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38호 》 2022.8.23 (음 7.25) 》 발송인:
nownforever.co.kr
|
|
|
|
글나눔 → 오늘의 어록
|
|
|
아픔 없이 자기 자신을 다시 만들 수는 없는 법. 제 자신이 곧 대리석이자 그걸 쪼는 조각가가 돼야 하기 때문. ― A.C.
|
|
글나눔 → 말글
|
|
|
뒤죽박죽
여럿이 마구 섞여 엉망이 된 상태. 요 며칠 사이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 ‘엉망진창, 뒤범벅, 난장판’이란 말이 함께 떠돈다. 장마는 눈앞의 살림살이와 논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하늘뜻을 잃은 사람들의 패악질은 사람들의 정신줄을 헝클어뜨렸다. 허탈과 분노.
말에는 이런 뒤죽박죽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기도 한다. ‘쏟아지는 빗물과 튀어 오른 흙탕물로 온 동네가 엉진망창이 되어 있었다.’ 잘 읽었는가?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단어를 이루는 글자들을 하나하나씩 읽지 않고 한 덩어리로 읽는다. 철자가 비슷하기만 하면 아는 단어로 보고 다음 말로 넘어간다. 뒤에 흠집이 조금 있어도 눈치를 못 챈다. 글줄깨나 읽은 사람들이 더 그런다. 아는 단어일수록 더 잘 속는다. 판에 박힌 생각이 변화를 못 알아차리는 법.
외국여행 후기에 곧이곧대로 비판글을 올리기 뭣할 때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한다. ‘카이펫랑 화실장에 바벌퀴레 엄나청게 나니옵다’라는 식이다. 첫 글자와 끝 글자는 놔두고 그 사이에 있는 글자를 뒤섞었는데 얼추 읽어낼 수 있다. 말소리를 음절 단위로 모아써서 가능한 놀이이다. 번역기를 돌려도 알 수 없던 외국인 집주인은 예약이 끊긴다거나 하는 뒤통수를 맞는다.
우리는 세상을 현미경처럼 보지 않고 어림짐작과 넘겨짚기로 바라본다. 전체 흐름과 맥락 속에 개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거나 추론한다. 거리두기로 우리가 맺어왔던 관계를 재음미하고 타인을 향한 연민과 그리움이야말로 사람다움의 길이란 걸 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칙자들이 쑥 들어왔다. 하나 이들도 ‘뒤박죽죽’ 우리 이웃.
말썽꾼, 턱스크
말에도 말썽꾼이 있다. 보통 새말은 이미 있는 말을 재활용한다. ‘유리’와 ‘창’이 만나 ‘유리창’이 되고 ‘팥’과 ‘빙수’를 더해 ‘팥빙수’를 만든다. 콩 심은 데 콩 나듯 자연스럽다.
그런데 말의 말썽꾼은 낱말의 목을 댕강 잘라 다른 말의 허리춤에다 이어 붙여 버린다. 이를 혼성어라 하는데, ‘라볶이’(라면+떡볶이), ‘호캉스’(호텔+바캉스), ‘강통령’(강아지+대통령), ‘브로맨스’(브라더+로맨스) 같은 말이다. 댓글이 엉망이면 ‘댓망진창’이고 김씨가 엉망이면 ‘김망진창’이다. ‘턱스크’(턱+마스크), ‘등드름’(등+여드름), ‘언택트’(언+콘택트)는 앞말이 1음절이지만 뒷말의 허리를 잘라 붙였으니 같은 부류다. ‘짜파구리’는 혼성의 중첩. ‘짜파게티’가 이미 ‘짜장면+스파게티’의 혼성인데, 여기에 다시 ‘너구리’를 잘라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되었다.
약간의 규칙성도 있다. 앞말은 앞부분을, 뒷말은 뒷부분을 남겨서 붙인다. 한쪽은 머리채를 잡혔고 다른 쪽은 꼬리를 잡혔으니 몸뚱이를 숨겼어도 다 잡힌 거와 진배없다. 새말을 만드는 좋은 전략인지 한 해 동안 생긴 신어 가운데 25%가 혼성어라 한다.
문제는 혼성이 원래의 단어가 갖고 있던 존재 근거를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망측하게도 한 단어인 ‘너구리’를 잘라 ‘너’는 동댕이치고 ‘구리’만 갖다 쓰다니! 말의 입장에선 순교. 어원이나 질서를 따지는 분에게는 속 쓰린 일이겠지만, 새말을 만드는 사람들은 오직 말맛이 살고 입에 착 달라붙는지가 기준이다. 이런 말썽꾼들 덕분에 사는 게 아주 심심하지는 않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
|
시나눔 → 우나라詩
|
|
|
쌀난리 - 김수영
넓적다리 뒷살에
넓적다리 뒷살에
알이 배라지
손에서는
손에서는
불이 나라지
수챗가에 얼어빠진
수세미모양
그대신 머리는
온통 비어
움직이지 않는다지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大邱에서
大邱에서
쌀난리가
났지 않아
이만하면 아직도
革命은
살아있는 셈이지
百姓들이
머리가 있어 산다든가
그처럼 나도
머리가 다 비어도
인제는 산단다
오히려 더 착실하게
온 몸으로 살지
발톱 끝부터로의
下剋上이란다
넓적다리 뒷살에
넓적다리 뒷살에
알이 배라지
손에서는
손에서는
불이 나라지
온 몸에
온 몸에
힘이 없듯이
머리는
내일 아침 새벽까지도
아주 내처
비어있으라지……
<1961. 1. 28>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표사유피(豹死留皮)
-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 사람은 사후(死後)에 이름을 남겨야 함의 비유.
《出典》'新五代史' 死節篇
왕언장(王彦章)은 한갓 병졸에서 시작하여 후량(後梁) 태조(太祖) 주전충(朱全忠)의 장군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용기와 힘으로 쇠창을 옆에 끼고 촉한(蜀漢)의 조자룡처럼 적진을 누벼 군사들은 그를 왕철창(王鐵槍)이라 불렀다. 그는 후량(後梁)이 멸망할 때 겨우 500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도를 지키다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다. 후당(後唐)의 장종(藏宗) 이존욱은 그의 무용을 아껴 부하가 되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언장은, "신은 폐하와 10여 년이나 싸워 이제 패군지장(敗軍之將)이 되었습니다. 죽음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또 아침에 양(梁)나라, 저녁에 진(晉:後唐)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해 무식했으나, "표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언제나 말하고 지키겠다."고 하였다.
彦章武人不知書 常爲俚語謂人曰 豹死留皮 人死留名.
【동의어】호사유피(虎死留皮)
|
|
글나눔 → 추천글
|
|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딱 한 번의 실천이 가져온 행복 - 클로디트 헌터
나는 자신감 세미나 중에 '청하고, 청하고, 또 청하는 연습'에 참가했다. 그 세미나 일주일 전에 내 딸아이 쟌나는 독일 교환 학생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매년 들어가는 비용이 4천 달러나 됐다. 나는 홀몸으로 세 자식을 키우는 입장으로, 수중에 4천 달러는커녕 그 돈을 융통할 길조차 막막했다. 나는 근근히 벌어먹고 사는 형편이었다. 저금도, 신용카드도, 돈을 빌려줄 친척도 없었다. 나는 400만 달러를 구해야 하는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래서 그 연습을 하는 중에 내가 아는 모든 이에게 요청하고 싶었던 것은 4천 달러였다. 하지만 다른 참가자에게 그런 요청을 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특히 그 세미나는 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들에게 돈 문제에 대해 입을 떼기가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그 연습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는 다른 이들에게 돈을 요청한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품은 사랑과 관심을 잃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세미나에서 배웠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나는 전단을 만들었다. 거기에 쟌나의 사진과 함께 그녀가 독일로 가는 이유를 적고, 맨 아랫부분에 6월 1일까지 우리에게 수표를 보낼 주소를 쿠폰으로 만들어 떼어 가도록 했다. 나는 5달러, 20달러, 50달러, 100달러를 요청했다. 심지어 원하는 액수를 마음껏 적을 수 있는 공란까지 남겨뒀다. 나는 전단을 집집마다, 친구에게, 아는 이들에게, 지방 신문사 세곳에, 전 직장과 50군데의 자선협회에 보냈다. 나에겐 이제 두 달 남짓 남은 시간은 그렇게 많은 돈을 모금하기에는 너무 촉박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세미나에서 당신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고 그대로 실천하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의 모든 일을 창조하고 발전시키고 허락하므로 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의식적으로 되뇌었다. 나는 긍정적인 표어를 썼다. "나는 6월 1일 쟌나의 독일 연수비로 4천 달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을 내 화장실 거울에 붙여 놓고, 복사본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매일 틈만 나면 들여다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진짜 4천 달러 수표를 써서 자동차 계기판위에 올려놓았다. 매일 운전으로 여러 시간을 허비하는 나에게 그 수표는 목표를 상기시켰다. 또, 백 달러 짜리 수표의 확대 사진을 쟌나의 침대 위 천장에 붙여 놓았다. 당연히 쟌나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그리고 밤에 제일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그 수표 사진이 되었다. 내가 쟌나에게 이 계획을 설명했을 때, 딸아이는 돈을 요청하는 일이나 긍정적인 표어를 쓰는 일에 내켜하지 않았지만 일단 시도해 보기로 동의했다. 우리가 처음 받은 선물은 5달러였다. 가장 많은 액수는 800달러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20달러나 50달러였다. 일부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나머지는 낯모르는 타인에게 받았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목적 아래에 똘똘 뭉친 것이다. 6월 1일 총 모금액은 3,750달러에 이르렀다! 우리는 흥분하고 전율에 떨었다. 이런 경이로운 사태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머지 250달러를 어디에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6월 5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마침내 6월 3일 전화 벨이 울렸다. 우리 동네의 자선협회에서 일하는 한 여성의 전화였다.
"내가 시한을 넘겼다는 것은 알아요. 너무 늦었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에요!"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사실, 우리는 쟌나를 정말 돕고 싶지만 고작 250달러가 전부에요."
우리는 총 33명의 개인과 두 군데의 자선 협회로부터 우리가 필요로 했던 금액을 받았다. 그것도 시한 내에! 이 사건은 나에게 '청하는 연습'의 놀라운 사례가 되었다. 나는 쟌나가 이 일생일대의 경험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녀의 삶을 유익하게 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
|
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
|
|
관자요록
5. 중원의 한복판에도 순풍이 불고(1/3)
제군, 돌을 돕다
"상군께서는 어찌 기쁜 표정이 아니십니까?"
영척의 물음에 관중이 영척을 맞이하며 말했다.
"그대도 아시겠지만, 주나라 왕실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중원 땅 여러 제후 가운데 정(鄭)나라가 단연 강국이었소이다. 그들은 동괵을 합병하여 그 곳에다 도읍을 정했는데 앞은 산이고 뒤는 하수(河水)며 좌우로 낙천(洛川), 제천(濟川)을 끼고 있어 험하고 튼튼하기로 세상에 유명합니다. 그러므로 지난날에 정장공은 이를 믿고 이웃한 여러 나라를 치는가 하면 왕군과 싸워 천자에게 화살을 쏘는 짓도 서슴지 않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나라가 이제 초(楚)를 섬겨 그 일당 노릇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초나라는 자칭 왕이라고 하느니만큼 땅도 크고 군사는 강하고 한동 땅의 모든 나라들을 복속시켜 이제 주왕실과 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천하 패권을 잡으려면 초나라부터 쳐야 할 텐데 초를 치려면 앞서 정나라부터 우리 쪽으로 돌려놓아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이번 송나라 원정길에 정나라 근처까지 오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여 내 이렇듯 고심중이오."
영척이 웃으며 대답했다.
"상군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정나라는 제가 잘 압니다. 원래 세자 홀(忽)을 정소공으로 세웠다가 송나라 협박에 넘어가 공자 돌(突)을 세우고, 임금이 된 지 2년 만에 그를 쫓아낸 것은 제족의 농간이었습니다. 제족은 다시 공자 홀을 세웠습니다만 이번에는 고거미가 홀을 죽이고 공자 미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군께서 공자 미와 고거미를 죽이자, 제족은 공자 의(儀)를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이렇듯 제족이란 자는 신하로서 임금을 추방하고 세우는 일을 밥먹듯 하는 죄 많은 여우 같은 놈입니다. 의도 동생으로서 형님의 자리를 빼앗은 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분수를 범하고 윤리를 거슬렀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죄를 밝히고 치십시오. 한편 공자 돌은 지금도 역 땅에 있으면서 언제라도 정나라 군위에 다시 오르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제족, 그 간사한 자가 평소에 인재를 기르지 않고 벼슬 자리만 탐하다가 최근에 죽었으니 정나라에는 묘책을 세울 인재가 없는 형편입니다. 이럴 때 우리 제나라가 한 장수를 보내어 공자 돌을 앞세우고 정성(鄭城)으로 쳐들어간다면 쉽게 공자 돌을 군위에 올려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 제나라의 은덕을 잊지 않고 초나라와 관계를 끊고 주왕실을 섬기며 중원의 여러 나라들처럼 우리와 맹약을 맺지 않겠습니까?"
"그 생각 정말 좋소이다."
관중이 무릎을 치면서 덧붙였다.
"이번에야말로 정나라는 꼼짝 못할 것이오."
관중은 서둘러 영척과 함께 궁으로 가서 제환공에게 이러 저러한 계책이 있음을 아뢰었다. 제환공은 정나라를 동맹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계책을 모두 듣자 귀가 번쩍 트였다.
"과인도 정나라가 중원 땅의 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항시 이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계책이 없었소."
제환공은 곧 일군을 모으게 지시하고는 물었다.
"그럼 누구를 대장으로 삼으면 좋겠소?"
관중이 대답했다.
"빈수무가 적합합니다. 그는 계책에 능하고, 공자 돌(突) 같이 꾀 많은 자를 능히 다룰 줄 압니다."
이리하여 빈수무는 병차 2백 승을 거느리고 정나라 땅을 향해 진발했다. 빈수무는 역 땅 20여 리를 남긴 곳에서 군사를 멈추고, 사람을 보내어 공자 돌에게 제환공의 뜻을 전했다. 이 때 정여공 돌은 먼저 제족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자 지체없이 심복 부하를 비밀리 세작으로 정성에 보내어 국내 소식을 염탐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열국의 맹주인 제환공이 군사를 보내어 자신의 입국을 돕겠다고 하니 바야흐로 귀국하여 군위에 오를 때가 왔다고 크게 기뻐했다. 그는 곧 제나라 군사들이 있는 곳까지 가서 크게 잔치를 베풀고 빈수무와 함께 속마음을 탁 터놓고 서로의 계책을 의논했다. 이 때 정성에 세작으로 밀파됐던 사람이 돌아왔다.
"제족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후임으로는 숙첨이 상대부가 되었습니다."
빈수무가 물었다.
"숙첨이란 어떤 인물입니까?"
정여공 돌이 대답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릴 만한 인재이지만 장수가 될 만한 기백은 없는 사람이오."
그 때 염탐하러 갔던 사람이 직접 경험한 괴상한 일을 한 가지 보고했다.
"이번 정나라 성내에서 기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문 안에서 길이가 팔 척이나 되고 머리는 푸르고 꼬리는 황색인 큰 뱀이 나타났습니다. 또성문 밖에도 큰 뱀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길이는 장여(丈餘)나 되고 붉은 머리에 꼬리는 녹색이었습니다. 두 마리 뱀이 서문 앞에서 3일 동안 밤낮으로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걸 구경하는 백성들도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17일 만에 드디어 성 바깥편 뱀이 성 안쪽 뱀을 물어 죽이고 그 길로 성내로 들어가 태묘(太廟)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 뱀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제나라 장수 빈수무가 정여공 돌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찬탄해 마지않으며 높이 치하했다.
"장차 다시 정나라 군위에 오르실 좋은 징조입니다."
정여공 돌이 물었다.
"어찌 그러하오?"
빈수무가 대답했다.
"성 바깥에서 나타난 뱀은 바로 군후(君侯)를 뜻하니 길이가 장여나 된다는 것은 바로 형님뻘입니다. 성 안에서 나온 뱀은 바로 의(儀)니 길이가 팔 척밖에 안 되는 것은 동생뻘이기 때문입니다. 싸운 지 17일 만에 성 밖 뱀이 성 안의 뱀을 이기고 정성(鄭城) 안으로 들어간 것은 무엇인가 하면, 군후가 본국을 떠나 망명한 지 바로 17년을 뜻합니다. 성 안의 뱀이 죽은 것은 의가 군위를 잃을 징조이며, 성 바깥 뱀이 태묘로 들어간 것은 군후가 종사(宗祀)를 받들 징조입니다. 우리 주공께서 대의를 천하에 펴사 군후를 정나라 정위(正位)에 세우고자 하시니 이것은 모두 다 하늘의 정해진 뜻인가 하옵니다."
정여공 돌이 대답했다.
"장군 말대로 된다면 이 은덕을 결코 잊지 않겠소."
|
|
글나눔 → 읽어둘문학
|
|
|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진섭편" : 김진섭(1930~?)
수필가, 독문 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 서울대 교수. 6.25사변 때 납북됨. 저서로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한국 수필 문학의 개척자. 생활의 예지와 감흥을 가지 넘치는 생활 철학의 발견으로까지 발전시켰다.
매화찬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야 마는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 왜냐 하면, 첫째로 그것은 추위를 타지 않고 구태여 한풍을 택해서 피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은 그럼으로써 초지상적인, 비현세적인 인상을 내 마음속에 던져 주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혹은 눈 가운데 완전히 동화된 매화를 보고, 혹은 찬달 아래 처연히 조응된 매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매화가 사군자의 필두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지만, 적설과 하늘을 대비적 배경으로 삼은 다음에라야만 고요히 피는 이 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한 동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굴복감을 우리는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화는 확실히 춘풍의 태탕한 계절에 난만히 피는 농염한 백화와는 달라, 현세적인, 향락적인 꽃이 아님은 물론이요, 이 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고하고 견개한 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서 찬 돌같이 딱딱한 엄동, 모든 풀, 온갖 나무가 모조리 눈을 굳이 감고 추위에 몸을 떨고 있을 즈음, 어떠한 자도 꽃을 찾을 리 없고 생동을 요구할 바 없을 이 때에, 이 살을 저미는 듯한 한기를 한기로 여기지 않고 쉽사리 피는 매화, 이는 실로 한때를 앞서서 모든 신산을 신산으로 여기지 않는 선구자의 영혼에서 피어오르는 꽃이랄까? 그 꽃이 청초하고 가향이 넘칠 뿐 아니라, 기품과 아취가 비할 곳 없는 것도 선구자적 성격과 상통하거니와 그 인내와 그 패기와 그 신산에서 결과된 매실은 선구자로서의 고충을 흠뻑 상징함이겠고, 말할 수 없이 신산한 맛을 극하고 있는 것마저 선구자다워 재미있다.
매화가 조춘 만화의 괴로서 엄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화하는 것은, 그 수성 자체가 비할 수 없이 강인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동양 고유의 수종이 그 가지를 풍부하게 뻗치고 번무하는 상태를 보더라도, 이 나무가 다른 과수에 비해서 얼마나 왕성한 식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그러므로 또한 매실이 그 독특한 산미와 특종의 성분을 가지고 고래로 귀중한 의약의 자료가 되어 효험이 현저한 것도 마땅한 일이라 할밖에 없다.
여하간에 나는 매화만큼 동양적인 인상을 주는 꽃을 달리 알지 못한다. 특히 영춘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분매에는 담담한 가운데 창연한 고전미가 보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청고해서 좋다.
|
|
글나눔 → 삶속의글
|
|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흰구름 단상
15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억지로는 짜낼 수 없는 시. 그러나 안 써지는 것 역시 즐거워하기로 한다. 시가 어려워도 시를 포기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 세상은 더욱 아름다우리. 보석처럼 열심히 갈고 닦은 빛나는 시인들을 나는 죽을 때까지 질투하며 부러워하리라.
16
르완다의 뼈만 남은 어린이들의 그 퀭한 눈들이 자꾸 나를 쳐다본다. 북한의 배고픈 겨레에게 우리 정부는 너무 무심하고 냉랭하다. 오늘도 태연히 밥을 먹는 게 부끄럽다. 눈물을 글썽인다고, 기도한다고 그들에게 힘이 될까? 우리 나름대로 절식을 해서 그 몫을 떼어 돕는다지만 어쩐지 답답하다. 이웃의 아픔과 불행에 그냥 속수무책인 것만 같은 나의 위치가 가끔 괴로울 때가 있다. 수도자의 가난이란,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돕고 싶은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개인의 뜻과 이름으로 베풀고 싶은 원의조차 포기하는 가난함에 있다. 온전한 순명, 철저한 고독에 나 자신을 내맡기는 신앙과 용기가 내겐 아직도 무척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17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항암치료를 받는 C수녀님 방에 그분이 좋아하는 풀꽃 한 묶음 들고 갔더니 매우 기뻐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기뻤다. 아름다운 꽃은 중환자들에게도 아름다운 위로가 됨을 다시 보았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귀찮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속단하는 것은 잘못인 것 같다. "거듭 생각해도 고마운 것이 너무 많고, 고마운 이들이 너무 많아요. 전에 큰 수술을 받았을 때는 이만하면 됐으니 데려가 달라는 기도가 나오던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조금만 더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욕심을 부리게 돼요. 그분이 다 알아서 잘해 주시리라 믿고 싶어요." 하는 수녀님의 야윈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할말을 잃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