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기억이 있게 마련이다. 내게는 1998년도가 그렇다. 사회 전체가 IMF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그해 6월 하나뿐인 아들이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10월 초에는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내게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1998년 말, 나는 병실에 누워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다시 저 눈을 밟아볼 수 있을까?’하는 상념에 잠기곤 했다.
죽음의 문턱에 서 본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때 가장 간절했던 생각은 직장 생활에 대한 후회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왔고, 일도 썩 잘해 내고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미진함이 남았던 것이다. 직장 생활은 내 인생 역사의 가장 중요한 페이지 중 하나였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을 찾아 준 수많은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도 20년 넘게 몸담았던 당시 직장의 동료와 후배 직원들 덕택에 건강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나에게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현대자동차 역사상 최초의 일선 영업사원 출신 부사장이다. 발로 뛰는 사원에서부터 직원들을 관리하는 지점장이나 지역본부장으로 재직할 때까지, 나는 어려운 여건과 좋지 못한 상황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곤 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성공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때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2005년 부사장 직위를 마지막으로 정들었던 회사에서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길을 찾아 도전하고 있다. 대개 직장을 떠난 뒤에는 그 좋아 보이던 인간관계도 끝을 맺게 마련이지만 아직도 내게는 후배 직원들의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현직에 있을 때보다 왕래가 더욱 잦은 것처럼 느껴진다. 더 자주 안부를 묻고 술잔을 부딪치며, 얼싸안고 박치기를 하던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그들은 내게 늘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더 큰 사랑은 내가 받았다. 그들은 내게 인생의 의미와 진정한 행복을 일깨워 준 사람들이다. 그런 가족 같은 사람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문수 님 | 전 현대자동차 부사장, 킹웨이인재개발그룹 원장 -《행복한동행》2008년 7월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