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30호 》 2022.8.15 (음 7.18)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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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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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겐 친구와 고독이 아울러 필요하다.
여름과 겨울, 낮과 밤, 운동과 휴식이 필요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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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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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계를 넘다
세상은 ‘아사리판’. 한 번도 ‘주인공’으로 살아본 적 없는 ‘건달’은 하는 일 없이 주변에서 ‘걸식’을 하며 살았다. 어느 날 ‘성당’처럼 지은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안을 기웃거렸다. ‘육안’으로도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장로’를 중심으로 ‘신도’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탐욕’과 ‘아집’이 어떻게 ‘세계’를 ‘타락’의 ‘나락’에 빠뜨리는지를 다루고 있었다.
현관문을 두드렸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는 다짜고짜 ‘곡차’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집사는 ‘난처’해하면서 교회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배고픈 ‘내색’은 하지 않고 ‘무심히’ 뒤를 따랐다. 집사가 말했다.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립시다. ‘지옥’의 길에서 빠져나와 ‘천당’에서 ‘천사’와 함께 살듯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오로지 ‘현재’ 일어난 것들을 ‘관찰’해야 합니다.” 건달 왈, “나는 기독교 ‘교리’에 ‘문외한’이지만 ‘선생’의 ‘설교’는 마치 불교 말씀 같구려.” 집사는 웃으며 “모든 건 변하니까요”.
건달은 ‘회심’하여 그 집사를 ‘선생’으로 삼아 ‘제자’가 되었다. 그 후로 ‘차별’ 없는 ‘공생’ 사회라는 ‘제목’으로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어 ‘성자’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작은따옴표 안의 낱말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일상어이다. 불교용어도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이거나 의역이 많다. 말은 경계를 넘는다.)
동서남북
도대체 ‘오른쪽’은 어디인가? 쉬운 말을 뜻풀이하기가 더 까다롭다. 사전에는 ‘북쪽을 향했을 때 동쪽과 같은 쪽’이라는 뾰족수를 내놓고 있지만, 보통은 우리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눈이 향하는 곳을 기준으로 가로세로로 나누어 오른쪽, 왼쪽, 앞, 뒤를 가리킨다. 자기를 중심으로 방향을 파악하기 때문에 몸의 방향에 따라 전후좌우가 수시로 바뀐다. 지도나 나침반 없이, 별다른 방향감각 없이도 공간을 지각하니 편리하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구구이미티르족에게는 ‘앞, 뒤, 오른쪽, 왼쪽’ 같은 말이 없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말만 쓴다. 몸과 무관한 절대적 방향감각! 오른쪽 뺨에 묻은 밥풀을 보고 ‘뺨 서쪽에 밥풀 묻어 있어’라 하고, 발 옆으로 개미가 지나가면 당신 북쪽으로 개미가 지나간다고 한다. 내비게이션 지도를 정북 방향 모드로 설정하면 이 감각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지도를 북쪽으로 고정시켜 놓아 주행 방향과 다르게 옆이나 거꾸로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은 허허벌판에서도 목표지를 쉽게 찾아가는데, 이러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한 방위를 알아야 한다. 낮이든 밤이든 실내든 실외든 심지어 동굴 안에서도 마음속 나침반을 작동시켜야 한다. 놀랍게도 두 살 때부터 익히기 시작해 일곱 살이면 통달한다.
아버지 세대만 해도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는지 알고, 남향이니 북향이니 하며 방향에 대한 감각을 풍수지리적으로나마 익혀 왔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더욱 멀어졌다. 그걸 알 수 있는 질문. 당신은 지금 당장 해가 어디에서 뜨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가?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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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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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오 나가다오 - 김수영
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을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같기도 한 것이니
이유는 없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려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의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
[사월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할아버지가 상추시, 아욱시, 근대시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같기도 할 것이니
지금 참외와 수박을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
오이, 호박의 손자며느리값도 안되게
헐값으로 넘겨버려 울화가 치받쳐서
고요해진 명수할버이의
재술거리는 눈이
비둘기 울음소리르 듣고 있을 동안에
나쁜 말은 안하니
가다오 가다오
지금 명수할버이가 멍석 위에 넘어져 자고 있는 동안에
가다오 가다오
명서할버이
잿님이할아버지
경복이할아버지
두붓집항아버지는
너희들이 피지도를 침략했을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들은 아직 젖도 떨어지기 전이었다니까
명수할버이가 불쌍하지 않으냐
잿님이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두붓집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가다오 가다오
선잠이 들어서
그가 모르는 동안에
조용히 가다오 나가다오
서푼어치값도 안되는 미.소인은
초콜렛, 커피, 페치코오트, 군복, 수류탄
따발총......을 가지고
적막이 오듯이
적막이 오듯이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
<196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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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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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
-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킴.
《出典》'史記' 秦始皇本紀
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측근 환관인 조고(趙高)는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태자 부소(扶 蘇)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현명한 부소보다 용렬한 호해가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고는 이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 그밖에 많은 구신(舊臣)들을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말[馬]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 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趙高欲慰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 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問左 右 左右或? 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後群臣皆畏高.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打倒)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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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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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5장
공자의 비유:에식에 쓰이는 신성스러운 그릇
회상의 이야기는 역사를 기억으로 보여주지만 다른 이야기(말하자면 신화의 형식)는 역사를 의미로 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이야기 방식은 모두-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든지간에-그들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 회상의 이야기도 의미의 이야기도 모두 현재에로 귀결된다. 나아가서 의미와 회상은 전혀 뚜렷이 구별될 수 없다. 각각 서로 다른 것을 필요로하며, 서로 그 속에 융합되어 있다. 우리는 가금 참으로서의 역사와 허위로서의 신화를 구분하지만 사실 이런 구분의 (이유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은 우선 너무나 과민한 것이어서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 이야기가 회상 이야기보다 눈에 띄는 선명성이 있다고 보는한, 신화 이야기가 보다 의미 깊고 보다 지속적 타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통용된다. 왜냐하면 신화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준다. 즉 이것이 의미 그 자체인 것으로 통용되는 한, 적절한 신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소박하게 이해한 인생보다는 신화의 방식에서 더 중요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 <다른> 영역은 언제나 의미 있는 영역임은 물론 의미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 있는 이야기들은 전형적으로 이중적인 역사성을 지닌다. 첫째, 이야기의 형식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은 바로 (특정) 시간-요컨대 역사의 한 단락-안에서 의미 있게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들로서 나타나는 인생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둘째,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바와 같이, (실제 삶의 생생한 사건들과 구분되는) 이야기라는 <별개성> 또는 <초월성>은 전체 이야기를 먼 과거 또는 아주 먼 장소, 혹은 이 둘다에다 서러정하는 이야기 형식속에 이미 드러나 있다. 내가 의미 이야기(즉 신화)에 대립하여 명명한 회상 이야기(즉 역사)를 신종하는 현대 유럽 문명권의 사람에게는, 의미란 결국 암암리에 회상속으로 섞여 들고 만다. 즉 역사라는 것이 말하자면 그들의 신화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표면상 의미 이야기, 즉 신화들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상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근거하고 있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신화의 무대가 되는 그 해당 시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건들이다.
의미를 주는 이야기가 먼 과거의 일로 설정될 때는, 일반적으로 그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인 과거, 회상된 역사적 과거와 사실상 연관을 갖는, 그런 과거의 일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구성된 이야기나 계보는 일반적으로 실제의 역사적인 과거의 그 (이야기 속의) <다른>(<옛날의>)과거를 연결시키고 있다. 비록 다른 영역(즉 이야기 세계)의 존재들이 실제 일어나는 인간 역사에 대비되는 그것들 자신의 역사-물론 인간들이 실제 눈을 뜨고 활동하는 동안 보통 눈에 띄지 않지만-를 계속하고 있음을 우리가 적지 않게 자주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추상적 이론과 개념적 분석이 발명디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런 이야기를 사용하는 경향은 결코 서구 뭄명권에서는 사라진 적이 없었다. 우리(서구인들)는 역사적으로 참으로 빈번하게 다종 다양한 이론적 이데올로기나, 교설, 구호(<자유 언론>, <인권 보장> 등등)들의 노예였다. 아직도 우리는 (기억된 과거만을 유의미한 것으로 정리하는) 이른바 역사의 연구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 이야기, 정치적인 신화 창조, 상업성을 띤 <인물 만들기>나 <각종 표창>, 그리고 (통속적인) 드라마, 예술, 문학 등을 정말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사고와 감성의 제 양태로 보고 그것들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근거에서 예식의 이미지, 따라서 전통이라는 이미지를 통한 인간다움의 실현을 깨닫게 되었다. 공자가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 형식-즉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것은 아주 독특하게 적절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의 내용은 인생의 의미를 사색하는 모든 형태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마도 가장 의미를 불러일으키기 용이한 형식과 완벽하게 합치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런 방식의 이야기 형식이 <고풍스런> 사유 형식이지만, 그런 이야기 형식은 현대의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완전한 고대로의 순전한 복귀가 아니듯이, 공자에게 있어서도 고대로의 순전한 복귀가 아니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과 (그의 자율적,능동적인) 능력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통찰에 근거를 둔 이념을 제시함에 있어서 신화적인 과거의 이야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공자의 사유 속에는 (의미를 산출해 내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라는) 형식적인 모습이 그의 (전통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하는) 가르침의 내용과 혼융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자는 그의 이사의 내용이 되는 전통에 대한 깊은 존경과 충성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아주 적절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긔 공자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바로 그의 가르침을 서구인의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구해 내어, 그것을 모든 인류에 대한 적절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밝히는 일이 된다. 우리는 옛날 방식에의 <복귀>를 가르치는 사람(즉 공자)을 둘러싼 문화적 갈등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자의 서술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역사적이며 내적 일관성이 있고 단지 전적으로 적절한 전통의 소유(즉 전통에로의 완벽한 복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공자의 가르침이 주는 과제는 공자 자신이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사실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갈등 많은 현재를 인간답게 하고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을 얻어 낼 수 있도록 자신의 전통에서 (참신한) 영감을 찾아 내라는 것이었다. <옛 것을 되살리어 새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스승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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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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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6장 포숙아, 관중을 추천하다
5. 천하 절색 식부인
육권의 직간
이렇듯 간곡히 여러 가지로 간했으나 초문왕은 육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육권이 초문왕의 소매를 잡고 칼을 뽑아 왕을 겨누면서 단호하게 다시 아뢰었다.
"신은 차라리 왕과 함께 죽을지언정 살아서 왕이 모든 나라로부터 지탄받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그제야 초문왕이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과인은 그대 말을 듣겠노라. 칼을 거두어라."
이리하여 채애공은 겨우 죽음을 면했다. 육권이 다시 초문 왕에게 아뢰었다.
"왕께서 다행히 신의 말을 들으사 채후를 죽이지 않으시니 이는 우리 초나라의 복입니다. 그러나 신이 왕을 협박한 죄는 만사(萬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신을 죽여 주십시오."
"경의 충성에는 저 빛나는 태양도 무색할 지경이다. 짐이 어찌 경을 처벌할 수 있으리오."
"왕께선 비록 신을 용서해 주셨지만 신이 어찌 이 불충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육권은 말을 하며 칼을 뽑아 들더니 자기 발을 내리쳤다. 그러고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신하된 자로서 왕에게 무례한 자는 나의 꼴을 보아라."
초문왕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좌우에 명하여 육권의 끊어진 발을 소중히 보관하도록 했다. 이로써 초문왕은 충신의 간언(諫言)을 듣지 아니한 자신의 허물을 크게 뉘우쳤다.그 후 육권의 상처는 아물었으나 그는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초문왕은 육권을 대혼(성문을 지키는 두령의 벼슬)으로 삼고 존칭하여 대백(大伯)이라 하였다.
채애공의 복수
초문왕은 마침내 채애공을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전송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 자리에는 많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쟁이라는 악기를 탄주(彈奏)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용모는 무리 중 단연 뛰어났다. 초문왕도 채애공이 호색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은근히 그 여자를 가리키며 채애공의 속마음을 떠 보았다.
"저 여인은 재색이 겸비하오. 가히 군후에게 한잔 술을 바치게 하오리까?"
그 여인은 왕의 명을 받아 큰 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채애공에게 바쳤다. 채애공이 술잔을 받아 단숨에 주욱 들이마시고 나서 그 잔을 초문왕에게 바쳐 올리며 축원했다.
"만수(萬壽)하소서."
초문왕이 웃으며 채애공에게 물었다.
"군후께서는 어떻게 생긴 여인이 진정한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물은 까닭은 사실 채애공이 원한다면 그 여인을 주어 객고(客苦)를 풀게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채애공은 식후(息侯)의 속임수로 자신이 포로 신세가 되고 끝내 이렇듯 궁색한 처지에 몰린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미인이라고 하면 단연코 식후의 규씨 부인이지요. 이 세상 천하에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또 없을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여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지요. 천상의 선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녀가 지상에 하강했다고 생각하시면 큰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 미인입니까?"
초문왕은 금시 초문이었다. 그러자 채애공은 서둘러 말했다.
"그녀의 눈은 맑은 물 같고, 뺨은 마치 복숭아꽃 같지요. 동작 하나하나가 극히 사랑스럽습니다. 지상에 그런 절세 미인은 두 번 다시 없습니다."
채애공은 미사 여구에 최대의 찬사를 합쳐 감정을 넣으면서 그녀를 칭찬했다. 초문왕이 듣다가 길게 탄식했다.
"그 여인을 한번 볼 수 있었으면......."
채애공이 슬며시 권유했다.
"대왕의 위엄으로써 한 여자쯤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생각만 있으시다면 쉬운 일이지요."
이 말을 듣자 초문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서로 술잔을 권하면서 크게 취해 그날의 잔치를 파했다. 채애공은 초문왕의 마음속에 애욕의 씨앗을 심어 복수의 계기를 만들어 두고, 자신은 호랑이 굴에서 도망치듯 초나라를 떠나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갔다. 채애공의 말을 한번 들은 뒤로, 초문왕은 식부인 규씨를 수중에 넣고자 사방을 순수(巡守)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식국으로 갔다. 이에 식후는 멀리까지 나와서 초문왕을 영접하여 조당(朝堂)에다 잔칫상을 벌이고 연회를 베풀었다.
"지난날 짐은 군후의 부인을 위해서 약간 수고한 바가 있소이다. 짐이 여기까지 왔는데 군후의 부인은 어째서 짐에게 술 한 잔 권하기를 주저하시오?"
식후는 초문왕의 위력에 눌려 거역하지 못하고 즉시 내궁으로 사람을 보냈다. 이윽고 환패(環佩) 소리가 나면서 부인 규씨가 들어와 따로 담요를 펴고 초문왕에게 재배했다.그러나 초문왕은 답례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미모에 잠시 정신이 흔들렸던 것이다. 규씨가 백옥잔에 술을 가득 부어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는데, 그 손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과연 천상(天上)의 여자로다.'
초문왕은 속으로 감탄하며 그 술잔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규씨는 그 잔을 곁에 있는 궁인에게 주어 대신 바치게 했다. 초문왕은 그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식부인 규씨는 다시 재배하고 내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때부터 초문왕은 식부인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연회가 파하고 초문왕은 하는 수 없이 관사로 돌아갔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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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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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희승편" 이희승(1896~1989)
국어 국문 학자, 시인. 호는 일석. 경기도 개풍 출생. 경성 제대와 일본 도쿄 대학원 졸업. 문학 박사. 서울대 교수, 동아 일보 사장 역임. 시집에 "박꽃", 수필집에 "벙어리 냉가슴"이 있고 "국어학 개설" "국어 대사전" 등의 저서가 있다. 정확한 문장과 전형적인 우유체의 문체로 교과서에 흔히 실리는 글들이다.
독서와 인생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갈대'라고 한 것은 아마 약하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갈대는 웬만한 바람일지라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저리 쏠리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이와 같은 약한 존재이면서, 생각하는 작용을 한다. 이 '생각한다'는 일, 이것이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중요한 조건 중의 한 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이르는 것도, 이 생각하는 작용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은 그만큼 놀랍고 위대한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문화를 창조하여 내려 왔고, 또 그것을 흐뭇하게 누리고 있는 것은 온전히 사고작용의 덕분이라 할 수 있으며, 오늘날 월세계를 생각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극장에 구경을 갔더니, 막간에 배우 한 사람이 나와서 재담을 하는데,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방울이 무엇이냐?' 하는 수수께끼를 내고서, 제 스스로 해답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해답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제일 큰 방울은, 빗방울, 물방울, 은방울, 말방울, 왕방울, 죽방울 등 어떠한 방울도 아니요, 곧 사람의 '눈방울'이라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사람의 눈방울 속에는 안 들어 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주위에 있는 인간, 동물, 주택, 산천 초목 등의 모든 풍경이 동공을 통하여 사람의 눈 속으로 들어온다. 만일 높은 산에라도 올라서면 더욱 넓은 세계가 눈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천문대 망원경이라도 빌리게 된다면, 수억의 별이 있는 큰 우주가 사람의 조그마한 눈 속으로 들어오게 되니, 눈방울이 과연 크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사람의 사고 작용에 대해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도(즉 공간을) 생각하여 볼 수 있고, 태양계 생성의 초기로부터 지구 냉각의 말기까지도(즉 시간을) 생각하여 보려 하고 또 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이와 같은 생각의 범위를 어떻게 넓히고 높이고 깊게 하겠느냐 하면, 별수없이 남의 지식을 빌려 오는 도리밖에 없다. 빌려 오되, 한 사람의 지식뿐만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의 지식을 대량으로 거둬들여야 할 것이다. 현대인 지식뿐만 아니라 옛 사람의 지식도, 신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지식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지식도 빌려 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고 작용의 도를 넓히고 높이고 하여, 그 활동을 활발하고 왕성하게 할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서적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사고 작용을 활발하고 왕성하게 하기 위하여 서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피차간에 가진 생각을 서로 교환하는 수단으로 언어라는 것을 사용한다. 그런데, 언어는 이것을 이용하기에 힘이 안 들어 용이하고, 또 돈이 안 들어 경제적으로도 유리하지마는 표출하는 순간에 사라지고 말아서 보존하여 두고 되풀이하여 들을 수가 없고, 또 사람의 성량은 한도가 있어서, 먼 곳에까지 들릴 수가 없다. 따라서 아무리 목소리가 큰 웅변가라 할지라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수효는 무한정 많을 수가 없다.
이러한 것을 언어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는다고 이른다. 이 제한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곧 자기의 하고 싶은 말을 글자를 써서 기록으로 바꾸어 놓으면 된다. 그러면, 이 기록을 두고두고 볼 수도 있고, 또 먼 거리에 보낼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돌려 볼 수도 있다. 사람이 기록을 만들 필요를 이런 일에서 절실히 느끼었고, 따라서 문자를 발명하여 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끼리 서로 만나서 회화를 교환하게 되면, 서로 전달하고 싶은 생각을 곡진하게 철저하게 할 수 있는 편리가 있는 반면에, 그 말로써의 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질서가 잡히고 조리가 밝을 수는 없다. 대개는 그 표현이 산만하고 중복이 있고 군더더기가 붙어서 간결하고 세련된 표현이 되기 어렵다. 이러한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곧 자기의 생각을 정돈하여 기록에 옮기는 일이다. 이러한 정돈된 생각을 정돈하여 기록에 옮기는 일이다. 이러한 정돈된 생각을 조리를 따져 가며 체계를 이루어 기록하여 내면, 그것이 곧 책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무용 유해한 생각을 서적의 형태를 빌려서 만들어 내는 일은 없고,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까지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바를 질서 있게 체계 있게, 그리고 조리가 밝게 기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적은 사색의 결과요 지식의 창고인 동시에, 사색의 기록이 되며, 지식의 원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빵으로만을 살 수 없다는 말과 같이, 의식주의 생활을 충족시키면 인간의 할 노릇을 다 하였느냐 하면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의식주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불가결한 필수 조건이지마는 사람은 그만 못지않게 정신 생활의 신장을 욕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신 상태에만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생활을 좀더 고도화, 심화, 미화한다. 이것이 곧 이상을 추구하는 정열이다. 그리고 이 정신 생활의 고도화를 실현하려면 각 개인의 인격 수양이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상의 추구뿐만 아니라, 당면한 현실 생활을 질서 있게 평화스럽게 영위하려는 데도 각 개인의 인격 수양이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왜냐 하면, 이러한 수양 없이는 사람은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기 쉽고, 따라서 사회악을 지어 내게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이나 덕행의 뒷받침이 없는 지식은 인류 생활의 이익이나 행복을 가져오기는커녕 해독과 불행을 자아내기 쉬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수양에 관한 서적은 사람인 이상 누구에게나 필요한 등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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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일기
봄꽃들의 축제
18
내가 세상을 떠날 때는 너를 사랑하던 아름다운 기억을 그대로 안고 갈 거야. 서로를 위해 주고 격려하며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그 기다림의 순간들을 하얀 치자꽃으로 피워낼 거야. 사람은 가도 사랑은 영원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졸음이 막 쏟아질 때 들어가 누리는 달콤한 잠의 나라에서처럼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아무 말 안해도 편안하고 넉넉하구나. 모든 시름을 잊고 행복할 뿐이구나. 진정 우리의 우정은 아름다운 기도의 시작이구나. 친구야.
19
이른 아침에 몹시 힘이 들고 무거울 때마다 창 밖에서 나를 깨우는 새들의 가벼움이 부럽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가 다른 이의 무게를 덜어 주기엔 서로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힘이 없는 것 같다. 우선은 자기가 밝고 건강해야 남에게도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는게 아닐까?
20
물 속이 잘 보이게 해를 등지고 선 해오라기처럼 나도 오늘은 해를 등지고 서서 강물을 바라보네. 아무 생각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이 되는 강물. 나 역시 강물 같은 사랑으로 여기까지 흘러왔음을 강물이 조용히 말해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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