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가 늘 배고픈 건 아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보다 배고픈 날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십수 년 전 내가 가장 즐거워했던 자리는 삼겹살에 소주 또는 통닭에 생맥주가 있는 술자리였다. 몇 끼를 굶었건 얼마나 오래 연습을 했건 그런 술자리가 있으면 나는 흥분했고 어느새 행복해졌다. 지금까지도 몇몇 그때의 술자리들은 가슴 구석에 아련히 모셔져 있다. 제법 유명해진 요즘은 원 없이 그때처럼 먹을 수 있지만, 그때의 맛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
언제인지 어떤 자리인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그날은 ‘따따블의 날’이었다. 삼겹살에 소주, 통닭에 생맥주가 이어지는 술자리였으니 말이다. 흥분된 만취 상태로 밤을 찢어 새벽을 맞이했고 첫차 뒷좌석에 실려 자취방에 들어왔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술은 못 깨고 겨우 잠만 깨 냄새나는 자취방을 나와 연습실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차비가 없음을 확인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동전을 찾기 시작했다. 삼십 여 분 후 손아귀에 들어온 돈은 오십 원. 그때 물가로 백 원이 부족했다. 걸어서 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연습실, 작은 절망이 몰려왔다. 염치없이 옆집에서 빌릴 수도 없고 운전기사에게 사정하기도 쪽팔리고…. 평소 잔머리 잘 굴린다 소리 듣던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공연도 아니고 연습인데 뭘…. 원래 성실한 놈도 아니구, 에잇, 양말이나 빨자.’ 신발장 옆에는 스무 짝이 넘는 양말이 쌓여 있었다. 대야를 가져와 양말을 담으려는 순간 신발장 옆에 수북이 쌓인 빈 병들에 시선이 꽂혔다. ‘가만, 저게 얼마야?’ 삼십 병도 거뜬히 넘는 빈 병들을 세어 보니 거의 천 원에 육박했다. 차비가 문젠가, 담배까지 살 수 있었다. 하하. 갑자기 천하를 얻은 기분. 정류장에서 담배 한 개비를 아주 건방지게 태우고 보무당당히 버스에 올라탔다.
그 시절은 그렇게 늘 아슬아슬했고 오늘 벌어 내일을 버텨야 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일치했으니, 한 끼 굶어 술이었고 동가식서가숙이었지만 늘 행복했고 신났다.
삼겹살에 소주, 통닭에 생맥주 한번 원 없이 먹어 본 적 없던 그 시절의 술자리. 그 잊을 수 없는 맛을 또다시 좋은 벗들과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