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14호
2022.7.24 (음 6.26)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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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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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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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주는 것은 고용주가 아니다. 고용주는 단지 돈을 관리할 따름이고 임금은 노동자들이 만든 생산품에서 나온다. ― 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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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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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토론할까
전국이 토론 중이다. 안 그래도 뜨거운 사회인데 뚜껑 닫아놓은 냄비처럼 들끓고 있다. 토론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적과 해야 제맛이다. 힘이나 앎의 차이로 윽박지르거나 꼬드겨 뻔한 결론에 도달하는 토론은 재미없다.
지금의 토론이 중요한 것은 찬반 의견이 ‘국민감정’에 따라 갈리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정서 문제가 개입되다 보니, 토론이란 게 토론자와 분리될 수 없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법을 어겼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미운 감정이 드는 이유는 뭔지 묻게 된다. 과거의 열광과 지금의 실망이 애매하게 공존하는 감정상태. 이 감정상태야말로 우리의 토론을 더 깊게 하고 우리 사회를 더 두껍고 탄탄하게 만든다.
슬쩍 일반화시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이율배반적이다. 양립할 수 없는 여러 기준이 한 사람 안에 양립함으로써 생기는 자기모순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조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당사자로 연루된 문제다.
공정과 정의는 절대적이지 않다. 합의해야 할 ‘양’(정도)의 문제다. 우리는 얼마나 공정할 건가, 얼마나 정의로울 건가. 주제가 피아 감별이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윤리 문제가 아닌, 합의를 해야 하는 양의 문제라면 토론은 알차진다. 게다가 남의 얘기 하듯 하지 않고 자기고백적 토론일 때 적과 공존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다. 결론 내지 말고 문지방에 매달아놓자. 세월 좋은 소리 말라고? 미안하게도 인간만이 판단을 유보할 줄 아는 존재다. 우리는 지금 모순의 내부에 있으면서 모순의 타파를 꿈꾸고 있다. 그러니 결론을 미루고 더욱 토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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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 할 책임
지난해 김영민 교수가 쓴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은 젊은이들에게 한줄기 빛이었다. 친척이 자신의 근황에 대해 물으면 ‘당숙이란 무엇인가’ ‘추석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와 같이 상대의 허를 찌르는 질문으로 맞받아치라는 글이었다. 풍문에 따르면, 몇몇 젊은이들이 진짜로 진격의 맞받아치기를 감행했다고 한다. 예상대로 모두 장렬히 패퇴했으며 친척들은 명절 때 다시는 안 모이기로 했다고 한다. 통쾌함에 비해 손실이 컸다.
차라리 어른이 아예 질문을 하지 않으면 어떨까. 물론 어려운 일이다. 나이 들수록 말이 많아진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하는 숱한 어른을 보라.
말하기는 권력이다.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권력자다. 주인과 노예, 위와 아래,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강하게 분리되어 있을수록 더 심하다. 권력자의 말하기는 겉으론 아니어도 결국 명령이다. ‘운동화가 편한가요?’라고 물으면, 직원은 다음날 구두로 갈아 신는다. 에둘러 말하는 간접화법으로 명령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결혼 언제 할래?’라는 질문은 결혼하라는 명령이고 ‘취직은 했어?’는 취직하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어른은 질문을 자제할 책임이 있다. 질문하지 말고 감탄하라. ‘하늘이 높구나’ ‘그새 풀이 많이 자랐네’ ‘의젓해졌구나’. 미래를 묻지 말고 과거를 얘기하라. ‘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셨다’ ‘여기가 엄마가 다닌 학교란다’. 소소한 얘기를 하라. ‘이렇게 하면 밤이 모양 나게 잘 깎여’ ‘전을 망가뜨리지 않고 넘기는 방법을 알려주마’. 질문은 젊은이들의 것.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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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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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곡(伴奏曲) - 김수영
일어서있는 너의 얼굴
일어서있는 너의 얼굴
악골에서 내려가는 너의 결련
-이것이 생활이다
나의 여자들의 더러운 발은 생활의 숙제
온돌 위에 서있는 빌딩
하늘 위에 서있는 꽃 위에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연령의 여유
시도 그런 여유에는 대항할 수 없고
지혜는 일어서있는 너의 얼굴
종교의 연필자죽이 두드러진
청춘의 붉은 희롱?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역사의 숙제, 발을 벗는 일,
연결의 [사도]-일어선 것과 앉은 것의
불가사의에 신음하는 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서양과 도양의 차이
나는 여유있는 시인-슈뺄비엘이
물에 바진 뒤에 나는 젤라틴을 통해서
시의 진지성을 본다
내용은 술집, 내용은 나, sodydds 도시,
내용은 그림자,
그림자의 비밀
종교의 획득은 종교를 잃었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그때부터 차차 늙어가는 탈을 썼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일어서있는 너의 얼굴은
오늘밤의
앉아있는 내 방의 춧불같은 재산, 보석이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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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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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석구분(玉石俱焚)
- 선악의 구분 없이 함께 멸망함. 《出典》'書經' 夏書 胤征篇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망하는 것을 <옥석구분(玉石俱焚)>이라고 한다.《書經》夏書 胤征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불이 곤강(崑岡)에 타면 옥(玉)과 돌이 함께 탄다. 임금이 덕을 놓치면 사나운 불길보다도 격렬하다. 그 우두머리 괴수는 죽이고 협박에 못이겨 복종한 사람들은 벌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물들어 더러워진 풍속은 모두 더불어 오직 새롭게 하리라.
火炎崑岡 玉石俱焚 天使逸德 烈于猛火 殲厥渠魁 脅從罔治 舊梁?俗 咸與惟新.
'胤征'은 윤후(胤侯)가 夏나라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희화(羲和)를 치러 나갈 때 한 선언으로, 희화를 치는 까닭을 말한 것이다. '崑岡'은 玉을 생산하는 산의 이름이다. 만일 곤강이 불에 탄다면 玉과 돌이 함께 타버릴 것이다. 화재는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거니와, 임금이 덕을 잃는다면 그 피해는 사나운 불길보다도 더 심하다. 따라서 지금 그 수령인 자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거니와, 억지로 가담했던 사람까지 모두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니,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착함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동의어】옥석혼효(玉石混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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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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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2장
치의 관념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나타난다. 어떤 경우 그것은 물질적인 이득을-예를 들면 좋은 옷, 좋은 음식, 부유함-그 자체에 대한 관심 혹은 그것들의 소유를 다루면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도에서 어긋난 방법으로 얻었거나 공적인 일의 수행과 관련해서 그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언사나, 용모, 아첨, 교만, 위선이 지나친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끝으로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치는 여러 곳에서 오명과 짝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개인적 이해 관계 때문에) 자기의 공적인 역할을 오명으로 끝내는 사적 행위에 대한 유비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중국과 서양간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이런 치에 관한 원문들은 우리 (서양인)들로 하여금 공자의 <수치심>을 서양의 <죄책감>과 같은 것으로 보기 쉽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과 연관지어 본다면 그런 관점의 차이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비록 치가 틀림없이 도덕적 개념이며 어떤 도덕적 조건 또는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감당하는 도덕적 관게란 개개인이 바로 예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공적인) 지위와 역할에 대해 가지는 도덕적 관계이다. 치는 따라서 <내면적>이라기 보다는 <외면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말은 했으나 못지키는 말의 문제요, 부도덕하게 취득한 재물의 문제이며, 용모와 행동을 지나치게 꾸미는 위선의 문제이다. 이런 치는, (서양의) 죄책감처럼, 결코 내면적인 상태, 내심의 타락에 대한 혐오, 자기 비하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관련 되어 의미를 갖는) 공적인 지위나 호평과 전혀 관계없이 오직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천박하거나 혹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즉 자기 내심으로부터 나오는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수치심을 도덕적 실재가 아니라 <단순한 겉모습>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이다. 공자의 수치심 개념은 순전한 도덕적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존재의 내적 핵심, 즉 <자아>를 향해 있다기보다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의례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사회적 처신, 즉 예를 중심으로한 도덕성으로 향해 있다. 도덕 질서를 어기는 것은 따라서, 서양의 죄책감의 경우 못지 않게, 공자의 수치심에서도 본질적인 것에 대한 파괴로 간주된다. 개인적인 반응, 도덕적 가치가 혼입된 느낌의 색조가 또한 두 경우 모두에서 핵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느낌을 해석하고 취급하면서 취하는 방향은 두 가지 경우 서로 다르다. 진실로, 죄책감을 갖게 되는 근거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어떤 비도덕적 행위나 배신의 경우라 할지라도 죄책감을 느끼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궁극적으로 죄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다. 수치심은 '체면'의 문제이며, 당혹함의 문제이고 사회적 지위의 문제이다. 수치심은 말한다. <네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을 바꾸어라. 너는 더럽혀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영혼의 병듦>에 대해서, 그것의 <상처>에 대해서, <수렁에 빠져 꼼짝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신에 의해 건져져 씻겨지는 것에 대해서, 영혼이 병들어 기형적으로 된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자를 대충 읽었다 하더라도 <논어>에서는 그런 이미지 혹은 그에 유사한 어떤 분위기조차도 낯설다는 점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논어>에는 도덕적 타락을 암시하는 구절이 두 개 있다. 그것들은 언뜻 보면 곧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숙고된 타락과 유사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한 구절은 재여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공자가 주는 이미지는 오르페우스, 히브리 혹은 기독교의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재여는 조각할 수 없는 썩은 나무이며, 흙손질할 수 없는 마른 똥무더기 담이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왕성한 질병, 즉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울부짖게 만드는 상처는 단순한 무기력,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소극성과 내재적 무감각으로 대체되어 있다. 재여는 기껏해야 도덕적인 인간 존재가 될 능력을 상실한 정도이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는 이미지에서는 타락한 죄의식이 갖는 강도나 역동성은 바로 그의 도덕적 관심과 절박한 개종 (기독교에의 귀의)이 갖는 활력소의 크기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에 관한 <논어>의 두번째 언급은 내심의 병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이 그 자신의 내심을 살펴 보아서 아무런 병든 곳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연히 어떤 근심도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병>의 이미지를 그렇게 사용한 유일한 경우이다. 나는 <병>에 대한 이 고립된 인용을 이때만을 위한 임시 방편적이고 정교화되지 않은 비유, 즉 다른 많은 경우와는 달리 공자 자신의 별반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 비유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비유는 확실히 중심적인 교의에 대한 선언 또는 은유가 아니다. 따라서 (공자 철학에서) 그것의 정확한 논점은 불분명하다. 비록 그 이미지가 우리 (서양인)에게는 매우 친숙하고 또는 우리의 용법에서는 그렇게도 풍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그런 것을 별로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직 검토해야할 또 다른 두 개의 구절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명백하게 <내심을 향한> 방향성과 <자기 견책>을 요구한다. 공자는 한 구절에서 우리에게, 우리가 가치없는 다른 사람들(불현자)을 바라보고 있을때, 우리 자신의 <안>을 들여다 볼 것을 말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스스로의 잘못을 알고서 자신의 내심에 책임을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탄식한다. 내면의 삶에 대하여 우리 (서양인)들이 배경적으로 갖고 있는 풍부한 이미지는, 다시 한번 이런 구절들을 바로 자아의 내면 세계, 죄책감, 혹은 레그가 암시하고 있는, 양심과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서도 공자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간단하고 명백한 증거물로 보게끔 된다.
그러나 12:4(3)에서의 <내심의 병>을 포함해서 <논어> 전체에서 그러한 <내심을 살펴봄>에 대한 언급이 오직 세 군데에서만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공자가 양심이나 죄책감을 언급하였다고 가정하는데에 더욱더 신중할 것을 요구한다. 양심 혹은 죄책감이 어쨌든 명료하게 인식되기만 한다면 그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도덕 생확에 핵심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만약 공자가 어떤 <내적인> 삶을 염두에 두었고 또 그것을 강조하였다면, <논어>의 전체 500여 절 더욱이 그 중 세 번만 그런 것에 대해 언급했단 말인가? 그리고 또한 어째서 그 세 구절마저 그리 모호하고 또 정교하게 다듬어 서술되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는 공자가 다른 관념들, 즉 도, 인, 덕, 예와 같은 관념들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 서술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논어>가 전체적으로 모든 세세한 면에서 주로 도덕을 가르치는 담화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담화는, 다른 무엇도다 먼저 양심, 죄책감 그리고 내심의 삶에 관한 주제를 정교하게 다루게 마련이다.
사실 <내심을 살핀다>라는 이미지를 사용한, 맨 끝의 두 구절에서의 공자의 말은 그가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것과 완전히 합치되는, 전혀 또 다른 맥락으로도 독해될 수 있다. <이인> 4:17에서 공자의 말씀은 가치 있는 사람들처럼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의 시대처럼, 정치적인 내부 투쟁, 사회적인 경쟁, 군사적 충돌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소송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결점을 꼬집어 내어 폭로하며 그렇게 하기를 즐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경향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게 하는 대신 <우리 자신의 속을> 보라고 하였고, <자기 자신을 소송하라>고 가르친. 앞의 말씀은 매우 모호하고 잘 다듬어져 서술되지 않았다. 뒤의 말씀은 극도로 혼란한 공자의 시대라고 하는 그 특정한 그 시대에-공적인 고발이나 송사가 매우 명백하게 논의되던 상황이라는-매우 일상적인 맥락에서 언급되었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 공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눈 속의 가시를 보지 말고 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법정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를 배경으로, 공자가 <공야장> 5:26에서 한 말씀은 또한 예수의 <판단하지 말라>는 말과 유사하다. 그러나 고발, 재판, 판결에 관한 말은 구약과 신약 성서 모두에 두루 나오는 데 반해서 <논어>에서는 전체를 통틀어 여기에서 단지 한 번 도덕적 은유로서 나타난다. 우리 서양인 모두는 또한 이 은유가 도덕적인 삶에 너무나 잘 들어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공자가 단지 한번 그것을 사용하고 곧이어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한번 우리는, 공자의 양심이 체게적으로 우리 (서양)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리잡혔으며 그 비유에서는 오직 임시 방편적이고 (특정 사실과 관련해서) 시사적인 언급만을 한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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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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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4장
5. 제양공의 침략 전쟁
신발 한 짝의 복수
한편 연칭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의심이 생겼다. 그래서 막 궁에다 불을 지를 참이었다.그 때 비가 달려나오며 조용하라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연칭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마치 은밀히 귓속말을 할 것 같은 자세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 가차없이 연칭의 아랫배를 푹 하고 찌르는 것이었다.
"아-앗!"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예리한 단검이 배에 들어가질 않고 튕겨 나오다니.......연칭은 속에 이중으로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놀랐던 연칭은 곧 칼을 뽑아 휘둘렀다.칼날이 번쩍이고 비의 목은 떨어져 땅바닥에 굴렀다. 참으로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막는 놈은 누구든 베어라."
연칭이 소리쳤다. 그러자 병사들은 우르르 궁 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싸움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간단한 경장 차림으로 사냥을 나온 몇 명의 시종들과 국경을 지키다 계획된 반란을 일으켜 습격해 온 단단히 무장한 병사들과의 싸움이 아닌가. 용력(勇力)을 뽐내던 석지분여조차도 변변한 대응 한번 못하고 죽어 버렸다. 연칭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방마다 살펴 화문방장의 침실에까지 들어갔다. 침상에는 비단 도포자락을 둘러쓴 사람이 하나 누워 있었다.
"저 놈이구나!"
큰 소리와 함께 몇 자루의 칼이 비단도포를 찢고 침상에 누워 있는 인물을 찔렀다.
"으-악!"
비명 소리가 터지고 연칭은 불을 밝히라고 지시했다. 조금 후 횃불이 켜졌다. 연칭은 도포를 벗기고 상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부르짖었다.
"이건 수염이 없다. 그 놈이 아니다."
연칭은 사방을 뒤지게 했다.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락이나 구석진 곳을 샅샅이 살펴라."
연칭은 명령한 후 화문방장의 침실을 나오다가 문득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발판이 세워진 앞에 사문구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연칭은 신발이 어찌 한 짝일까 생각하면서 발판을 툭 하고 차서 옆으로 밀었다. 그 곳에 사람의 발이 보였다. 아마 제양공일 것이라고 생각한 연칭이 문고리를 확 잡아당겼다. 음탕 무도한 임금, 제양공은 낮에 넘어졌던 그 다리가 몹시 아파서 잔뜩 쭈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제양공의 발에는 사문구 한 짝이 신겨져 있지 않은가. 그러면 발판 앞에 떨어져 있는 사문구 한 짝은 패구산 언덕에서 잃어버린 그 신발이란 말인가? 연칭은 제양공을 끌어냈다. 그러고는 뜰 아래로 데려가 무릎을 꿇리게 했다. 제양공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일어설 줄을 몰랐다. 연칭이 그를 꾸짖었다.
"이 흉악 무도한 놈, 네 놈이 지은 죄를 알고 있느냐! 우선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싸움만 일삼으니 이제 제나라에는 젊 은이가 씨가 마르고 과부와 어린애 천지가 되었도다. 이는 네 놈이 백성을 사랑하기는 커녕 마치 물건처럼 천대했기 때 문이로다. 그 죄를 스스로 알겠느냐! 그리고 네 놈은 선군의 유명조차 지키지 않았다. 동기간에 화목하라 하셨거늘 무지님을 냉대하고 소백 공자를 국외로 내쫓는 등 패덕한 일을 저질렀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 놈은 여동생과 정을 통 하며 음락하고 끝내는 매부를 살해했다. 이 하늘 아래 네 놈 보다 음탕 무도한 자가 있겠느냐! 그것만이 아니다. 병사를 변방에 내몰고 1년마다 교대시켜 준다 하고서도 지키기는 커녕 자신은 엉뚱하게 해괴한 짓만 하였다. 그리하고도 백성들에게 착하게 살고 신의를 지키라 하겠느냐 이 도적놈아!"
연칭은 추상같이 질책했다.
"백성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동기간에 우애는 커녕 음락이나 즐기는 놈아! 어찌 세상에 임금은 커녕 낯짝을 들고 인간 행세를 하느냐! 내 이제 만백성의 뜻을 헤아려 네 놈의 그 엄청난 죄악을 벌하겠노라."
연칭이 손을 들어 지시하자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제양공을 베고 찌르고 난도질했다. 그리고 뜰에 구덩이를 판 후 여러 시체들과 함께 묻어 버렸다. 이로써 제양공은 군위에 있은 지 5년 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연칭과 관지부는 군사를 정돈하고 임치성으로 향해 행군했다. 이 때 무지는 가병(家兵)을 무장시키고 기다리다가 연칭의 군대가 남문을 통과했다는 기별을 받자 그제서야 나아가 두 장수를 영접하고 함께 궁으로 향했다.
-제아가 무도하면 폐하고 무지를 임금으로 모셔라.-
이러한 선군의 유명이 선포되었다. 물론 뒤늦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무지가 군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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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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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가득히 사랑을 - 노은
내겐 너무 예쁜 아들
보충 수업을 받고 돌아온 재문이가 다짜고짜 나에게 더워 죽겠다고 인상을 박박 긁으면서 짜증을 부린다. "덥지? 진짜 덥지?" 했더니 그 말을 한다고 또 성화다. 안 그래도 더운데 덥다는 소리는 왜 하느냐면서. 책가방을 받아들며 나는 우선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 더위에 주루룩 내리 다섯 시간을 공부하고 왔으니 얼마나 배고플까. 국을 데우고 반찬들을 냉장고에서 꺼내는데, 도 신경질이다.
"밥 지금 안 먹어."
"배 안 고파?"
"지금은 안 먹어."
그러니까 대체 배고프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나도 슬그머니 화가 나서, 반찬 그릇들을 다시 냉장고 속으로 집어 던진다. 나는 그래도 없는 솜씨에 지가 좋아하는 콩나물 국도 끓여 놓고, 얼마나 힘들고 덥고 배고플까 걱정하면서 시원하게 에어컨 켜 놓고 기다렸는데 다짜고짜 신경질을 부려대니까 함께 인상을 박박 긁을 수밖에 없다. 녀석은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에어컨 앞에 터억 버티고 선다. 서있는 뒷모습이 작은 산 하나는 돼 보인다. 언제 저렇게 컸나. 내가 낮잠 자는 동안에 컸을까. 내가 잠시 꽃 향기에 취한 사이에 저만큼?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언제는 앙앙 우는 꼬맹이더니, 한때는 내 무릎에도 닿지 않게 조그맣더니 이제는 안다. 녀석이랑 나란히 서면 고개를 쳐들고 우러러보아야 한다. 엄마 정도는 아주 우습게 아는 당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나는 또 마음이 약해져 냉장고 문을 열고 반찬 그릇들을 주루룩 꺼낸다. 알맞게 익은 깍두기랑 콩자반이랑 치즈 한 조각을 꺼내 놓는다. 계란 프라이도 하고 고기도 볶으며 생각한다. '덩치만 컸지 아직 꼬맹이야. 그러니까 아직도 엄마한테 어리광부리는 거지. 하긴 지가 엄마한테나 짜증부리지 어디 가서 감히 막무가내로 짜증부리겠어. 인상을 박박 긁어대면 세상에 어느 누가 받아 주기나 한대. 하긴 그렇지. 지가 엄마나 만만하게 생각하지 감히 누구를 그러겠어. 만만하게 보라고 가만 있어 주기나 한대.' 이왕이면 시원한 데서 먹으라고 마루 탁자에 반찬 그릇들을 올려 놓고 녀석에게 미소를 건넨다.
"야, 밥 먹어. 날이 더울 때는 잘먹어야 해. 그래야 견딜 수 있어."
녀석이 씨익 웃는다. 나도 따라 웃는다. 녀석이 웃은 이유는 아마도 짜증냈던 게 미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따라 웃은 이유는 내가 한 말이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날이 더울 때는 잘먹어야 견딜 수 있다고 어머니가 내게 했던 소리 그대로니까. 숟가락을 들어 밥 먹는 재문이에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짜증나면 나한테 풀어라. 실컷 풀어. 엄마니까 다 받아 줄게. 엄마 아니면 누가 받아 주겠냐?"
내 말에 녀석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나도 따라 웃는다. 내가 웃는 이유를 녀석은 아마 짐작도 못할 것이다. 내가 웃는 이유는,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했던 철없는 행동들이 생각난 까닭이다. 재문이 못지않게 나도 그랬으니까. 어머니를 만만하게 보고, 때로는 우습게 알고, 마구 짜증내고, 바락바락 신경질도 부리면서 이만큼 자랐으니까. 내가 어머니한테 했던 만큼 재문이에게 당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 내가 한 것에 비하면 내 아들은 착하고 또 착하니까. 짜증부리다가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씨익 웃고 마는 재문이는 내겐 너무 예쁜 아들이다. 토라진 엄마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줄 아는 속 깊은 아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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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3
늘 바다 가까운 하늘에서 떠오르던 해를 보다가 오늘은 동백섬 옆산 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았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 언제라도 가슴이 설렌다. 햇볕이 잘 드는 방에서 사는 고마움. 햇볕은 습기, 곰팡이도 없애 주고 우리에게 밝음, 기쁨을 선사해 준다. 나도 늘상 햇볕 같은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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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nney Lake and Mount Whitehorn near Mount Robson ]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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