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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010170603&Section=04
[철학자의 서재]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그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근거는 무신론, 이성, 과학이다. 그에게 이 척도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적 척도처럼 전제된다. 마치 기독교가 신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그는 미국의 보수 기독교를 종교 일반으로 확대하여 모든 종교를 문제 삼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신론은 철학도 아니고, 세계관도 아니며, 단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67쪽)
"신앙이란 모든 논리적 추론이 실패했을 때,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줄 수 있는 면책에 불과하다. 증거가 없는데도 굳게 믿는 행위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미쳤거나 어리석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신에 대한 믿음에서만큼은 여전히 큰 명예를 나타낸다. 종교는 어떤 사람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고상하게 보이는 유일한 담론이다." (85쪽)
담론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저자의 이런 발언은 소통을 위한 담론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소통이 아닌 극단적 대립과 갈등의 표현이다. 자신의 주장을 통해 상대방의 소멸이 가능하다는 선언 외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는 저자의 이러한 공격적인 어투 안에서 역설적으로 그가 비판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그것은 그가 거의 종교적 신념처럼 말하는 무신론이라는 사상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무신론(atheism)은 서구 기독교의 세속화 과정에서 나온 사상이다. 달리 말하자면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라는 문화적 토양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상이다. 무신론(atheism)은 유신론(theism)의 부정어이기에 태생적으로 유신론 없이는 존재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전통이 없는 문화에 무신론자가 있을 리 없다. 무신론이라는 말조차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동아시아의 일원인 우리사회에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것일 뿐이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의 존재에 대해 인간의 언어로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면, 그 헛된 논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한 논쟁은 마치 동일한 유일신을 믿는 종교 전통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가 무신론과 함께 거의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이성과 과학은 어떤가? 근대과학은 측정량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려는 좁은 길로 들어선 사유방식이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힘이 세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세계를 그러한 척도로 이해한다는 것은 다시 그 척도에 의해 세계가 제한됨을 의미한다.
자(척도)는 자일뿐이다. 본래 제한된 척도를 무차별적으로 확대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은 영원의 척도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 과학을 수행하는 이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유한자(有限者)가 지닌 제한된 능력일 뿐이다. 척도를 의미하는 영어인 'measure'와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환영(幻影)을 뜻하는 'maya'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했음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건전한 비판은 어떻게 가능한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 기독교 비판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진보 혹은 개혁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기독교의 인과응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그 내용과 관계없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미국 사회에서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갖고 있는 문제를 비판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만 보아도 너무나 명백하다. 그렇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무익하고 유해한 대립과 다툼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대신 오히려 기독교와 소통하는 길을 열고, 그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 치유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무릇 기독교인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과 사상에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사상은 그 어려운 신학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매우 간단하다. 예수는 하느님(하나님)을 공경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고, 그것을 실천하다 순직하신 분이다. 이를 더 줄이면 "하느님(하나님)은 사랑이시다"로 말할 수 있으리라.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에 사랑이 없으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의 근본은 바로 이 간단한 언명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메시지 때문에 기독교는 민족과 언어를 넘어 복된 소식을 전하는 구원 종교로서 성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과 우리 사회에서 모든 공격적인 형태의 기독교는 바로 이 근본을 어긴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진정한 근본주의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명제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습으로 드러내어야 할 가치일 뿐이다. 사랑의 모습이 없으면서 하느님(하나님)을 거론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근본에서 이미 멀어진 것이다. 나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기독교인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좋은 기회라고 본다.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다. 그렇지만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무릇 비판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스스로 비판대에 올라야 한다. 자신이 휘두르는 비판의 잣대가 무엇인지, 한계나 오류가 없는지 먼저 반성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공격이 아니라 정당한 비판과 반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은 비난이 되고 더 큰 분쟁과 다툼을 유발할 뿐이다.
대립을 넘은 소통을 기대하며
종교든 과학이든 자신의 척도만을 영원의 척도라고 말하고 강요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중심을 갖되 겸허하게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배우며 깨달아 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다석 유영모 선생을 떠올려 본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전통적 교리에 갇히지 않고 불교, 도교, 유교 등을 자유로이 오간 진정한 종교인이었다. 그에게 여러 종교의 다양한 교의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역설적으로 세계의 다양한 핵심적인 사상과 종교가 들어와 조화하며 갈등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 큰 축복일 수 있다. 단순히 사상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에서 충돌과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의 과정 속에서 저마다 어떤 자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저물어가는 미국을 보면서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이 땅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보편적 사상이 출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집중되고 있다. 유영모 선생은 그 힘을 선취한 한 전형이다.
척도가 항상 미국이나 유럽, 중국 같은 제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식민성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편협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는 금물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비록 그 과정이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겠지만 말이다.
끝으로 서평을 맺으며 한 생각이 스친다. 다름 아닌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이 지난 9월부터 하고 있는 오체투지 수행이다. 그들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로 인간뿐만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기도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종교의 구분도, 인간과 미물의 구분도 사라진 듯이 보인다. 오직 가장 낮은 곳에서 땅의 숨결을 느끼며 세상을 응시할 뿐이다. 상대의 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자신도 그 과오에 이미 동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묵언으로 촉구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척도와 가능성을 겸허하게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바라보기'.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바라보기"
[철학자의 서재]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극단적인 논박이 결코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구나 하는 좀 역설적인 안위마저 드는 책이었다. 미국은 물론 우리 사회에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논평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책의 비판 대상인 기독교를 두고 본다면 미국과 한국은 매우 유사하다. 한국도 미국처럼 공격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저자는 대체로 개신교를 지칭함)가 강력한 힘을 지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아마 매우 불쾌하거나 적의마저 느낄 것이다. 반면 평소 기독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독자라면 무척 통쾌하고 시원한 감정마저 들 법하다. 이 책의 저자 샘 해리스는 매우 강한 어조로-때로 전투적이고 선동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기독교를 비판한다.
그가 사용한 수사와 논리는 보수 기독교의 그것처럼 비약이 심하고 날이 서있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역사비평이나 해석학적 반성과 같이 최소한의 이해나 해석의 과정을 생략한 채 성경의 문구에 문자 그대로 비판을 감행한다. 이러한 해석의 노력이 없으니 성경이 온통 오류와 모순에 가득한 황당한 이야기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무신론, 이성, 과학이라는 척도
그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근거는 무신론, 이성, 과학이다. 그에게 이 척도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적 척도처럼 전제된다. 마치 기독교가 신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그는 미국의 보수 기독교를 종교 일반으로 확대하여 모든 종교를 문제 삼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신론은 철학도 아니고, 세계관도 아니며, 단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67쪽)
"신앙이란 모든 논리적 추론이 실패했을 때,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줄 수 있는 면책에 불과하다. 증거가 없는데도 굳게 믿는 행위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미쳤거나 어리석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신에 대한 믿음에서만큼은 여전히 큰 명예를 나타낸다. 종교는 어떤 사람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고상하게 보이는 유일한 담론이다." (85쪽)
담론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저자의 이런 발언은 소통을 위한 담론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소통이 아닌 극단적 대립과 갈등의 표현이다. 자신의 주장을 통해 상대방의 소멸이 가능하다는 선언 외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는 저자의 이러한 공격적인 어투 안에서 역설적으로 그가 비판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그것은 그가 거의 종교적 신념처럼 말하는 무신론이라는 사상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무신론(atheism)은 서구 기독교의 세속화 과정에서 나온 사상이다. 달리 말하자면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라는 문화적 토양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상이다. 무신론(atheism)은 유신론(theism)의 부정어이기에 태생적으로 유신론 없이는 존재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전통이 없는 문화에 무신론자가 있을 리 없다. 무신론이라는 말조차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동아시아의 일원인 우리사회에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것일 뿐이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의 존재에 대해 인간의 언어로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면, 그 헛된 논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한 논쟁은 마치 동일한 유일신을 믿는 종교 전통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가 무신론과 함께 거의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이성과 과학은 어떤가? 근대과학은 측정량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려는 좁은 길로 들어선 사유방식이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힘이 세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세계를 그러한 척도로 이해한다는 것은 다시 그 척도에 의해 세계가 제한됨을 의미한다.
자(척도)는 자일뿐이다. 본래 제한된 척도를 무차별적으로 확대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은 영원의 척도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 과학을 수행하는 이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유한자(有限者)가 지닌 제한된 능력일 뿐이다. 척도를 의미하는 영어인 'measure'와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환영(幻影)을 뜻하는 'maya'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했음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건전한 비판은 어떻게 가능한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 기독교 비판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진보 혹은 개혁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기독교의 인과응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그 내용과 관계없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미국 사회에서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갖고 있는 문제를 비판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만 보아도 너무나 명백하다. 그렇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무익하고 유해한 대립과 다툼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대신 오히려 기독교와 소통하는 길을 열고, 그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 치유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무릇 기독교인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과 사상에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사상은 그 어려운 신학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매우 간단하다. 예수는 하느님(하나님)을 공경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고, 그것을 실천하다 순직하신 분이다. 이를 더 줄이면 "하느님(하나님)은 사랑이시다"로 말할 수 있으리라.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에 사랑이 없으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의 근본은 바로 이 간단한 언명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메시지 때문에 기독교는 민족과 언어를 넘어 복된 소식을 전하는 구원 종교로서 성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과 우리 사회에서 모든 공격적인 형태의 기독교는 바로 이 근본을 어긴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진정한 근본주의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명제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습으로 드러내어야 할 가치일 뿐이다. 사랑의 모습이 없으면서 하느님(하나님)을 거론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근본에서 이미 멀어진 것이다. 나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기독교인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좋은 기회라고 본다.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다. 그렇지만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무릇 비판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스스로 비판대에 올라야 한다. 자신이 휘두르는 비판의 잣대가 무엇인지, 한계나 오류가 없는지 먼저 반성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공격이 아니라 정당한 비판과 반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은 비난이 되고 더 큰 분쟁과 다툼을 유발할 뿐이다.
대립을 넘은 소통을 기대하며
종교든 과학이든 자신의 척도만을 영원의 척도라고 말하고 강요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중심을 갖되 겸허하게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배우며 깨달아 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다석 유영모 선생을 떠올려 본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전통적 교리에 갇히지 않고 불교, 도교, 유교 등을 자유로이 오간 진정한 종교인이었다. 그에게 여러 종교의 다양한 교의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역설적으로 세계의 다양한 핵심적인 사상과 종교가 들어와 조화하며 갈등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 큰 축복일 수 있다. 단순히 사상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에서 충돌과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의 과정 속에서 저마다 어떤 자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저물어가는 미국을 보면서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이 땅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보편적 사상이 출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집중되고 있다. 유영모 선생은 그 힘을 선취한 한 전형이다.
척도가 항상 미국이나 유럽, 중국 같은 제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식민성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편협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는 금물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비록 그 과정이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겠지만 말이다.
끝으로 서평을 맺으며 한 생각이 스친다. 다름 아닌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이 지난 9월부터 하고 있는 오체투지 수행이다. 그들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로 인간뿐만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기도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종교의 구분도, 인간과 미물의 구분도 사라진 듯이 보인다. 오직 가장 낮은 곳에서 땅의 숨결을 느끼며 세상을 응시할 뿐이다. 상대의 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자신도 그 과오에 이미 동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묵언으로 촉구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척도와 가능성을 겸허하게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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