말에서 '지오(땅)'를 따서 '지허'라 음역한 것인데, 이를 우리는 우리 한자음을 따라 '기하'라 하게 된 것이라고.
"알겠느냐?"
"예."
"너, 한문은 얼마나 배웠느냐?"
"사서삼경, 제자백가 무불통지입니다."
"그런데, '기하'의 뜻을 모른다?"
"한문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허허, 그런데, 너 내일부터는 세수 좀 하고 오너라."
"예."
사실 나는 '기하'란 말의 뜻과 그 미지의 내용을 생각하는데 너무 골똘했던 나머지, 세수하는 것도 잊고 등교했던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일사천리로 강의가 계속되어, '점, 선, 면'의 정의를 배우고 '각, 예각, 둔각, 대정각'을 배우고, '공리, 정리, 계'란 용어를 배웠다. 하숙에 돌아온 나는 또, '정리란 증명을 요하는 진리다.'와 같은, 참으로 기괴한 문장을 뇌까리면서, 다음 기하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음날의 기하 시간이었다. 공부할 문제는 '정리 1. 대정각은 서로 같다.'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또 손을 번쩍 들고, "두 곧은 막대기를 가위 모양으로 교차, 고정시켜 놓고 벌렸다 닫았다 하면, 아래위의 각이 서로 같을 것은 정한 이치인데, 무슨 다른 '증명'이 필요하겠습니까?"하고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허허 웃으시고는, 그건 비유지 증명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럼, 비유를 하지 않고 대정각이 같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 음, 봐라." 선생님께선 칠판에다 두 선분을 교차되게 긋고, 한 선분의 두 끝을 A와 B, 또 한 선분의 두 끝을 C와 D, 교차점을 O,그리고 ...AOC를 a, ...COB를 b, ...BOD를 c라 표시한 다음, 나에게 질문을 해 가면서 칠판에다 식을 써 나가셨다.
"a+b는 몇 도?"
"180도입니다."
"b+c도 180도이지?"
"예."
"그럼, a+b=b+c이지?"
"예."
"그러니까, a=c 아니냐."
"예. 그런데, 어찌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잘 봐라, 어떻게 됐나."
"아하!"
멋모르고 "예, 예." 하다 보니 어느덧 대정각(a 와 c)이 같아져 있지 않은가! 그 놀라움, 그 신기함, 그 감격, 나는 그 과학적, 실증적 학풍 앞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내 조국의 모습이 눈앞에 퍼뜩 스쳐감을 놓칠 수 없었다. 현대 문명에 지각하여, 영문도 모르고 무슨 무슨 조약에다 "예, 예." 하고 도장만 찍다가, 드디어 "자 봐라, 어떻게 됐나,"의 망국의 슬픔을 당한 내 조국! 오냐, 신학문을 배우리라. 나라를 찾으리라. 나는 그 날 밤을 하얗게 새웠다. 나는 지금도 첫 강의 시간에는 대개, 위에 적은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 주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기하를 처음 배울 때, 그 말의 뜻을 묻는 학생이 과연 몇이나 되느냐 하고 농담삼아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의심'과 새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잃지 않았기에, 알량하나마 학적 저서 약간 권을 이룩했노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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