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잠실구장에서는 롯데와 빙그레간의 한국시리즈 5차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지난해만 해도 배팅볼 투수로써 연봉 600 만 원을 받고 있는 롯데의 무명투수 윤형배 선수는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승리투수가 되었고 이 날도 3 회까지 무안타로 잘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 회말 빙그레의 공격이 시작되자 이정훈에게 첫 안타를 내주고 결국 무사 만루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내 최대의 거포 장종훈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내주자, 롯데 강병철 감독은 투수 코치 이충순에게 박동희 투수의 컨디션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박동희 투수의 컨디션 OK의 사인을 받고 이충순 코치는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윤형배를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바꾸러 올라왔다."
"공 놓는 포인트가 좋습니다. 5 회까지만 기회를 주십시오. 승리투수만 되면 MVP인데 아깝지 않습니까? 1실점이지만 이제 겨우 1안타입니다."
포수 김선일이 달려와 이충순 코치에게 애원하다시피 말했습니다. 이충순 코치는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윤형배를 차마 바꿀 수 없어 마운드를 힘없이 내려왔습니다.
"왜 안 바꿔!"
강병철 감독의 고함이 터져나오자 이충순 코치는 덕아웃으로 가서 그의 팔을 잡으며 조금만 두고 보자고 겸연쩍게 웃었습니다. 그의 짧은 웃음은 절대절명의 위기와 감독의 지시, 그리고 윤형배에 대한 인간적 배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인간의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다음 타자를 땅볼 처리하고 2사 1, 2루가 되자 다시 이충순 코치는 마운드로 올라갔습니다.
"미안하다."
공을 건네 주고 윤형배는 마운드를 내려왔습니다. 코칭 스태프, 동료들이 그를 위로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끝났습니다. 롯데가 이기고 8 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한 기자가 윤형배 투수에게 물었습니다.
"마운드를 내려올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그때는 매우 서운했습니다. 그러자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고 기분 좋을 뿐입니다."
아무리 비정한 승부세계, 아무리 철저한 위계질서 속에도 인간적인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롯데의 진정한 우승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배려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