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2 - 최명희
14. 나의 넋이 너에게 묻어(4/4)
김씨부인이 감는 실꾸리에 한숨이 감긴다. (살이 식은 사람.) 청암부인은 김씨부인의 말을 되받아 속으로 뇐다. 그렇게 말하는 김씨부인의 얼굴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때 맞추어 저절로 식어 준다면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끓어 넘치는 국물도 다 시간이 가면 미지근해지고, 더 두면 썰렁해지는 법. 사람이라고 다르랴. 허나, 그렇게 식기까지 기다릴 수조차도 없어서 입김으로 불고 부채질로 찬 바람을 일으키어 서둘러 식히는 일도 더러는 있다. 우리 두 사람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기구한 명운을 탄식하고는 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의 몸이란 살로만 되어 있지는 않은 것. 뼈로는 일을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비록, 더불어 정을 나눌 사람이 없어 그쪽으로는 죽은 목숨이나 진배 없으나, 아직은 뼈가 젊으니 일을 해야지. 아마도 이 할 일 많은 가문에 들어온 내가 헛눈 팔까 보아 이렇게 홀로 버티게 한 것 같구나. 감축하옵게도 기채를 양자로 주셨으니 정성으로 기르리라.) 그렇게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보이는 청암부인이 지우지 못한 그림자는 신랑 준의였다. 그리고 마음의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은 다름아니라 그 그림자의 그늘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박복한 두 여인네의 품안에 어린 생명을 맡기려 들어온 기채가, 혹시라도 부정을 타지는 않을까. 보쌈마님 김씨부인이 타고난 운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나 또한 소년과부로 남 사는 세상을 못 사는 사람. 행여, 이 거센 운수에 짓눌려 기채가 다치지는 않을 것인가.) 그러나 입 밖에 내서 말을 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그네는 말에 정령이 붙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결코 함부로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속 깊은 곳에 지나가는 생각조차도 불길한 것은 황급하게 털어내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안하려 안하려 해도 떠오르는 이 생각은, 무엇 때문인가.) 결국 청암부인은, 피하여 달아나던 생각에 덜미를 잡히고 만다. (저것도 요절을 해 버리면 어쩌나... 정성으로 길러서 열 살을 넘기고 열다섯을 넘긴다 한들,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덧없이 죽어가면 그 노릇을 어찌할 꼬 누구는 죽고 싶어 죽겠는가. 하늘이 주신 명이 그뿐이면 어쩌랴. 이 집안의 운이 비색하여 모두 선대에서 단명하였는데, 이 아이라고 벗어날 수 있을까. 더욱이 이와 같이 음침한 기운이 집안에 아직도 고여 있는데.) 청암부인도 말도 못할 두려움에 숨을 죽였다. 어디 가서 속 시원한 언약을 받을 곳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무거운 속을 털어내 놓을 곳도 없었다. 돌아보면 첩첩산중이고 올려다보면 텅 빈 하늘뿐이었다. (세상에 막막하기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김씨부인이 곁에 있다 하나 그는 나와는 또 다르다. 막말로 그 양반은 이제 죽으나 내일 죽으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 남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받아 안은 나보다는 그래도 가볍다.) 천지에 의지할 곳 없다는 생각이 등골에 사무치며 오르르 몸이 떨렸다. 그 순간 청암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인력이 자극하면 천재를 면하나니. 이 뼈가 우뚝 서서 뿌리를 뻗으면 기둥인들 되지 못하랴. 무성하게 가지 뻗으면 지붕인들 되지 못하랴. 그네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는 양자 기채를 서리 맺힌 눈매로 바라보았다.
기채는 세 살 버릇 그대로 밥숟가락을 수북하게 해 본 일 없이 마디게 자라났다. 그는 밥만이 아니라 다른 군것질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명절이면 색다르게 준비되는 음식들도 손가락 끝으로 한 점 떼어먹는 시늉만 할 뿐, 상을 밀어내면 그뿐이었다.
"아가. 이 엿 좀 먹어 봐라. 이것저것 잘 먹지도 않는데 허기지겄다. 이런 엿은 입에다 넣고만 있으면 저절로 안 녹냐? 먹는 데 힘들 것도 없겠구마는."
청암부인이 애가 닳아 모반에 엿을 담아 내주어도 어린 기채는 기껏 한 조각 정도만 맛을 보았다.
"입에서는 달고, 뱃속에 들어가면 빈 속에 진기도 있을 텐데."
노르께한 낯빛으로 앉아 있는 이기채를 온갖 말로 달래어 겨우 한 조각을 더 먹이고 나서
"그럼 무엇 해주랴?" 하고 물어도 고개를 흔들었다.
"먹어야 크지."
그런 근심이 늘 가슴에 얹혀 있는 중에도 이기채는 무사히 열다섯을 넘기고, 열여섯도 넘기고, 작배도 하였다. 열여섯 나이 탓에 죽은 것도 아니었지만, 하도 꿈속같이 어이없는 변고를 당한 포한이 기가 막혀, 청암부인은 아무리 급해도 기채만은 스무 살을 다 채워 치혼하리라, 결심했었다. 안 그래도 어려서부터 남달리 조심스러운 기채가 성년으로 실해지기도 전에 장가들어 안팎으로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면, 다음 일을 누가 알리야. 그래서 그는 스물하나에 혼인하였다. 그가 율촌으로 혼행을 가던 날 새벽, 인사를 드리러 안방으로 들어왔을 때, 청암부인은 오직 한 마디만을 했다.
"잘 다녀오너라."
이기채는 두 손을 방바닥에 공손히 모으고 절을 한 다음 일어섰다. 그리고 방문을 나섰다. (잘 다녀오너라.) 그네가 더 다른 말을 덧붙일 수 없을 만큼 그 말은 간절한 것이었다. 마흔여섯 그늘진 그네의 허리에, 시린 설움이 응달진 채 얼어 있었으므로, 말을 보태다가는 자칫 부정을 탈 것만 같아서였다. 그때는 이미 김씨부인은 타계하고 난 뒤였다. 참으로 박복한 여인이었으나, 그나마 마음에 의지되고 동무도 되어주었던 김씨부인은 하룻밤 잠든 사이에 자는 듯 죽어갔다.
"타고난 복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양반. 그래도 죽음 복은 타고나셨던 모양인가."
오래 살아 노망까지 하면서 자기 수족을 마음대로 못 쓰고 남의 손을 빌어 목숨을 이어가는 구차함이나, 날마다 앉고 서는 집일망정 언제나 남의 집 같아서는 늘 손님 같은 처지에, 까딱하면 군식구 대접을 스스로 받을 뻔한 것을 그네는 피해간 셈이었다. 아무 유언도 없이, 무슨 고통도 없이, 김씨부인은 홀연히 청암부인의 곁을 떠났다. 글쎄... 김씨부인도 사람이니 그 나름대로 희로애락과 애오욕이 어찌 없었을까. 그러나 길지 않은 나이 몇 십을 사는 동안 어느 한 가지를 편중되게 겪다 보면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감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씨부인은 자신의 심중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즐겁고 성난 것을 말한다고 아는 것은 아니다. 청암부인은, 그네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소리 내어 성내는 것도 못 보았다. 또한 어디 따로이 혼자만의 낙을 감추어 둘 것인들 있었겠는가. 마음을 기울여 애착하는 아무도 없었다. 애착이 없는데 증오가 있을까. 다만 한 가지 그네의 고적한 평생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애였다. 그것은 안개처럼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고, 그네의 흰옷을 젖게 하고, 몸을 식게 하였다. (좋은 일 한번 못 보고.) 떠나간 김씨부인이 가엾게도 여겨졌지만 한편으로는, 그네가 지하에서나마 조용히 잠들어, 젖은 옷을 다 벗고, 다만 혼백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적막한 가운데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채가 혼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만큼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는 청암부인의 심사는 달래기 어려웠었다. 자기와 단 몇 번 얼굴을 마주하였을 뿐인 어린 소년 신랑 준의도 초례청의 자리에서야 죽음의 명운 앞에 그렇게도 바싹다가서 있는 줄을 어찌 알았을까. (불길하고 사위스러운 아낙이로다. 허나 아무래도 내가 그 양반 세상 뜬 일에 깊이 놀랐던 모양이다. 그저 기채가 이번 고비까지만 무사히 넘겨 주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지 않는 것으로 알리라. 지금까지 남 모르게 근심하며 노심초사했던 불안이 바로 이 고비였던가 보다. 어쩌든지 무사하게만...) 과연 그네의 말대로 하늘이 그네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금방 손안에 잡을 수 있었다.
이기채는 걸음걸이조차도 완연 의젓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율촌으로부터 가마가 당도하였다. 꽃각시 율촌댁이 아담하고 조신한 맵시를 드러냈을 때, 둘러선 사람들은 너나없이 탄성을 한숨처럼 발했다.
"곱기도 해라."
"청암아짐 못다 받으신 음덕이 이제부터 발복하려나 보네요."
"온 집안이 다 훠언하네 그냥."
"집안만이 아니라 삼동네 안에서는 저렇게 이쁜 새각시 없을 것이그만."
아랫것들이 넘겨다보며 숨죽여 내지르는 찬탄은 그만두고라도, 문중의 부인들끼리 주고받는 말로만도 폐백의 자리는 흥겨웠었다. 아닌게 아니라 율촌댁의 자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몸에 익은 태도에서 풍기는 여염함이 그린 듯이 고왔기 때문이었다. 녹의홍상이라는 것이 본디 생기 있는 복색이면서도 수줍고, 그러면서도 당당한 빛깔이라는 것을 청암부인은 눈이 부시게 느꼈다. 그네 자신이 시댁으로 올 때, 가마 속에 허연 소복을 입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기에, 놀라 소리를 지르던 농가의 아낙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오름도 그 빛깔이 눈부신 탓이었다. (아름답고나.) 윤이 나게 빗어내린 낭자머리에 꽂힌 청옥 비녀꼭지의 다부진 푸른 빛 또한 가슴이 서늘할 만큼 고왔다. 고운 그 머리를 조아리며 청암부인 앞에 다소곳이 절하는 율촌댁의 치마폭에 그네는 대추를 한 줌 던졌다.
"부디 아들을 많이 낳아라."
부축하고 있던 수모가 공손한 솜씨로 얼른 대추를 줍고 있는 사이, 청암부인은 율촌댁이 얼굴 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며느리가 얼굴을 들었을 때, 시어머니 청암부인은 속으로 (더불어 큰일을 의논할 상은 아니로다. 잔자로운 집안일이 손끝에 즐거운 그런 상호구나. 허나, 너와 같은 용색을 타고난 사람은 남편궁과 자식궁 모두 순탄하리라. 그러니 여자로서는 복인이지.) 하고 뇌었다. 이상하게도 청암부인의 가슴에는 선망이 괴는 것이었다. 남들은 곱다 하나 그네의 눈에는 그저 범속한 아낙으로 보이는 며느리는 무난함이 오히려 화려하여, 녹의홍상과 청옥잠두의 호사스러운 빛깔과 어우러졌다. 청암부인은 지그시 율촌댁을 쏘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놀랍게도 이듬해 율촌댁은 회임하였고, 달을 채워 딸을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강련이라 지었다. 강련이를 낳은 율촌댁은 몹시 민망하여 얼굴을 바로 들지 못한 채"헛것을..." 하고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었다.
"헛것이라니, 당치않다. 이 집안 지붕 아래 그 아무라도 아들이 태어나기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첫딸은 집안의 살림 밑천이라 하지 않드냐? 선영에 감사하고 감창할 일이다. 아이 낳고 눈물 짓지 마라. 어미 눈물이 자식의 폐장에 스미느니. 내, 그런 말을 들은 일이 있니라. 자식을 둔 어미가 울어싸면 자식의 운수가 피이지를 못한다는 게야. 남모르게라도 행여 울지 마라."
청암부인은, 송구스러워 고개를 떨어뜨리고만 있는 율촌댁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성급한 일이로다. 설한풍에 얼어 들어온 손발은 웃목에서 녹이고 아랫목으로 드는 법. 들이닥치는 대로 더운 자리에 언 손을 넣게 되면 동상에 걸리지 않던가. 목마를 때 먹는 물도 마찬가지다. 급할수록, 버들잎을 띄워서 불어가며 마신다지 않던고, 그뿐이랴. 오래 굶은 창자에는 미음 먼저 먹여서 오장을 적신 뒤에라야 죽을 먹이고, 그 다음에 비로소 밥을 먹이느니, 성급한 마음에 급체할까 두렵다.) 딸이면 어떤가. 며느리가 회임할 수 있는 사람이고, 거기다 순산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세월을 기다리기만 하면 아들을 낳을 날도 있지 않겠는가. 오히려 마음을 걷집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사람은 이기채였다. 누구보다도 집안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그 자신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터이어서 더욱 초조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한숨 소리만 자욱하던 집안에 이렇게 어린 애기 울음 소리가 낭랑하니, 이 얼마나 화창한 일인고."
새 소리가 이에서 더 맑으며, 노래 소리가 이에서 더 즐거우랴. 청암부인은 얼굴빛을 밝게 하여 율촌댁의 심기를 도와 주었다. 그러는중에 며느리 율촌댁은 이태 만에 다시 아이를 가졌다. 그때야말로 온 집의 안팎이 부풀어, 열 달 내내 보약 탕제가 그치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둘째 아이도 여식이었다. 누구보다 율촌댁의 낙심이 컸고, 이기채는 실망의 탄식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청암부인마저도 서운한 기색이 확연했다. 첫아이 강련이 때보다 훨씬 침통한 분위기가 깁안을 눌렀다. 율촌댁은 아기가 우는 소리만 내도 가슴이 죄어 얼른 입을 틀어막을 정도였다. 그런 경황 없는 가운데 누가 아기의 이름을 지어 주는 이도 없어돌이 가까워 오도록 따로 무어라 부를 말이 없었다. 천덕꾸러기처럼 눈치 보며 젖을 물려 허구한 날 잠만 재우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다가 덜컥 제 형과 아우, 두 자매가 한 날에 서로 다투어 열병에 걸리었으니 차마 보기 어려운 정경이었다. 그 끝에 결국 작은 것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 남은 형 강련이도, 끝내 온전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반편이 되어 버렸다. 아가. 오직 한 마디, 율촌댁은 그렇게 속으로 잦아드는 소리로 어린 것을 부르며, 묻히러 가는 자식을 배웅했다. 이름도 못 얻고 죽어간 계집아이, 자라나도 쓸모 없는 헛것이라 잊어버리려 애쓰지만, 어미의 마음이 자식에 대하여 어찌 쓸모를 따지리오. 비가 와서 땅이 젖으면 율촌댁은 뼈가 시리었다. 죽은 자식 불효 자식. 삼생에 지은 원수 이생에서 갚으려고, 못 들고 망치 들고 어미의 생가슴에 피멍으로 박고 가는 천하에 못된 자식. 그러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율촌댁은 아기가 묻힌 곳으로 자기도 모르게 발을 옮기곤 하였다. 격식을 제대로 갖춘 것도 아닌, 흡사 조갑지만한 무덤 자리에, 그저 돋는 푸른 풀이나, 그저 피는 꽃모가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물끄러비 바라보면, 저것들이 모두 다 내 자식 살아 녹아 거름이 된 것이려니, 그 거름 먹고 무심한 잡초들이 저다지도 무성한 것이려니. 애통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주먹만한 몸뚱이가 캄캄한 땅 속에서 저 무거운 흙더미를 이고 누워 있을 것이 저미고 에이었다. 그렇게 낳자마자 숨이 질 것이라면 무엇 하러 열 달을 채웠던고. 이리 잠깐 있다 갈 것을 무엇하러 태어났던고. 율촌댁은 하늘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자식을 앞세워 묻은 것을 바로 자신의 죄로 돌린 탓이었다. 그리고 시어머니 청암부인을 바로 대하지 못했다. 새며느리를 맞이하고 삼년 안에 일어나는 재앙은 모두 며느리 앞으로 책임이 떨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여서, 죄만스러운 기색을 감출 길이 없었다. 열병에서 겨우 건져낸 강련이의 비틀린 모습 또한 암담하여 율촌댁은, 자신의 무간죄보에 사무쳐 울었다. 세상에 나서 지금까지 그다지 남 못할 일 시킨 기억 없건마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겹겹이 에워싼 시름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율촌댁의 근심이 살을 마르게 하는 가운데 이 년이 지나, 세번째 아이를 회임하였다. 그네는 산월 가깝도록 그 일을 발설하지 않았으나, 두꺼운 얼음이 풀리고 봄빛 천지에 난만한 춘삼월의 꽃피는 스무날, 순산하였다. 그것도 아들을. 강모. 이기채가 떨리는 손으로 사당에 고하여 올린 이름은, 눈부시게 흰 백지 위에서 그 먹빛조차도 찬연하였다. 단아 방정한 두 글자가 나란히 어깨를 맞추고 서서, 이제 막 태어난 종손의 머리맡에 새로운 뜻으로 견실한 울타리를 둘러 주었으니, 누구라서 하늘 보고 무심하다 원망을 하였던고.
"하늘은 사람을 기다려도, 사람은 하늘을 기다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일.월.성.신은 무궁해도 인생은 풀끝에 이슬이라. 감히 이슬이 어찌 무궁함을 헤아리리오. 이런 날이 숨겨져 있는 것을 모르고 그만 하마터면 실심을 할 뻔했구나."
청암부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앉은 채, 참으로 감회 깊은 눈물을 흘리었다. 감루였다. 그러부터 강모는, 할머니 청암부인의 무릎 위에서 내려앉을 날이 없었다.
"무엇을 잡을라는가. 어디 자네 마음에 드는 대로 아무것이나 잡아보게나. 여기 놓은 이 많은 복록이 다 자네 것이네. 이 사람아."
청암부인은 첫돌맞이 돌상 앞에 복건을 쓰고 앉은 조그만 손자 강모에게 축수하며, 고사리 같은 아기의 손을 뻗쳐 주었다. 검은 윤이 반드럽게 오른 상 위에는 어린 손자의 앞날을 점쳐 보는 증표들이 정성스럽게 줄을 맞추어 놓여 있었다. 맨 뒷줄에는 먹과 벼루, 책, 그 옆에 청실 홍실이 나란하고, 가운데 줄에는 붓이며 돈, 그리고 활과 무명필이 소담하게 혹은 날렵하게 놓였는데, 아기의 손이 닿기 좋은 앞줄에는 과일, 국수, 쌀, 떡 등의 음식이 탐스러웠다. 그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앞날들은 하나같이 복스러운 것이었다. 쌀에는, 부유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고, 쌀로 만든 무지개떡과 편이며 송편.경단이 모두 곡식들로,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 없지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보배로운 곡류라면 역시 쌀이 아닌가. 쌀은 곧 재물이요, 쌀은 곧 목숨이었다. 그보다 좀더 직접적으로 부를 상징하는 것은 돈이어서, 쌀을 한 웅큼 집으나 돈을 집으나, 아기가 장차 부자가 되리라는 예언에는 별 차이가 없는 일이었다. 국수 그릇에 손을 대면 무병 장수할 것이요, 대추든지 사과든지 감이든지, 과일을 집어 올리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다. 또한 청실 홍실은 길고도 긴 수명을 여한 없이 누리라고 타래를 틀고 있다. 청실 홍실을 구하기 어려운 집에서는 쉽게 무명실을 놓기도 하지만, 강모의 앞에는 푸른 실 붉은 실이 요요하였다. 무엇보다 선비의 가깡이에서 한평생을 함께 할 벗으로서 문방사우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일. 붓.먹.벼루.종이가 서로 다정하게 이마를 맞대고 있는데, 책을 읽지 않고서야 어찌 글을 잘하며, 글을 잘하지 않고서야 어찌 입신하고 양명하며 학문에 통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성품과 기개가 저마다 달라서 어떤 이는 학문으로 이름을 세우고, 어떤 이는 용맹으로 공을 이룬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기는 이나 저나 다를 바 없는 고로, 활을 들어 무사가 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강련이 때에는 활 대신에 잣대를 놓아 부덕을 빌었다. 여자의 할 일로는 침선이 으뜸이었던 때문이다. 그때 돌상 앞의 강모는, 이것 저것 만지작거리면서 들었다 놓았다 헤적거리기만 했었다. 어린 것이 자기 앞에 놓인 울긋불긋한 음식과 물건들이 담고 잇는 기원을 알 리도 없었거니와, 본디 애기 때부터도 눈에 보이는 것을 탐욕스럽게 거머쥐는 성품도 아닌 탓이었던가, 둥그런 눈을 더욱 둥그렇게 뜨고는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도였었다. 그런데도 청암부인은 속으로, 저것이 실타래를 맨 먼저 집었으니 오래 살리라 생각하며 흐뭇하게 여기었다. 이기채는 이기채대로 (어린 손이 무엇을 알아서 똑바르게 한 가지만을 고르리요. 그런 중에도 쌀대접을 부둥켜 안으려고 시늉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재물은 좀 모으려는가 싶구마는.) 하고 욕심을 부려 본다. 그렇지만 율촌댁은 또 달라서, 대추를 입으로 가져 가던 강모의 이쁜 짓만을 몇 번이고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아랫것들은 또 저희들이 들은 대로 혹은 붓을 들었다고 하고, 혹은 떡을 먹었다고 하고, 누구는 책을 읽었다고도 하면서, 저 들은 것을 옳다고 고집하였다. 만일에 그 말들이 모두 맞는다면, 강모야말로 이 세상에 태어나 수명 장수하면서 온갖 복록과 부귀 공명을 한몸에 누리는, 더할 나위 없는 복인이어야 할 것이다. 그 강모가 꿈결 같은 세월을 보내고 이제 어른이 되고, 또 터무니 없게도 한 어린 것의 아비가 되어, 이렇게 허옇게 늙어 버린 할머니 청암부인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삼백 원의 '공금 횡령' 죄목으로 파직이 되어. 청암부인은 혼수에 빠진 듯 혼곤하게 눈을 감고만 있다가 다시 겨우 실눈을 힘들여 뜬다. 그리고 물끄러미 강모를 바라본다. 그 눈귀에 진득한 물기가 번진다. 강모는 그 눈빛을 피하여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만다.
"... 아가..."
청암부인은 강모를 바라보던 눈길을 옆으로 기울여 베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강모를 바라본다.
"왜요? 할머니, 베개가 불편하세요?"
강모는 얼른 베개를 고쳐 주며 물었다. 청암부인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눈짓으로 베개 밑을 가리켰다.
"베개 밑에 뭐가 있어요?"
그네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길을 따라 강모는 베개 밑에 손을 넣었다. 베개 밑은 눅눅하였다. 땀 기운이 서린 탓이리라. 강모는 할머니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은 기분이 들었다. 겨울날 찬 바람 속에서 방으로 들어오면 청암부인은
"이리 온, 할미가 따뜻하게 해 주지."
하면서 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가 할머니의 켜드랑이에 넣어 주었다.
"따숩지?"
정말로 그곳은 아늑한 골짜기였다. 명주 저고리에 솜을 두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할머니의 몸이 따뜻했던 때문이었을까.
"찬 데서 방에 들어와 가지고 바로 아랫목에 손 넣지 마라. 동상 걸린다."
그러면 강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의 겨드랑이에 손을 묻은 채 얼굴을 그네의 뒷등에 비비곤 하였다. 그때, 눅눅한 듯 혼혼하던 체온. 강모는 베개 밑에서 손바닥만하게 접은 납작한 명주 수건을 찾아냈다. 그것은 넣어둔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이것 말씀이신가요?"
강모가 명주 수건을 꺼내 들고 청아무인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네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할머니."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이 없다.
"할머니."
강모의 목소리는 다급하였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혼수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네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찌 보면 마른 나무로 깎아 만든 도상 같기도 하였다. 탈진이 될 대로 되어 수분이 없는 그 얼굴은, 이미 애증이나 영욕의 끈끈하고 축축한 늪지에서 건져 올려져 햇빛에 건조되고 있었다. 장지문에 녹아 엉기고 있는 여름 한낮의 뙤약볕이, 청암부인의 무감한 누른 얼굴 위에 거미줄을 하얗게 슬어냈다. 그래서 그네의 얼굴에는 명주 올이 얽힌 것처럼도 보였다. 강모는 가슴 밑바닥이 어이없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곳은 허방이었다. (할머니. 제가 어찌 해드렸으면 좋겠습니까. 반평생 받기만 하면서 살아왔으니, 이제라도 무엇을 어찌 해드렸으면 좋겠는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어쩌다가 저는 이런 모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요. 할머니. 할머니이.) 터지는 울음을 누르며 강모는 손에 들고 있던 명주 수건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금이 가게 접혀진 그 안에는 미농지로 한 겹 더 싸인 것이 들어 있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돈 삼백 원이었다. 귀퉁이를 나란히 맞추고 누워 있는 종이돈에서는 물큰 땀냄새가 났다. 할머니와 체취였다. 그리고, 아까 할머니의 희미한 눈빛 속에다 반절이나 덜어 넣었다고 생각하던 그 어둠보다 훨신 더 크고 깊은 어둠이, 명주 수건에 싸여져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청암부인은 강모에게, 그네의 가슴 가장 어두운 곳에 멍들어 있던 어둠을 명주 수건에 싸서 건네준 것이었다. 강모는 손수건을 구겨 쥐었다. 손수건에서 후욱 할머니의눈물 냄새가 끼쳐 왔다. 그는 허리를 꺾으며 엎드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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