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여백
3. 시지푸스의 행복
정명론: 편견으로부터의 해방
만일 어떤 이가 인간을 '개'로, 개를 '인간'으로 부르게 되어 인간을 보고 '보신탕' 생각을 할 수 있고, 개를 보고 절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큰일이다. 적잖은 문제가 이름을 잘못 사용한 데서 생긴다면, 이천오백 년 전 공자의 정명론(바를 정, 이름 명, 말할 론)대로 "필야정명(반드시 필, 어조사 야, 바를 정, 이름 명)," 즉 무엇보다도 먼저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명불정(이름 명, 아니 불, 바를 정) 즉언불순(곧 즉, 말씀 언, 아니 불, 순할 순) 즉사불성(곧 즉, 일 사, 아니 불, 이룰 성)," 즉 "이름을 바로잡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명(바를 정, 이름 명)이란 "군군(임금 군, 임금 군), 신신(신하 신, 신하 신), 자자(아들 자, 아들 자)," 즉 "군왕은 군왕으로, 신하는 신하로, 아버지는 아버지로, 아들은 아들로 부름"을 뜻한다. 인간을 '개'라 부르지 말고, '인간'이라 부르고 개에게는 '인간'이란 이름이 아니라 '개'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두 낱말의 관계는 포괄적인 경우와 배타적인 경우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동물의 범주에 속하므로 '인간'이라는 이름과 '동물'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이름의 관계는 포괄적이다. 반면 '인간'이라는 이름과 '개'라는 이름의 관계는 배타적이다. 인간에게 '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으며 개를 '인간'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개'로 부르거나 개를 '인간'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두 낱말간에 배타적 관계와 포괄적 관계를 착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명(바를 정, 이름 명)은 이런 논리적 관계의 명석한 파악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인간'과 '개'라는 두 개념의 논리적 관계가 배타적임을 이해할 때, 그것들은 포괄적으로 사용하여 인간을 '개'라 부르고, 개에게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또한 '동물'과 '인간'이라는 두 개념의 논리적 관계가 포괄적이라는 것을 파악했을 때, 그것들을 배타적으로 사용하여 '인간'이 '동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카톨릭'이라는 말의 의미와 '기독교'라는 말의 의미의 논리적 관계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배타적이 아니라 포괄적이다. 모든 기독교도가 반드시 카톨릭이 아니라는 점에서 두 낱말은 뜻이 똑같지 않지만, '카톨릭'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기독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두 낱말의 관계는 포괄적이다. '기독교'라는 말과 배타적 관계를 갖는 개념은 가령 '유태교' 혹은 '불교'라는 개념이지 '카톨릭'이라는 말은 아니며, '카톨릭'이라는 말과 배타적인 개념은 가령 '개신교' '그리스 정교' 혹은 '러시아 정교'일 뿐이지 '기독교'는 아니다. '인간'과 '개'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나 '개신교'와 '카톨릭'의 관계가 배타적인데 반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카톨릭'과 '기독교'의 관계는 분명히 포괄적이다. 언제부터인가 어떤 이들이 '기독교'라는 말과 '카톨릭'이라는 말을 서로 배타적인 뜻으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 듣고 나는 놀랐다. 무식해서가 아니다. 나는 서울의 주요 신문 기사에서 그런 사용법을 읽고, 국영 TV 뉴스에서도 그렇게 사용한 것을 들었을 때 그만 아연했다. 그러나 기독교와 카톨릭의 이 같은 대립적 용법이 잘못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카톨릭'과 '기독교'라는 두 개념의 혼동은 정명론에 어긋난다. 정명론에 위배되는 예는 허다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디푸스 왕은 국왕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왕좌에 올라 어머니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 끔찍한, 도덕적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겪었다. 그것은 그가 어머니를 '어머니'라는 제 이름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외교 정책 문제와 당시 한국이 경험했던 민족적 비극의 원인은 서양인들을 '서양인'으로, 일본인들을 '일본인'으로 보지 않고 '짐승 같은 서양 오랑캐'와 '섬나라 야만인'이란 이름으로 잘못 붙였던 데 있다. 독재자 김일성을 '위대한 영도자'라는 이름으로, 김일성 부자의 독재 정당화를 '주체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탄압과 빈곤에 허덕이는 북한을 '이상적 사회'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러한 호칭이 문제를 낳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정명론에 맞지 않게 '카톨릭'이라는 이름과 '기독교'라는 이름의 혼동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도 기독교의 한 파인 카톨릭을 '기독교'로, 김일성을 '독재자'로, 주체 사상을 '김일성 권력 체제의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이든 아니든, 알든 모르든간에 개를 '개'가 아니라 '여우'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잔인한 행위가 악이라는 사실을 '잔인한 행위가 악이다'라는 '명제'로 불러서는 안 되고 대신 '잔인한 행위는 선하다'라는 명제로 불러야 한다고 우기는 이들이 언제나 우리 주변에 적잖게 있다. 대부분의 경우 진리 왜곡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잘못된 욕망, 비판되지 않은 편견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산을 '산'이라는 이름으로 개를 '개'라는 이름으로 악을 '악'이라는 이름으로, 도둑을 '도둑'이라는 명칭으로 분명히 부르고, 옳은 것을 '옳은 것'이라는 명제로 파악하고, 그에 따라 옳게 살기 위해서 우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여러 신념들, 사유의 논리를 모든 종류의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요청은 여러 측면에서 혼탁한 오늘의 문명 속에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이천오백 년 전 공자가 가르친 정명론은 오늘날 어느 때보다도 더 옳고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