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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성찬」(시인 이상섭) 2009년 8월 7일 |
탈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표백제로 세수를 한 듯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스르륵 녹아 바닥으로 물처럼 스며들 것 같았다. 약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참다 못한 그는 조기 퇴근을 허락받은 후 집으로 향했다. 아내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아내는 나름 오늘도 직장에서 바쁘게 나부대는 모양이었다. 이런 날, 내조라도 받으며 편하게 쉬면 좀 좋을까. 하지만 맞벌이를 하면서 다섯 살, 네 살 연년생 오누이에, 아파트까지 장만하는 기염을 토한 아내이니 딱히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안방에 들어섰을 때,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렁각시도 아니고 그의 마음을 어찌 알고 집에 와 있단 말인가. 아니, 당신이 이 시각에 웬일이야? 그의 물음에 아내 또한 눈망울을 키우며 되물었다. 당신이야말로 끄응, 왜 이리 일찍 들어온 거야? 응, 몸이 너무 아파서. 그래? 나도 감기몸살이 났나 봐, 끄응. 어디 많이 아픈 거야?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편도선까지 왕창 부었어. 그럼, 아이들은 어떡하지? 아, 모르겠어, 끄응, 더 이상 말도 하기 힘들어. 마음에 켕기긴 했지만 그딴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픈 몸부터 조리하고 보자 싶어 침대로 파고들었다.
얼마 뒤였다. 다녀왔습니다, 하는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방문이 부러질 듯 몸을 떨었다. 역시 대책 없는 작은 녀석이었다. 어, 아빠도 아픈 거야? 아내가 앓는 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끄응, 아빠도 오늘 많이 아프신가봐. 그러자 뒤따라 들어온 큰딸마저 난감한 상황인지 침대 주변을 맴돌았다. 그나저나 니네들, 저녁도 챙겨야 하는데 끄응, 어쩐다니? 기다렸다는 듯이 큰애가 대답했다. 엄마, 우리 걱정은 말고 푹 쉬어. 세상에, 저 돌콩만 한 것이 언제 저리 철이 든 것일까. 이게 다 돈 들인 사교육 덕인가. 근데, 이어지는 말은 또 뭐람. 저녁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준비하겠다니. 아내 또한 어이가 없는지, 몸이 아파 성가셔서 그런지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지들 손으로 냉장고에 있는 반찬통 하나 꺼내본 적이 없잖은가.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자 두고 보라는 듯 아이들은 쏜살같이 나가 버렸다. 일단 두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녁 준비는커녕 작은 방으로 들어간 두 녀석은 한참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없었다. 대신 싫어, 못해, 하는 작은 녀석의 목소리가 들릴 뿐. 그럼 그렇지, 오늘 따라 왜 안 싸우나 했다.
조금 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밥은커녕 이제 놀러 나가는 게 급해진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졸음이 몰려왔다. 약기운을 참지 못한 아내는 벌써 코를 고는 중이었다. 그도 아내 뒤를 따랐다. 얼마나 잤을까. 엄마, 아빠. 식사하세요, 하는 소리가 났다. 엉, 이게 무슨 소린가.
그와 아내는 멍한 눈으로 물음표를 교신했다. 빨랑 일어나서 식사하시라니깐요. 도대체 얼마나 멋진 저녁을 준비했기에 이 난리일까 싶어 아픈 몸을 일으켰다. 한데 이게 뭐란 말인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찬은커녕 밥공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거기 놓인 건 딸랑 컵라면 네 개뿐! 이게 니들이 차린 저녁이야? 놀란 아내가 묻자 작은 아이가 응, 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앓는 부모를 위해 생애 처음으로 장만한 식사. 거기에 의미를 두는지 아내는 감격에 겨워 와, 진짜 맛있다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니 물의 양이 모자라 짜고 면발마저 팅팅 분 것이었지만 젓가락을 쥐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먹다 보니 궁금했다. 5분이면 족할 이걸 갖고 왜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 거냐? 그러자 또 작은 녀석이 그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메뉴는 빨리 정했는데 누나가 라면 값을 반반씩 내자잖아, 용돈도 많이 받으면서. 그래서 네가 적게 내려고 떼쓴 거구나, 요 녀석, 손해 안 보려는 건 영판 제 엄마네? 그러자 곁에 있던 아내가 되쏘며 나섰다. 그래도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당신 닮은걸? 언제 아팠냐는 듯 아내가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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