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09호
2022.7.17 (음 6.19)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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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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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잘하는 사람은 잊기도 잘하는 법. ― 토마스 풀러(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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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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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 없다
“4시가 뭐냐, 네시라고 써야 한다.” 선생님은 학생을 보면서 꾸짖었다. 말소리에 맞춘 표기가 자연스럽다는 뜻이자, 표기란 그저 말소리를 받아 적는 구실을 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신문에는 ‘7쌍의 부부 중 5쌍은 출산했고, 1쌍은 오는 10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런 기사는 읽기에 껄끄럽다. ‘칠쌍’으로 읽다가 다시 ‘일곱쌍’으로 바꾸어야 한다. 머릿속 전광판에 ‘7(칠)’과 ‘일곱’이 동시에 껌뻑거린다. 문자와 발음이 어긋나 생기는 일이다.
‘하나도 없다, 하나도 모른다’를 ‘1도 없다, 1도 모른다’로 바꿔 말하는 게 유행이다. 표기가 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국어에 서툰 어떤 가수가 ‘뭐라고 했는지 1도 모르겠’다고 쓴 게 발단이었다. ‘1도 없다’는 한자어와 고유어라는 이중체계를 이용한다. 고유어 ‘하나’를 숫자 ‘1’로 적음으로써 새로운 말맛을 만든다. 아라비아숫자를 쓰면 고유어보다 ‘수학적’ 엄밀성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예순두살’이라고 하면 삶의 냄새가 묻어 있는 느낌인데, ‘62세’라고 하면 그냥 특정 지점을 콕 찍어 말하는 느낌이다. 소주 ‘한병씩’보다 ‘각 1병’이라고 하면 그날 술을 대하는 사람의 다부진 각오가 엿보인다. 이 칼럼에 대해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보다 ‘재미가 1도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가 더 갈릴 것 같다.
여하튼 변화는 가끔은 무지에서, 가끔은 재미로 촉발된다. 새로운 표현을 향한 인간의 놀이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미꾸라지가 헤엄치는 웅덩이는 썩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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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의 거짓말?
확실하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 진짜 거짓말은 속이려는 의도가 있고 거기에서 생기는 이익을 본인이 독차지하는 경우다. 학점이 엉터리이고 토익 점수도 낮은 아들 얘기로 그가 얻을 이익은 없다. 레이건은 갖가지 눈먼 예산을 찾아 먹는 ‘복지여왕’이라는 가짜 인물을 만들어 민주당의 복지정책을 비판해 집권까지 했다. 이 정도라야 거짓말이다.
둘째, 재미있자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게 끌고 가기 위해 주인공을 ‘내가 아는 청년’이라고 숨겼다. 의도대로 청중이 인물의 정체를 궁금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꾼이 쓰는 고급 기법이다. 실패와 좌절의 아픔이 깊고 현실과 불화할수록 반전의 맛이 강하다. 재미를 위해 아들 스펙을 낮추었기로서니 비난할 일이 아니다. 점수를 올려 말했어도 거짓말이 아니다.
셋째, 그의 진심이다. 청년 일자리 문제는 특강 시작 5분 만에 나온 주제다. 장장 10분 동안 공들여 대답했다. 그의 해결책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제가 나아져야 일자리가 많아지는데 이 정부가 경제를 망쳤다. 민생투쟁으로 체득한 깨달음이라니 뭐라 하겠는가. 사달은 둘째. 설령 일자리가 많아진들 각자가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실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스펙보다는 특성화된 개인 역량을 길러라.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그의 소신이자 철학이다.
그는 보수파가 가진 정치적 상상력의 최대치이자 모범답안이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마음의 습관. 하지만 멘토의 위로나 꼰대의 지적질이 정치인의 언어일 수 없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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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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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 김수영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잡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몽상을 거듭하기도 피곤해진 밤에는
시골에 사는 나는-
달밝은 밤을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보다
나는 커단 서른아홉살의 중턱에 서서
서슴지않고 꿈을 버린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
<1959.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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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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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약고구(良藥苦口)
/ '효험이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귀에는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出典》'史記' 留侯世家 / '孔子家語' 六本篇
이것은 孔子의 말씀으로《孔子家語》'六本篇',《설원(說苑)》'정간편(正諫篇)'에 실려 있다. 효과가 있는 좋은 약은 입에 넣을 때 쓰고, 사람들에게 듣는 충고는 좋은 말일수록 귀에 들어올 때 거슬린다는 뜻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殷나라 탕왕(湯王)은 곧은 말을 하는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夏나라의 걸왕(桀王)과 殷나라의 주왕(紂王)은 무조건 따르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임금에게 다투는 신하가 없고, 아버지에게 다투는 아들이 없고, 형에게 다투는 동생이 없고, 선비에게 다투는 친구가 없다면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하가 諫해야 하고,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들이 諫해야 하고, 형이 잘못을 저지르면 동생이 諫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친구가 諫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에 위태하고 망하는 징조가 없고, 집안에 패란(悖亂)의 악행도 없고, 부자와 형제에 잘못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孔子曰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湯武以棍棍而昌 桀紂以唯唯而亡 君無爭臣
父無爭子 兄無爭弟 士無爭友 無己過者 未之有也 故曰 君失之 臣得之 父失之 子得之 兄失
之 弟得之 己失之 友得之 是以國無危亡之兆 家無悖亂之惡 父子兄弟無失 而交遊無絶也.
【원 말】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동의어】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간언역어이(諫言逆於耳), 금언역어이(金言逆於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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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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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1장
정확하고 올바른 언어는 단순히 유용한 첨가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예식을 실행시키는 핵심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공자의 유명한 정명론이 단순히 낱말-묘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라거나 전통을 가르치려는 관심에서 나온 공자의 현학적인 노력의 표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또한 <실체>론-또는 플라톤의 이데아, 혹은 그와 유사한 신유학적 개념-을 읽어야 할 어떤 이유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논어>는 그런 원리에 대한 어떤 암시도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대적 철학 원리를 고전의 가르침에서 읽어내는 일에매우 조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글자나 정신 면에서 <논어> 원전은 인간을 예식적존재로 보는 우리 자신들의 최근년에 등장한 관점을 지지하며 풍부하게 해주고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식의 작용과 연관하여 공자는 단순히 현저하게 인간적인 성격을 또한 제시하고 있다.
끝으로 우리는 이제 공자가 신성한 예식을 형성화하여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을 통합하고 그것을 구석구석까지 주입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그 사실을 밝히는 것에 우리 분석의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아마도 현대의 서구인이라면, <몸으로 비워 익힌 관습과 언어를 이지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일>을 말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이지적 실천은 (서구적) 시속에 맞는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고리(한계)를 가지게 된다. 사실 현대 분석 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즉 가치 중립적, 과학적으로) 말을 하여 상식을 지키며 (그 이상의 언급은) 삼가는 편이다. 그러나 이럽게 해서는 공자의 중추적 이미지가 성취했던 그런 것을 얻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거룩한 예를 인간 존재의 비유로 형상화시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존재 속의 신성한 차원에 눈을 돌리게 된다. 거룩한 예가 그 거룩함의 절정에 달해서는 여러가지 차원을 갖게 된다. 예는 사회적 형식의 조화와 아름다움, 인간 상호 관계의 내재적이고 궁극적인 존엄성만을 강하게 나타내어 주는 것만은 아니다. 예식은 또한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 타인과 함께 예 안에서 (무리와 충돌 없이) 자유스럽게 공동 참여(활동)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내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함축되는 도덕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좀더 나아가 말하자면, 예식을 따라 하는 행위는 타인(또는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방)에게도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식은 공개적이고, 공동 참여적이며, (따라서 누구에게나) 명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식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비밀스럽고, 요령 부득이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거나, 아니면 독재적 폭력에 의한 강제성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자기와 같은 타인(상대방)들과 함께 어울려 이러한 예식에 아름답고 근엄한 공개적인 참여릎 통하여 인간은 자기 인격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완전한 공동 생활-그리스도교의 형제애와 유사한 유교적 대비-은 신성존경과 불가분한 한 부분이라는 주요한 면모, 다시 말해 예수 가르침의 중추적 계율과 맞먹는 유사성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좁은 근원적 의미에서 신성한 예식은 인간의 현세 ㅅ활 밖에 있는 정신적 존재(혼령)들을 전적으로 신비스럽게 위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공자는, 당연한 추론이지만, 우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였다. 정신은 더 이상 예식에 의해 감응을 받은 외재적 존재가 아니다. 정신은 예식 안에서 표현되며 그 안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인간의 현세 영역에서 다른 초월적 세계로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키지 않고서, (인간은 누구나 공개적으로 거룩한 예식을 올림으로써) 그 거룩함의 내용을 참된 인간 존재의 차원으로 표현하며 (동시에 그 참된 인간 존재의차원에 몸소) 참여한다는 양방면에서 바로 공개적인 거룩한 예식은 (인간 존재의) 중추적 상징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명백히 거룩한 예는 이렇게 도를 인간 문명 속에, 보다 포괄적이고 이상적이며 전면적인 예식의 조화를 통하여, 완전하게 체현해 내는 찬란한 중심점이 되는 것이다. 인간 생활은 그 전체면에 있어서 마침내 하나의 광대하고, 자발적이며 거룩한 예, 즉 (신성스런 예식에 공동 참여를 통하여 사람들과 사람들이 서로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융합해 나가는) 인간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궁극적인 관심>이었다. (원자적으로 각기 고립되고 자기 완결적인) 개개 인간들의 삶 자체보다 더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점이라고 공자께서는 거듭거듭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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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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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4장
소백과 포숙아 도망치다
한편 소백은 궁에서 나와 곧 포숙아에게로 갔다. 소백이 궁중에서 있었던 일을 포숙아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쯤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했는지도 모른다."
포숙아는 소백의 초조함을 이해했다. 포숙아는 생각했다. '제양공은 예측 불허. 언제 기분이 뒤집혀 소백을 죽이라고 명령할지 모른다.'
"일단 오늘밤은 부중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언제라도 피할 수 있게끔 간단한 행장 정도는 갖추십시오. 제가 친구들을 통하여 은밀히 알아보겠습니다."
소백은 포숙아의 말대로 그의 부중으로 가서 간단한 행장을 갖췄다. 포숙아는 소백을 전송하고 나서는 곧 관중의 집으로 달려 갔다.
"아무래도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
관중은 느닷없는 말에 멍한 표정을 보였다. 포숙아는 앞서 있었던 소백의 이야기를 전했다.
"흠, 일단은 대비해야겠구먼."
관중도 불안한 기색이었다.
"제후의 심리가 극도로 불안정한 때이니만큼 우선 도피할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군."
"자네 생각도......."
포숙아는 관중의 판단을 항상 믿어 왔다. 그 관중마저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임을 알자 결심을 더욱 굳게 다지고는 물었다.
"도망친다면 어느 나라가 좋을까?"
"큰 나라보다는 작은 나라가 좋을 거야. 참, 소백 공자의 외가가 거나라 아닌가. 그 곳이라면 거리도 멀지 않아서 연락하기도 쉽고...... 여러 모로 편리할 걸세."
포숙아가 물었다.
"오늘밤 떠나 버릴까?"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군.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 결심이 섰으면 빨리 행동에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포숙아는 장차 관중과의 연락 방법 등을 정하고, 서둘러 준비를 갖춘 후 소백의 부중으로 갔다.소백은 행장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망쳐야겠지." 찾아온 포숙아를 보자 소백은 결론을 물었다.
"첫닭이 울고 성문이 열리면 그 때 나서지요. 장사꾼차림을 하면 몰라 볼 것입니다."
포숙아가 대답했다.
"어디로 도망치지?"
"공자님 외가인 거나라가 적합하지요."
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한번 행장을 점검하고 몇 사람의 심복에게만 귀뜸한 후 새벽 첫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소백은 따로 심복 하인을 불러 한 장의 서찰을 내주며 분부했다.
"오늘이거나 아니면 이삼 일 안으로 궁에서 군대를 거느린 장수가 올 것이다. 그에게 전하거라."
하인이 절하고 물러나자 소백이 포숙아에게 설명했다.
"제아 형님에게 보내는 것이야."
궁에서 아침 조회 시간이 끝나자마자 제양공은 맹양을 곁으로 불러서 분부했다.
"과인이 밤새 궁리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소백과 포숙아란 자부터 잡아 옥에 가두는 게 좋을 듯하다. 곧 실행에 옮기어라."
맹양도 다른 말 하기가 뭣했다. '자칫 소백이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그래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잠시 우물쭈물했다. 그 때였다.
"소백의 죄는 마땅히 잡아 가두고 다스려야 합니다."
이렇게 큰소리로 외치는 자가 있었다. 대부 연칭(連稱)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야심이 많으나 재주가 신통치 않은 인물이었자만 다행히 내궁의 연비(連妃) 사촌 오빠가 되어 제궁에 출사하고 있었다. 제양공은 연칭말을 듣더니 그를 곁으로 불러 병부를 내주고 단단히 분부했다.
"곧 일지 군을 거느리고 가서 소백과 포숙아 일당을 모조리 잡아오너라."
연칭은 나는 듯이 소백의 부중으로 갔다. 그러나 소백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소백 공자께서는 오늘 새벽에 어디론가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궁에서 오신 장수께 이 서찰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문지기가 서찰을 바쳤다. 연칭이 서찰을 받아 보니, '소백이 재배하고 서(書)를 형후 전하(兄侯殿下)께 바치나이다.' 하고 씌어 있었다. 연칭은 서찰을 품안에 갈무리하고 남문 쪽 주점으로 갔다. 포숙아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포숙아도 달아나고 없었다. 그의 가게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당분간 휴업이라는 쪽지 한 장만 덩그랗게 붙어 있었다. 연칭은 그 가게를 때려부수어 화풀이하고 궁으로 돌아가 제양공에게 복명했다.
"공자 소백이 도망치면서 서찰을 주공께 남겨 놓았더이다."
연칭이 서찰을 꺼내 바쳤다. 제양공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했다. 그러나 소백과 포숙아가 이미 도망친 마당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양공은 서찰을 받아 읽었다.
우리 형제와 누님들이 음탕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이제는 얼굴조차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왕희와 관계를 돈독히 하시고 모범을 보이시면 지나간 허물을 덮을 수 있습니다. 문강 누님과의 교류도 아예 끊으십시오. 출가하면 외인입니다. 어찌 그런 법도를 안 지키는지 소백은 답답합니다. 저는 이제 멀리 떠납니다. 장차 제나라를 걱정하면서 급히 몇 자 적습니다.
제양공은 서찰을 내팽개치더니 맹양을 노려보고 불쾌한 한마디를 던지고는 휑하니 일어나서 내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물쭈물하더니 꼴 좋게 되었다."
맹양은 화가 났다. 연칭을 향해 화풀이하듯 말했다.
"그대는 소백의 뒤를 추격해 보지도 않고 어찌 멀리 도망 쳤다고 아뢰는 것이오. 그리고 소백의 부중 문지기의 말을 전하려면 문지기를 부를 일이지 공연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 서 소란을 피우는 건 무엇이오."
연칭은 대꾸할 말이 없어 묵묵부답 멍하니 서 있었다. 맹양은 그런 연칭이 더욱 밉살스러웠다. "나설 일이 있고 나서지 않을 일이 따로 있는 것이오. 연부도 처신하는데 좀 신중해야겠소이다."
맹양은 연칭을 면박을 주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연칭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맹양 이 놈, 기회가 오면 오늘의 이 업신여김을 열배 백배로 갚아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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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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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가득히 사랑을 - 노은
첫눈 여행
날씨가 차가워지면 불현듯 감미로운 추억이 그리워진다.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고 약속한 추억 속의 연인 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준비한다. 집안 가득히 추억 한 자락처럼 번지는 진한 커피 향내에 취하여 아끼는 찻잔을 꺼내 놓는다. "엄마, 커피?" 코끝을 찡긋거리며 재문이가 다가와 속삭인다. "그럼, 난 코코아 한 잔." 그러고는 귀여운 동물 왕국이 그려진 머그잔을 나란히 내놓는다. "생각나니?" "응." 고개를 끄덕이며 재문이가 덧붙인다. "첫눈, 수안보 그리고 엄마 아빠 찻잔이랑 내 머그잔." 첫눈이라고 말 할 때 재문이의 눈망울이 반짝 빛난다. 그 까만 눈망울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추억으로 나부끼며 넘실댄다. 재문이는 코코아를, 그리고 나는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내다본다. 창 밖은 음울하다. 금방이라도 첫눈이 내릴 것만 같다. "첫눈이 올 것 같구나." "정말 첫눈이 올 것 같애." 우리는 마주보고 웃는다.
어느 해 겨울, 꼬맹이 아빠가 주말여행을 제의했다. 제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고였다. 호텔 예약까지 돼 있었으므로 우리는 간단히 가방 하나만 꾸려 들고 길을 나섰다. 토요일 오후,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는데, 재문이가 소리쳤다. "눈이야, 눈이 온다." 그랬다. 뜻밖의 선물처럼 한 송이 두 송이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우리가 여행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발이 굵어지더니 이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첫눈, 그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단어인가. 그것은 나부끼는 기쁨이고 쏟아지는 축복이었다. 우리는 첫눈 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감미로운 첫눈 여행이었다. 겨울산과 들판은 금새 흰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를 반겼다. 슬그머니 돌아갈 걱정이 솟아오르기도 하였지만, 내일의 걱정보다는 눈앞의 기쁨이 더 컸다. 호텔은 언덕 위에 있었다. 우리는 입구에 차를 세워 놓고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되자 기온이 떨어져 눈 쌓인 언덕은 그대로 빙판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푸짐한 첫눈 덕분에 수안보는 눈 속에 따스히 파묻힌 하얀 나라가 되어 있었다. 언덕 위에 있는 호텔에서 내려다본 하얀 겨울 풍경은 적막하고 아름다웠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눈 속에서 재문이는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간단히 꾸린 가방 속에는 털모자도 털장갑도 없었으므로, 손님들의 젖은 우산을 넣기 위해 호텔 현관에 놓여 있는 길다란 비닐 봉지를 장갑 대신 손에 감아쥐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무도 우체통도 흰빛으로 변해 가는 하얀 나라에서 나는 깨달았다.
고립감이나 소외감마저도 때로는 축복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방은 이층이었는데, 창 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리고 발코니에 꽂혀있는 만국기들이 무한정한 그리움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쌔근쌔근 잠이 든 꼬맹이의 볼은 얼었다 녹으며 발그레하니 빛나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눈싸움을 하는지 종종 두 손을 휘젓는 재문이를 바라보며, 눈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며 나는 잠들지 못했다. 첫눈 여행의 감동이 내 안에서 무수한 이야기가 되어 눈송이처럼 나풀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우리는 호텔 안에 마련된 도자기 전시장에 들렀다. 두고두고 아름다운 첫눈 여행의 기쁨을 추억하기 위하여 장미가 그려진 부부 찻잔과 재문이의 머그잔을 샀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바로 그 추억의 장미 찻잔에 첫눈 향기 그윽한 커피를, 우리 꼬맹이는 뜨거운 코코아 한잔을 마시고 있다. 첫눈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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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센트 반 고흐 작 "프로방스의 추수". ]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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