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3 - 최명희
15. 가슴애피(7/7-1)
강태는 사기처럼 차갑고 단단한, 창백한 얼굴에 푸른 빛을 띠면 강모를 쏘아본다. 입귀가 아까처럼 칼끝 같아진다. 상 위에 놓인 술잔을 잡은 손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연, 진정한 평등 사회가 이 땅 위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이상에 불과합니다. 하찮은 미물 곤충도 강한 놈은 약한 놈을 잡아먹습니다. 물론 사력을 다하여 강적과 싸워 내는 놈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은 그 한순간에 불과한 것, 한 번은 이기겠지만 돌아서면 다른 놈한테 결국 잡혀먹힙니다. 하다못해 잡초, 들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그렇지요. 번식력이 강하고 뿌리가 억센 놈은 생명력이 약한 풀뿌리를 죽게 합니다. 약한놈이 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연이고 인간 사회고, 약한 놈은 학대받아야 합니다.학대받고 일찍이 죽어야 한다고요...곤충, 미물, 잡초의 생리마저도 이러한데, 하물며 인간에 이르러 무슨 말을 더 합니까?”
“그렇지 않다.”
강태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어서 일어서자고 하던 때와는 달리 그는 차갑게 말꼬리를 내린다. 그의 말꼬리에 묻은 찬 기운이 시리다.
“너는 혁명의 아름다움을 아느냐?”
강태는 바늘 같은 눈빛으로 묻는다. 반대로 강모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퍼져 오른다. 그는 지금 알 수 없는 열기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꿈꾸고 있는 세계는 나를 설레게 한다. 그것은 과거의 모반같은 것이 아니지. 지난날의 반란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가 달성한 것, 말하자면 옛 권력층에 대한 새로운 권력층을 형성한 것이었어. 허나, 오늘날 우리의 혁명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대다수를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명제이다.”
“과연 거기서 형님의 역할은 무업니까? 지도자를 따르는 민중입니까? 민중을 지도하는 지도잡니까?”
“나는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기르고 있는 중이다.”
“거 보십시오. 벌써 형님은 하나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평등을 목표한다는 형님의 이론에서도 민중과 지도자라는 구분이 생길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명칭이고 역할일 뿐이지. 우리는 모두 동지야.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해방하고 전 민중을 해방한다. 그 해방을 통해서만, 인류 사회는 비로소 착취 없는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거다.”
“착취, 착취, 도대체 착취가 아닌 관계도 있을 게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렇게 극단적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집안의 할머니도 착취자란 말씀인가요?”
“그렇지.”
“뭐어요? 형님.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물론이다.”
“아닙니다, 형님.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할머니도 처음에는 빈손이셨습니다. 당신혼자 힘으로 그 재산을 이루신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는 훨씬 지독한 착취를 하신 거다. 교묘한 방법으로, 전혀 눈치채이지 않게, 한쪽으로는 덕을 베푸는 척하면서, 소작인으로부터 빨아들일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재산까지라도 흘리지 않고 악착같이 빨아들인 거지.”
“아니, 형님. 진정으로 하는 말쓰이시오?”
“봐라, 강모야, 물물 교환이라는 직접적 교환 방식으로 살아왔던 원시 시절에는, 필요한 물건과 물건을 바꾸는데 거기에 이윤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 교환 방식은 정직하고 평등한 관계였지. 거기서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보다 이익을 보는 일이란 없다. 물론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 동등하게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바꾸어 가졌어. 그런데 말이야. 자본주의적 본질은 그게 아니야. 돈에서부터 시작하여 돈을 얻게 되는데, 처음에 가졌던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으로 거래는 끝나지. 왜 사람이 교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지지 않았던 것을 획득하게 된단 말인가? 적어도 어떻게, 처음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이 획득할 수 있게 되는가? 이상하지 않으냐, 도깨비놀음도 아니고, 너 그 이윤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지? 요술인가? 환각인가. 아니야. 결국 자본가에게 노동자가 자기의 몫을 터무니없이 빼앗기고 있는것이다. 그러니까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주어야 할 몫을, 즉 돈을 빼앗고 있는 것이지. 노당자나 농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가 되겠지만, 이 사람들은 오직 노동력 하나가 전 재산인 사람들이야. 그런데 이노동력이 자본가의 자본, 즉 임금과 정당한 물물 교환이 안되고 있는 거다. 노동자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 일한 노동력 전부에 대하여 원시 사회의 물물 교환처럼 올바르게 보상받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몇 시간 몫어치만을 임금으로 받고 만다. 나머지의 노동 시간은 보상받지 못해, 그러니까 그 나머지 잉여 노동 가치는, 모두 기업가나 자본가, 혹은 지주가 갖게 되는 거지. 말하자면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극히 일부분만을 값으로 받는 셈인데, 자신의 나머지 노동, 거의 대부분의 노동은 고용주가 차지하게 될 잉여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 바치는 것이다. 할머니와 소작인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어.“
강모는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큰일날 말씀입니다.”
“아니다. 할머니가 생전에 이루신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이, 뒤집어 말하면 소작인들에게서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고 그악스레 긁어 모았다는 증명밖에 더 되겠어? 정당한 물물 교환으로 할머니와 소작인이 서로 평등하게 이익을 나누었다면, 도저히 그런 재산을 모을수가 없는 일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으냐? 그 양반은, 지주로서의 특권과 횡포를 최대한으로 누리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
“형님은 그렇게도 할머니를 증오하십니까?”
강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쥐고만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마셨다. 뒤로 젖힌 그의 턱과 목으로 흐르는 선이 날카롭다.
“봄에 꾸어 먹은 곡식을 가을에 이자 붙여 갚는 환자야, 나라에서도 다 행하는 상례법이었습니다. 없는 사람이 긴요히 쓸 때 빌려주고 나중에 가을 걷어 받는 것이 무어 잘못입니까? 전고에 조선의 숙종 임금 6년, 남원부사로 부임한 조위유는 백성들이 여러 가지 역사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갖은 애를 다 써서 처음으로 보민청이라는 기관을 세우고, 말 오십 필을 준비 했다고 합니다. 모든 관용 물자 수송에 이용하려는 것이었지요. 말 그대로 백성이 괴로움을 덜어 주고 도와 주는 곳이라, 이것이 생긱 후로 백성들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곳까지 나르는 노역이 없어져, 조부사의 선정을 높이 치하했다지 않습니까?”
허나 이렇게 편리한 기관도 기본 재산이 없어, 이를 계속 유지 운영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조부사는 논 오십 마지기를 사들여서 보민청 기본 재산으로 삼고, 그 소작료나 이자 수입으로는 본청 운영을 했던 것입니다. 허나 세월이 갈수록 쓰임새가 늘어나 자금이 모자라니, 후에 영조 33년에 부임한 부사 이인석이 다시 논 사십 마지기를 마련해서, 같은 방법으로 활용해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지 않았습니까? 그 증식의 과정에서도 장리는 쓰인 방법이에요.”
강모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할머니 청암부인이 남도 아닌 종손자 강태한테 이처럼 여지없이 매도당하는 것이, 마치 자기 탓이기나 한 것 같아, 그는 단호히 반론을 편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그 조부사가 세운 사객청만 보아도 증거는 분명합니다.”
사객청은 손님 맞는 일을 치르는 관청이었다. 남원도호부는 직할 구역 48방 이외에 남원을 에워싸고 있는 1부.1군.9현, 즉 담양부와 순창군, 그리고 임실.무주.곡성.진안.용담.옥과.운봉.창평.장수의 아홉 개 현을 관할하여, 그 규모가 가히 호남의 웅도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용성관은 날마다 공무를 띠고 분주히 드나드는 높고 낮은 관원들을 접대하느라 북적북적 붐비었으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내방객들 치다꺼리에 관수미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 산더미같이 밥을 해도 빈 숟가락 돌리기가 일쑤였다. 따라서 자연히 부성엥서 밥술이나 먹고 사는 집의 신세를 자주 지게 되니,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보민청을 세운 조위유 부사는 궁리 끝에 백성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손님들을 전담하여 대접하는 사객청을 세웠던 것이다.
“허나, 비용 없이 이런 일을 어떻게 꾸준히 행할 수 있겠습니까? 조부사는 백미 백 석을 사객청 기본 재산으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사객청에서는 이 쌀을 가지고, 춘궁기에 아쉬운 사람한테 빌려 주었다가 약간의 이식을 붙여서 가을에는 거두어들였던 것입니다. 그 수입 가지고 모든 내객들 접대하는 비용을 했던 게지요. 이로 인해서 출장 관원들의 관폐와 민폐는 크게 덜어져 백성들이 환호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조부사의 운영 방법이 대단히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원부성 부민들이 조부사의 선정을 칭송하며, 길이 잊지 않으려고 송덕비를 아로새겨, 광한루 한복판에 우뚝 세워 놓은 것 아닙니까? 형님도 보셨지요?”
영세불망. 할머님께서도 마찬가지시지요.
“흥, 송덕비? 그것은 대체로 끔찍한 허위다. 너는 남원부사 조위유만알고, 고부군수 조병갑은 모르느냐? 탐관오리. 그는 고종 30년에 훙년이 들자 농민들한테 강제로 세를 징수하는데, 부유한 농민들을 무참히 잡아들여 온갖 죄목을 씌워서 이만여 냥 재물을 빼앗았으며, 태인현감을 지낸 제 아비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백성의 피와 기름을 짜내 천여 냥 돈을 거두기도 했다. 만석보에 관한 일이며 전봉준까지는 이야기를 끌고 갈 필요도 없어, 저 즐비한 똥막대기, 비석거리, 그것은 진부한 위선의 행렬이며 압제의 사열이다. 인민의 이름으로 세웠다는 그 송덕비에 적힌 노래, 그래, 덕을 노래한 그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인민은 과연 몇이나 될까? 대개는 단 한 자도 읽지 못한다. 모른다. 눈끔쩍이 까막눈. 그렇다면 과연 저 번쩍이는 비석은 누구 보라고 누가 세운 것인가. 우스운 일이지. 우리는 이것부터 부셔야 한다.”
강태의 관자놀이에 푸른 힘줄이 뻗친다. 불빛을 받은 힘줄의 그림자가 꿈틀한다. 그러나 강모도 지지 않는다.
“형님, 하나 물읍시다. 도대체, 더 좋으면 누구를 위해서, 더 나쁘면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나는 다만 혁명을 통해서 평등 사회를 이루고 싶을 뿐이야.”
“형님, 그렇다면 혁명을 하십시오. 부디 찬란한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그래서 이상을 실현하세요. 그러나 이제 두고 보십시오. 당신들은 새로운 권력자들이 될 테니까. 옛날의 권력자들은 자기의 이름으로 자기 권력을 행사했지만, 형님, 이제 당신들은 민중의 이름으로 당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게 될 겁니다. 악순환이에요. 그래서, 존재는 끝없는 갈등이올시다.”
강모의 얼굴이 슬프게 기울어졌다. 희미한 촉광의 전등 불빛이 강모의 검은 얼굴을 쓰다듬듯이 흘러내린다. 옆방의 손님들이 와글와글 떠들면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린다. 뒤딸라서 젊은 여자들의 아양스러운 인사말이 끈끈하게 묻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에서 부연 분냄새가 풍긴다. 누가 어떻게 하는지 몸을 꼬아 틀며 터뜨리는 웃음 소리가 터진다. 취한 남자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곁들여지며 바깥은 더욱 어지러워진다.
“형님, 이 세상은 꼭 그렇게, 압제자, 피압제자, 이런 것들로만 되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중간 집단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아닌... 중인 계급 말씀이요. 관리나 소시민들, 상인, 자영 농민들. 우리 집안에서만도 오류골숙부님 같으신 분은 자본 지주도 아니고 농노도 아니올시다. 당신 인생을 말없이 살고 계신 어른 아닙니까? 욕심도 없고 획책도 없고...빼앗지도 않고, 빼앗기지도 않고...순리대로 나서 순리대로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사람 사는 모습이 저마다 다른데, 어찌 그렇게 칼로 배어내듯이 이쪽 아니면 저쪽일 수가 있단 말이요...? 형님 속에도 가진 자로서의 근성이 있고, 내 속에도 터져 버리고 싶은, 무엇인가를 일으키고 싶은 억눌린 피가 고여 있습니다. 허나, 나는 어느 쪽도 아니올시다. 구경꾼이에요. 나는 이렇게 한평생 기웃거리다가 죽을 겁니다.“
“네가 그러고 있는 동안, 이빨이 칼날이 되도록 시퍼렇게 갈고 있는 놈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두록 해라.”
“그게 누굽니까?”
“춘복이.”
“춘복이요? 거멍굴 농막에 사는...?”
“그놈을 유심히 보아 두는 것이 좋을 게다. 무슨 일을 내도 단단히 낼 놈이지. 그놈이 일을 내게끔 세상은 변하고 있고.”
강태는 웬일인지 그 말을 하고 나서는 무섭게 입을 다무어 버렸다.
“나는.”
그러더니 그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떠나려고 한다.”
“?”
“떠나겠다. 아버지 체면으로 부청에 좀 다니기는 했다마는, 내가 이청춘에 왜놈들 공출 심부름으로 세월을 보낼 수가 있겠느냐.”
“그럼, 부청 일은 정리를 하신 건가요?”
강태는 고개를 끄덕 했다.
“곧 가십니까?”
“응.”
“수천 숙부님도 허락을 하시고요?”
“아버지는 모르고 계시지.”
“그럼?”
“그냥 가는 거다. 혼자 떠나는 거야.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것이 무언지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어. 허나 아버지와 내 인생은 별개의 것이다. 사는 방식이 달라. 아버지는 협의원에 선출도 되시고 일본 시찰도 다녀오셨다. 그리고 면의 행정에도 참여하시면서, 어쩌든지 당신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하고 계시는 것을 내 잘 알지. 그 내막도 있다. 호별세 오 원 이상 납부자, 다액 납세자의 명단에 오른 것을 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셨지. 이제는 됐다고가지 말씀하셨지만,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다액 납세자가 되셨는지도 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가난했었거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에는 어긋나겠지만그 양반은 한 마디로 거간이지. 큰집 살림을 등에 업고, 큰집 사랑과 마름 사이를 오가며한 가마씩 남기기 시작한 거간 노릇을 이날까지 해온 거야. 날이 갈수록 규모를 늘려 가겠지. 아마 큰집 율촌백부님께서도 다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손해 끼치지 않는 한도에서, 구전 주는 셈치고 눈감아 주셨을 게다. 그렇게 살아오신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냐? 어쩔 수 없이 부청 말단 직원 노릇 좀 했다마는 이제는 내 뜻대로 살아 볼 것이다. 네 말마따나 투사가 될 사내가 칠십 평생을 다 살 수 있을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또 이씨 문중 남자들, 수못한다면, 그피가 내겐들 흐르지 않겠느냐...오래오래 비루한 행복에 빌붙어 사느니 피가 우는 대로 살아 볼 생각이다.“
강태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강모의 머리 속에는 강태의 아내인 새터댁의 동그스름한 얼굴과 그의 아들 희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기표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의 눈빛에 번쩍 날이 선다. 까닭없이 그를 대하면 경계심이 앞서고, 사갈처럼 소름이 일던 기표의 눈빛이 강모의 감슴에 와서 꽂혔다. 그리고, 느닷없이 귀청을 찢으며 터져 나오던 희재의 울음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재작년 여름이었던가 중문간 마당에서 흙으로 담을 두르고 놀면서 산더미를 쌓듯이 흙더미를 쌓아 올리던 희재의 작은 손.
"아아따. 그만 우시요오. 이것이 참말로 곡석이고 참말로 황금이간디요오...이렁 거는 다 흙이요, 흐윽. 이께잇 노무 흙데미, 내가 산에 가서 바지게로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지어다가 부서 디리께요. 천지에 쌔고 쌨는 거이 흙인디요. 이렁 거는 다 장난으로 집 짓고 노는 거이제 참말로 이거이 노적이고 살림살이 간디요오. 장난이제에. 이렁 거는 다 흙이요오, 흙. 아아따아, 울지 마시요오."
새끼머슴 붙들이의 목소리도 들린다. 검은 지붕에 그물처럼 엉키어 있던 암키와 수키와의 골짝기와, 그 지붕에 서리 틀고 앉아서 탐욕스러운 대가리를 공중으로 치켜 올린 용마루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강모를 덮어씌운다. 순간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에 그는 소스라친다. 기왓장이 이마를 정통으로 때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왓장이 아니라 이기채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던진 퇴침이었다. 그때 강모는 이기채가 던진 퇴침을 용케 피하였으나, 그것이 자기 귀밑을 스치고 날아가 차탁자를 후려치던 것을 지우지 못하였다. 퇴침에 맞은 차탁자에서, 다기들이 와르르 쏟아지며 박살나던 소리는 쉽게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 소리는 바이올린이 부서지며 지르던 비명과 흡사하였다. 아아, 나는 떠나고 싶었다. 음악을 공부하러 동경으로 가고 싶었다. 아니다. 굳이 그렇지 않았더라도 나는 다만 어디로든지 떠나고만 싶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에 눌리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말았던가.
그림자. 신혼의방, 일렁거리는 촛불빛을 받으며 현란한 꽃밭처럼 오색이 영롱하던 효원의 화관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큰비녀와 도투락댕기를 드리운 그네의 그림자가 벽에 비치어 커다랗게 드리워진 것을 보고 덜컥 겁이 났었지. 그때 먹은 겁은 이상하게도 얼른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무서워졌어...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혹시 그 사람한테서 할머니의 눈매에 서려 있던 서리를 본 것은 아니었을까? 할머니의 서리. 그 허연 서리. 청암부인. 강모는 흐윽, 숨이 막힌다. 베개 밑 명주 수건에 싸여 있던 삼백 원이야말로 나의 발목을 비끄러맨 동아줄이 아닌가. 할머니는 생전에 한번도 나를 꾸짖으신 일 없고, 매를 때리신 일이 없는데, 나는 왜 그렇게도 할머니가 어려웠던가.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고, 나가라 하면 나갔다. 오늘 밤은 좋은 밤이니 건넌방에서 자거라 하면 또 그렇게 했다. 나는 할머니한테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이제는 마지막까지, 이렇게, 당신의 체온과 어둠을 한 뭉치 수건에 싸서 내게다가 덜컥, 안겨 놓고 말았다. 마지막까지...내 발목을 잡고 계신다. 나는 아무것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다. 강모는 주먹만한 얼굴로 고무락거리던 철재가 자신의 목을 휘감아 끌어안던 꿈속의 감촉이 다시 살아나, 자기도 모르게 목을 털어냈다.
“언제 가십니까?”
“며칠 후에 떠난다.”
“떠난다면?”
“봉천, 시칸방으로 갈 것 같다.”
“거기 오래 머무르십니까?”
“가 봐야지. 만날 사람이 있는데, 사정을 보아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해 볼 생각이다.”
“사회주의...”
“자, 오늘은 그만 일어서자. 너무 늦었다. 나도 또 가다가 만날 사람도 있고 하니, 이만큼 마시고 갈리자.”
강태가 다다미 위에 벗어 놓았던 갈색 캡을 머리에 쓴다. 그러나 강모는 웬일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술도 깨어 버려 머리 속에 찬바람이 스미는 것 같았다.
“혹시 동경에 강호형도 합류 동행하십니까?”
“우선은 아니지만, 내가 봉천으로 가는 것은 알고 있다. 연락은 늘닿고 있으니까. 편지도 하고 인편에도 소식을 전하고.”
“형님, 정확하게 며칟날 가시는 겁니까?”
“왜?”
“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서 그럽니다. 꼭 의논드릴 말씀도 있고요.”
“그래...?”
“연락을 주십시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지.”
강모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나요?”
계산대의 여자가 상냥하게 웃는다. 단풍잎보다 붉은 빛깔의 공단 기모노 바탕에 오색이 찬란한 매화,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주인여자이다.
“계산.”
강모가 지갑을 꺼내자 먼저 밖으로 나간다. 뒤따라 나온 강모는 골목 어귀에 서서 잠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는 너풀 너풀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을까. 길바닥이 희끗거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갓을 쓴 전등이 희미하게 골목을 비추고 불빛 아래 눈송이는 꽃잎처럼 하염없이 진다.
“눈이 오시는구먼요.”
강모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채로 무심히 말한다. 그 무심한 말투 속에는 무엇인가 성급함이 깃들어 있는 것도 같다. 그런 강모의 말에 강태는 대답이 없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어둠 속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윽고 강태는 몸을 돌리며
“가자.”하고 짤막하게 말했다.
“내, 가기 전에 너한테 들르지. 나는 지금 또 가 볼 곳이 있다. 그만여기서 갈리자.”
“그러지요. 꼭 들렀다 가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강태는 고개를 끄덕했다. 강태의 외투 어깨에 눈이 내려앉는다. 어깨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금방 스르르 녹으며 올 사이로 스며들어 버린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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