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32호 》 2022.8.17 (음 7.20) 》 발송인:
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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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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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대화의 안전지대. ―A.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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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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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척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하는 소리나 기색. ‘기척’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사람 소리임을 강조하려고 ‘사람인’자를 덧붙였다. ‘인적’이란 말에 ‘기운’의 뜻을 붙인 ‘인적기’(人跡氣)란 말이 있지만 쓰는 사람이 드물다. ‘인적’이 발자국이든 온기든 과거의 흔적을 더듬는 것이라면 ‘인기척’은 현재의 어렴풋한 기운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일이다. ‘분위기 파악’과 비슷하게 낌새를 알아차리는 건 연습이 필요하다. 같은 상황에서도 모두가 인기척을 느끼는 건 아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코앞에 나타나도 고개를 쳐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일수록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잦다.
발소리를 내면 ‘발기척’, 숨소리를 내면 ‘숨기척’, 문을 두드리거나 문밖에서 이름을 부르면 ‘문기척’을 낸다고 한다. 북녘에서 ‘노크’는 ‘손기척’이다. 남도에서는 문기척이 날 때 문밖으로 얼굴을 내비치는 걸 ‘비깜하다, 비끔하다’라 한다.
‘나, 여기 있소!’ 누구든 살아 있다는 건 말 그대로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있음’ 자체를 알리는 신호가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은 괴물과 천사가 한 몸뚱이에 엉켜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반가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과 단절되고 고립된 사람에게 인기척은 숙인 고개를 들게 하고 처진 다리에 힘을 넣어준다(정반대일 때도 있지만). 그럴 때 인기척은 신호의 차원을 넘어, 진정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일이자 새로운 관계맺음을 향한 은유이다. 40년 전 새벽, 서슬 퍼런 어둠 속에서 인기척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을 거듭 기억한다. 나는 누구에게 인기척인가.
허하다
'허’를 길게 늘여 읽을수록 그나마 쓸쓸함 한 자락을 담는다. 둘도 없이 사랑하던, 자기다웠던, 가장 충실하고 행복했던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 모든 감정이 떠나가 버린 다음에 오는 감정의 감정. 의미 있던 게 한순간 의미 없어지면서 밀려오는 감정. 마음뿐 아니라 존재 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 땅이 꺼져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 애초에 그릇이 없었더라면 채울 것도 없고 ‘부재’의 흉터도 남지 않았을 텐데, 미련은 끝이 없다.
그러니 보기 좋은 대상에 눈이 팔려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는 무관심한 ‘실하다’는 반대말이 될 수 없다. ‘허하다’는 자신의 마음 상태만 지목한다. ‘허한’ 마음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죽음이든 결별이든 부질없음이든 허함은 쌓이고 쌓인다. 그 퇴적물이 사람을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사람으로 만들지, 냉소적인 사람으로 만들지는 모른다.
이용수님, 윤미향님 두 사람 모두 허할 것이다. 같은 길을 걸어왔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알 때 느낄 막막함을 상상하기 어렵다. 진정한 철학이 기존 철학을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하듯, 모든 운동은 기존 운동을 비판하는 데에서 발전할 수 있다. 결점은 우리를 이루는 일부이다. 우리는 확신에 찬 사람들끼리 모인 돌무더기가 아니다. 인간의 삶이란 분명하지도 확고하게 정해져 있지도 않다. 다양한 목소리와 작은 다짐을 이어 붙인 조각보. 허하다고 실한 곳으로 튀는 게 아니라 그 허한 곳 한가운데, 텅 빈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 허한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낸다. 그래도 허하긴 허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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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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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소리 - 김수영
조그마한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힘은 손톱 끝의
때나 다름 없고
時間은 나의 뒤의
그림자이니까
거리에서는 고개
숙이고 걸음걷고
집에 가면 말도
나즈막한 소리로 걸어
그래도 정 허튼소리가
필요하거든
나는 대한민국에서는
제일이지만
以北에 가면야
꼬래비지요
<196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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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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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일우(千載一遇)
-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 《出典》'文選' 袁宏 三國名臣序贊
동진(東晉)의 학자로서 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역임한 원굉(袁宏)은 여러 문집에 시문(詩文) 300여 편을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文選》에 수록된 '三國名臣序贊'이다. 이것은《三國志》에 실려 있는 건국 명신 20명에 대한 행장기(行狀記)인데, 그 중 위(魏)나라의 순문약(荀文若)을 찬양한 글에서 원굉은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면, 곧 천년에 한 천리마도 없다.
夫未遇伯樂 則千載無一驥.
말[馬]에 대하여 안목이 높은 말[馬]의 명인 백락을 만나지 못한다면, 천년이 지나도 한 마리의 천리마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어진 신하가 명군(名君)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통한다.
대저 만 년의 한 번 기회는 이 세상의 통하는 길이며 천 년에 한 번 좋은 기회를 만나는 것은 현인(賢人)과 지혜 있는 사람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이와같은 기회를 누구나 기뻐하지 않고는 못 견디니, 기회를 잃으면 누구나 어찌 능히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夫萬歲一期 有生之通塗 千載一遇 賢智之嘉會 遇之不能無欣 喪之何能無慨.
【동의어】천재일시(千載一時), 천재일회(千載一會), 천세일시(千歲一時)
【유사어】맹귀부(우)목(盲龜浮(遇)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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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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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5장
공자의 비유:에식에 쓰이는 신성스러운 그릇
<부모를 잘 먹이기만 하는 일은> <개나 말들까지도 다 할 줄 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부모를 그저 살아 있게끔 먹이는 일보다 훨씬더 선한 어떤 것이다. 적절하게 배치된 곳에서, 적절한 경의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적절한 방식으로 음식을 건네 주고 받으며 먹는 일은, (동물도 다하는) 단순한 음식물 섭취 행위를 인간만의 고유한 만찬 의식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회초리가 (무서워 그것에) 복종한다면 그런 사람은 가축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러나 올바르게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하고,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바로 인간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일을 (말하자면 결코 폭력이 무서워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과 본성이 우러나와서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하게 될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기 공동체의 참된 성원이 되는 것이다.
(예식에 등장되는) 사물들의 존엄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간 개개인이 단순히 생물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예식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자기의 생물적 존재, 즉 정신적 의미가 아닌 생물적 의미의 <생명>을 만약 <예식>이 그것을 요구할 경우 희생하는 사람을 우리가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희생의식(고삭)의 기본 요소인 양을 죽이는 일에 대한 그의 제자들의 의구심에 다음과 같이 대답함으로써, 공자는 간단 명료하게 이 점을 밝혔다. <너는 양을 아까워 하느냐? 나는 예를 사랑한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공자는 말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공동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변신하게 된다. 그렇게 변신하게 될 때까지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며 다만 인간으로 계발될-마치 갓 태어난 유아나 원시림의 늑대 소년 또는 <야만인>처럼-잠재성만 있는 것이다. 예식이 어떻게 야만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사람으로 변환시키는가를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예식은 정당화된다. 그리고 무엇이 인간의 가장 좋은 상태인지를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 맛있는 음식이나 즐기는 단순한 동물적 생존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예식을 누리는 삶이 인강의 최선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최상의 삶(즉 예에 근거하는 삶)이 정당회되는 것이다. 어떤 입장에서 보든지간에, 우리는 인간의 뚜렷한 본성과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비젼을 환히 밝혀 주고 심화시켜주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얻게 된다. 우리가 인간을 (원자들처럼 고립된) 개별적인 자아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쥐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 예식의 참여자로 보게 될 때, 제사 예식에 쓰이는 그릇처럼, 그 사람은 우리들 눈에 새롭고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논어>에서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신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결코 <사회>에 부역만 하는 단순한 도구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예식이 결코 참여자나 신성한 그릇, 제단, 주문들과 무관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일 수 없듯이 인간 사회 도한 하나의 자체 독립적인 단위일 수 없다. 사회란 서로를 사람답게 대접하는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란 서로의 인간 관계 유지에 요청되는 사랑과 진실과 경의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예에 규정된 의무들이나 특권들에 따라서 서로를 인간답게 대접하는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다양한 인간 관계의 형태들은 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인간들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배워서 익힌 뒤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예식들에 근거하고 있다. 예식들은 사람들 스스로가 옳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식에 굴종하는 여하한 존재들이나 몸짓들이나 말들도 없는 것이며, 또한 예식이 그것들에 종속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에 돌아간다>는 뜻은 동물적 욕구나 부도덕한 격정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예에의) <굴종>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주제는 (원자처럼 자기 완결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발견>이나 개인의 궁극적 중요성의 발견도 아니다.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맺고 있는 제반연관 관계로부터 차단되고 추상화되어 버린) 단순한 개인이란 언제나 이렇게도저렇게도 쓰여질 수 있으며 또한 언제라도 깨어질 수 있는 볼품 없는 그릇, 그러나 인생의 예식에 이바지할 때 비로소 찬란하고 신성스럽게 변모되는 그릇에 비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결코 인간들이나 개개인들의 궁극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단지 보다 큰 전체(즉 사회)에 봉사만 하는 개미처럼 무의미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제사 예식 자체가 신성스럽기 때문에 제사 예식에 쓰이는 그릇의 신성스러움이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성스러움에의 참여 효과 또한 실제적으로 눈에 보인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의 거룩함(또는 신성스러움)이 들어 있는 방식이 기독교의 관점괴는 다른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처럼) 인간은 신성, 즉 불멸하는 영혼의 한 <조각>을 다른 사람괴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절대로 확보하는 것만으로 결코 성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관련없는) 개인의 <완숙한 계발>이 핵심적 주제가 아니다. 그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올리는 예식 행위를 통한 인간다움의 완숙한 계발이 핵심적 주제이다 마치 사당에서 쓰이는 예기가 칼로 깎고 끌로 다듬고 옻칠로 광택을 내어서 만들어지듯이, 물론 개인도 자신을 계발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공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식에 쓸)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예식 수행의) 핵심이 아니듯이, 이러한 자기 계발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증하는) 핵심적인 일이 못 되는 것이다. 마련하거나 수련하는 일은 꼭 있어야만 할 일이다. 그러나 핵심은 예식을 올리는 일이다. 예식을 올리는 한에서 일체의 구성요소, 제반 관계들 그리고 각종 몸짓들은 비록 각각이 자기의 특성을 가질지라도 모두 신성스럽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예식에 쓰이는 인공물로 개조되지 못한 자연적 대상은 버려져야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거룩함의 옷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에까지도, 그리고 젊음과 노래뿐만 아니라 강물과 공기에까지도 드리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예식에 맞는 기우제의 이미지를 통해서 보게 된다. 군자란 자아, 이기심, 고집, 자만을 거의 완벽하게 잘라 버리고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그와 같은 사람은 인간으로서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는 성인이며, 신성스런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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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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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6장 포숙아, 관중을 추천하다
5. 천하 절색 식부인
병차없이 회합에 가다
관중이 대답했다.
"주공께서 왕명을 받고 모든 제후 앞에 임하는 것인데 왜 병차를 타고 가시려는 겁니까? 병사는 필요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예복을 갖추고 회에 가십시오."
제환공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옳은 말이오."
이에 관중은 사람을 보내 북행 땅에다 높이가 3장이나 되는 3층 단(壇)을 쌓게 하고 왼편에는 종을 걸고 바른편에는 북을 두고 맨 위에다 천자의 빈자리를 만들고 곁에는 반점을 베풀고 옥과 비단과 모든 기구를 갖추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열국 제후들이 유숙할 수 있도록 여러 곳에다 관사를 지어 미리 예비하는데, 경치 좋은 곳을 골라 터를 다듬고 건물도 격식에 맞도록 지었다. 어느덧 약속한 날짜가 임박하자, 먼저 송환공 어설이 와서 자신의 군위를 정해 주기 위하여 이런 모임을 베풀어 준 데 대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음날은 진선공(陳宣公)과 주후 두 사람이 잇달아 당도했다. 채애공도 지난날 초나라에 잡혀가 죽을 뻔한 원한이 있기 때문에 달려와 참여했다.그런데 이들 4명의 제후들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창검이 없고 제나라의 병차가 보이지 않는지라 의아해 하다가 전후 사정을 알자 크게 감탄했다.
"제후(齊)는 오로지 예(禮)를 다해서 지극 정성으로 우리를 대하는구려."
그들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거느리고 온 군사와 병차들을 2O리 밖으로 물러가 있도록 했다. 이 때는 2월도 끝날 무렵이었다. 제환공이 초조하게 관중에게 상의했다.
"제후가 더 이상 모이지 않을 모양이오. 회합 기일을 연기하는 것이 어떠하오?"
관중이 대답했다.
"옛말에 세 사람이면 무리(群)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네 나라만 해도 결코 적은 수는 아닙니다. 만일 기일을 다음날로 연장하면 이는 믿음을 잃는 것입니다. 기다려도 모든 제후가 오지 않으면 이는 그들이 왕명을 욕(辱)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으로 4명의 제후가 모였는데 신용을 잃거나 또는 왕명을 욕되이 하고서야 장차 어찌 천하의 패권을 도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환공이 재차 물었다.
"이번에 동맹을 할 것인지 아니면 회만 하고 말 것인지 어느 것이 좋겠소?"
관중이 서슴지 않고 아뢰었다.
"비록 마음이 하나로 규합되진 못했으나 회(會)를 열어서 제후들끼리 서로의 마음이 흩어지지만 않으면 저절로 동맹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환공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3월 초하룻날 아침, 제 . 송 . 진 . 채 . 주 다섯 나라 제후는 함께 단 아래 모여 서서 상견례(相見體)를 했다. 제환공이 제후들에게 말했다.
"오늘날 왕정이 오래도록 피폐해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실정이오. 과인이 이번에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러분들을 청한 것은 장차 주왕실을 돕기 위함이니 앞으로 우리가 함께 일을 하려면 오늘 반드시 한 사람을 추대해서 모든 일을 주장케 해야만 권한과 의무도 생겨나고 또 왕실에 소속될 것이며, 따라서 정령(政令)도 천하에 펼 수 있소."
네 나라 제후가 서로 상의하니 한사람을 추대하는 데엔 별 반대가 없으나 난처한 문제가 있었다. 명확히 따져 보면 송나라는 벼슬이 상공의 자리에 있고, 제나라는 군후에 불과했던 것이다. 벼슬의 높낮이 순서로 따지면 송후를 추대해야지 제환공을 추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송나라 임금을 추대하자니 이번에 송의 군후가 새로 군위를 인정받은 것은 오로지 제환공의 노력과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둘 중에 누구를 주장으로 추대하느냐는 문제는 참으로 그 해결이 곤란했다. 이렇듯 난처한데 진선공이 일어나 말했다.
"이번에 주왕께서 여러 군후를 규합하여 이렇듯 회합하라는 뜻을 제환공에게 내리셨소. 그러니 누가 감히 제환공을 대신하여 주장으로 설 수 있으리오. 마땅히 제환공을 추대해서 맹회(業會)를 이끌도록 합시다."
다른 제후들이 이 말에 응낙했다.
"그 말이 옳소. 이렇듯 큰일을 다른 이가 감당하기는 정말로 어려울 것이오."
이에 제환공은 거듭 사양한 뒤에야 단 위에 올라가서 맹주가 되었다. 그 다음은 송, 그 다음은 진, 그 다음에 채, 그 다음에 주가 차례로 섰다. 이렇듯 차례가 정해지자 종과 북을 치고, 먼저 단 중앙에 마련한 천자의 빈자리를 향해 일제히 행례(行禮)하고 서로 친선 우호한 후 형제의 정을 나눴다.
2. 어찌 한 줌의 토지를 아끼리오
송나라 어설의 변심
이어 중손추가 꿇어앉아서 함을 열고 서찰을 꺼내 읽었다.
신왕(新王) 원년(元年) 삼월(三月) 초하루(一日)에 제나라 소백(小白), 송나라 어설(御說), 진나라 저구(杵舊), 채나라 헌무(獻舞), 주나라 극(克)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북행 땅에 모여서 함께 왕실을 돕고 약한 자를 원조하기로 맹세하노라. 만일에 이 맹약을 어기는 자 있으면 열국(列國)은 함께 그를 징벌하리라.
다섯 제후는 읍하고 명을 받았다. 그런 후에 서로 술잔을 들어 축원했다. 관중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말했다.
"노(魯) . 위(衛) . 정(鄭) . 조(曺) 나라가 왕명을 어기고 이 맹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왕명을 어긴 그들을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환공이 즉시 네 나라 군후에게 청했다.
"과인의 나라는 병차가 넉넉하지 못하니 모든 군후가 함께 거사합시다."
진 . 채 . 주 나라 군후가 일제히 대답했다.
"서로 힘을 다해 도우리다."
그러나 송환공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날 밤이었다. 송환공은 관사로 돌아가서 대부 대숙피와 의논했다.
"이제 보니 제후(齊侯)가 건방지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높혀 벼슬의 차례를 무시하고서 이번 맹회에 주장이 되었다. 어찌 아니꼬운 일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여러 나라 군사를 이용하여 자기 제나라를 높이려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도다. 장차 우리 송나라가 그들의 명령만 순종하다가 아무 일도 못하지 않겠느냐."
대숙피가 대답했다.
"이번에 안 온 나라만도 열국 제후 중에서 반이나 됩니다. 제후가 패업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나라가 노나라와 정나라를 굴복시키면 패업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번에 네 나라가 제나라에 모였으나 그 중에 제일 큰 우리 송나라가 순종하지 않고, 노나라가 또한 그들에게 대항하면 세 나라도 자연 해체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곳에 온 목적은 왕명을 받들어 주공의 군위를 인정받고 결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바에야 여기에 남아 무엇을 다시 기다리겠습니까."
송환공은 머리를 끄덕였다. 드디어 송환공과 대숙피는 인사도 없이 새벽에 수레를 타고서 송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제환공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 송환공이 회합을 배반하고 달아났다는 보고를 듣자 대로했다.
"그 놈을 잡아오너라!"
추상같이 중손추에게 분부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관중이 말했다.
"지금 그들의 뒤를 쫓는 건 옳지 못합니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언제나 왕군의 명목으로써 쳐야만 대의 명분이 섭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제환공이 물었다.
"무슨 일이 이보다 더 급하단 말이오?"
관중이 아뢰었다.
"송나라는 멀고 노나라는 가까이 있습니다. 먼저 이번 맹회에 참석하지 않은 노나라를 꺾지 못하면 송나라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제환공이 물었다.
"노나라를 치려면 어느 길을 취해야 하오?"
"제의 동북쪽에 수(遂)라는 나라가 있는데 노나라의 속국입니다. 우리가 중병(重兵)으로써 치면 수는 왕의 명령을 받은 우리 앞에 곧 항복할 것입니다. 수가 항복하면 노는 반드시 우리를 크게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 때에 사신을 노나라로 보내어 이번 북행 땅 맹회에 안 온 것을 준열히 꾸짖으십시오. 그리고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노부인 문강(魯夫人 文姜)에게 편지하십시오. 문강께서는 노후와 친정인 우리 나라가 서로 친하기를 원하느니만큼 적극 협조할 것입니다. 노후가 안으로는 노부인의 성화를 받고, 밖으로는 우리 군사의 위세에 눌리게 되면 반드시 우호 맺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노나라를 용서해 주고, 즉시 군사를 송나라로 돌려 송나라가 맹회 도중에 왕명을 가볍게 여긴 죄를 다스리는데 주공께서 왕신(王臣)으로 임하시면 송후는 대항하지 못하고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이것이 파죽지세(破竹之勢)일 것입니다."
제환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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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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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방정환편" 방정환(1899~1931)
아동 문학가. 호는 소파. 서울 출생. 일본 토요 대학 중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고 '어린이날'을 만들어 낸 방정환, 그는 한국의 아동 문학을 본격화시켰으며 어린이 보호 운동을 펼쳤다. 3.1운동 때는 독립 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번안 동화의 소개에도 앞장섰다. 동화, 소년 소설의 창작과 '색동회'의 활동을 주재했던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어린이 찬미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다. 볕 좋은 첫여름 조용한 오후이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싶게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 같은 꽃잎, 아니 아니 이 세상에 곱고 보드랍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가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라. 그 서늘한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이렇게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가늘게 코를 골면서 편안히 잠자는 이 좋은 얼굴을 들여다보라. 우리가 종래에 생각해 오던 하느님의 얼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구석에 먼지만큼이나 더러운 티다 있느냐. 어느 곳에 우리가 싫어할 한 가지 반 가지나 있느냐. 죄 많은 세상에 나서 죄를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 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 죄도 갖지 않는다. 아무 획책도 모른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먹어서 부르면 웃고 즐긴다. 싫으면 찡그리고, 아프면 울고, 거기에 무슨 꾸밈이 있느냐. 시퍼런 칼을 들고 핍박하여도 맞아서 아프기까지는 방글방글 웃으며 대하는 것이다. 이 넓은 세상에 오직 이 이가 있을 뿐이다.
오오 어린이는 지금 내 무릎 위에서 잠을 잔다. 더 할 수 없는 착함과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추어 가진 어린 하느님이 편안하게도 고요한 잠을 잔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마음 속까지 생각이 다른 번수한 것에 미칠 틈을 주지 않고 고결하게 순화시켜 준다. 나는 지금 성당에 들어간 이상의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자는 얼굴에 예배하고 있다. 어린이는 복되다! 이 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믿어 왔다. 그 복을 많이 가져온 이가 어린이다. 그래 그 한없이 많이 가지고 온 복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준다. 어린이는 순 복덩어리다.
마른 잔디에 새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별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것도 어린이요, 눈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계시다.
어린이의 살림에 친근할 수 있는 사람, 어린이 살림을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배울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을 얻을 것이다. 어린이와 마주 대하고는 우리는 찡그리는 얼굴, 성낸 얼굴, 슬픔 얼굴을 못 짓게 된다. 아무리 성질 곱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어린이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험상한 얼굴을 못 가질 것이다. 어린이와 마주 앉을 때 적어도 그 잠깐 동안은--모르는 중에 마음의 세례를 받고 평상시에 가져 보지 못하는 미소를 띈 부드러운 좋은 얼굴을 갖게 된다. 잠깐 동안일망정 그 동안 순화되고 깨끗해진다. 어떻게든지 우리는 그 동안 순화되는 동안을 자주 가지고 싶다.
하루라도 3천 가지 마음 저저분한 세상에서 우리의 맑고도 착하던 마음을 얼마나 쉽게 굽어 가려고 하느냐? 그러나 때로는 방울을 흔들면서 참됨이 있으라고 일깨워 주고 지시해 주는 어린이의 소리와 행동은 우리에게 큰 구제의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피곤한 몸으로 일에 절망하고 늘어질 때에 어둠에 빛나는 광명의 빛깔이 우리 가슴에 한 줄기 빛을 던지고 새로운 원기와 위안을 주는 것도 어린이만이 가진 존귀한 힘이다. 어린이는 슬픔을 모른다. 그리고 음울한 것을 싫어한다. 어느 때 보아도 유쾌하고 마음 편하게 논다. 아무 댈 건드려도 한없이 가진 기쁨과 행복이 쏟아져 나온다. 기쁨으로 살고 기쁨으로 커 간다. 뻗어나가는 힘! 뛰노는 생명의 힘! 그것이 어린이다. 온 인류의 진화와 향상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린이에게서 기쁨을 빼앗고 어린이 얼굴에다 슬픈 빛을 지어 주는 사람이 있다 하면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죄인은 없을 것이다. 어린이의 기쁨을 상해 주어서는 못쓴다. 그리 할 권리도 없고 그리 할 자격도 없건마는... 무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많이 어린이들의 얼굴에 슬픈 빛을 지어 주었느냐. 어린이들의 기쁨을 찾아 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의 기쁨을 찾아 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아래의 세 가지 세상에서 온통 것을 미화시킨다.
이야기 세상 - 노래의 세상 - 그림의 세상.
어린이 나라에 세 가지 예술이 있다. 어린이들은 아무리 엄격한 현실이라도 그것을 이야기로 본다. 그래서 평범한 일도 어린이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예술화하여 찬란한 미와 흥미를 더하여 가지고 어린이 머릿속에 전개된다. 그래 항상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본다. 어린이들은 또 실제에서 경험하지 못한 일을 이야기 세상에서 훌륭히 경험한다. 어머니와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아주 이야기에 동화해 버려서 이야기 세상 속에 들어가서 이야기에 따라 왕자도 되고, 고아도 되고, 또 나비도 되고 새도 된다. 그렇게 해서 어린이들은 자기의 가진 행복을 더 늘려 가고 기쁨을 더 늘려 가는 것이다.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본 것 느낀 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고운 마음을 가지고 어여쁜 눈을 가지고 아름답게 보고 느낀 그것이 아름다운 말로 굴러나올 때, 나오는 모두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여름날 성한 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내어 나무를 흔든다 보는 것도 그대로 시요, 오색의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하느님 따님이 오르내리는 다리라고 하는 것도 그대로 시다. 개인 밤 밝은 달의 검은 점을 보고는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 내고
옥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잡을 짓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고운 노래를 높이어 이렇게 노래를 부른다. 밝디밝은 달님 속에 계수나무를 금도끼 은도끼로 찍어 내고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자는 생각이 얼마나 곱고 어여쁜 생각의 소지자이냐?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이러한 고운 노래를 기꺼운 마음으로 소리높여 부를 때, 그들의 고운 넋이 얼마나 아름답게 우쭐우쭐 자라갈 것이랴? 위의 두 가지 노래는 어린이 자신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큰 사람의 지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하나 몇 해 몇십 년 동안 어린이들의 나라에서 불러 내려서 어린이의 것이 되어 내려온 거기에 그 노래에 스며진 어린이의 생각, 어린이의 살림, 어린이의 넋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그리기를 좋아한다. 조금도 기교가 없는 순진한 예술을 낳는다. 어른의 상투를 재미있게 보았을 때 어린이는 몸뚱이보다 큰 상투를 그려 놓는다. 순사의 칼을 이상하게 보았을 때, 어린이는 순사보다 더 큰 칼을 그려 놓는다. 얼마나 솔직한 표현이냐. 얼마니 순진한 예술이냐.
지나간 해 여름이다. 서울 천도교당에서 여섯 살 된 어린이에게 이 집 교당(내부 전체를 가리키면서)을 그려 보라 한 일이 있었다. 어린이는 서슴지 않고 종이와 붓을 받아들더니 거침없이 네모 번듯한 사각 하나를 큼직하게 그려서 나에게 내밀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그 어린 동무가 그 큰 집에 들어앉아서 그 집을 보기는 크고 네모 번듯한 넓은 집이라고밖에 더 달리 복잡하게 보지 아니한 것이었다. 얼마나 순진스럽고 솔직한 표현이냐? 거기에 아직 더럽혀지지 아니한 이윽고는 큰 예술을 낳아 놀 무서운 참된 힘이 숨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 포기 풀을 그릴 때 어린 예술가는 연필을 쥐고 거리낌없이 쭉쭉 풀 줄기를 그린다. 그러나 그 한 번에 쭉내어 그은 그 선이 얼마나 복잡하고 묘하게 자상한 설명을 주는지 모른다.
위대한 예술을 품고 있는 어린이여! 어떻게도 이렇게 자유로운 행복만을 갖추어 가졌느냐?
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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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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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일기
사랑의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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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기 시작할 땐 차고 넘치도록 많은 말을 하지만, 연륜과 깊이를 더해 갈수록 말은 차츰 줄어들고 조금은 물러나서 고독을 즐길 줄도 아는 하나의 섬이 된다. 인간끼리의 사랑뿐 아니라 신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임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섬이 되더라도 가슴엔 늘상 출렁거리는 파도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메마름과 무감각을 초연한 것이나 거룩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게 될까 봐 두렵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마음의 가뭄을 경계해야 하리라.
4
아침엔 조금이나마 반가운 비.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 보는 하늘물 냄새. 안팎으로 물이 귀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요즘이다. 메마른 세상에 물이 귀하니 사람들 마음 안에도 사랑의 물이 고이질 못하고 인정과 연민이 줄어드는 것인가? 연일 보도되는 사랑없음의 사건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때로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살고 있는 것 같은 나 자신과 이웃을 발견하는 일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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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의 말이 아닌 모든 말은 뜻밖에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때가 많고, 그것을 해명하고자 말을 거듭할수록 명쾌한 해결보다는 더 답답하게 얽힐 때가 많음을 본다. 그러므로 소리로서의 사랑의 언어 못지않게 침묵으로서의 사랑의 언어 또한 필요하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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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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