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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화병
나같이 온순하고 청순하며 버들강아지처럼 보드라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로 눈엔 쌍심지를 돋우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끝마다 쐐기벌레처럼 톡톡 쏘아붙이며 화내는 사람을 만나면 화덕 위에서 졸아붙고 있는 청국장처럼 몸이 쪼그라들고 속에선 매캐한 탄내마저 나는 듯하여 웬만하면 초장부터 안 만나는 쪽이 심신건강에 유익하렷다.
걸핏하면 화내는 사람은 주변 인심을 잃을지는 몰라도 자기감정을 시원 방탕하게 배설하니 무병장수할 공산이 큰 반면에, 당하는 사람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삭일 길 없어 몸에선 열이 나고 초점 잃은 눈으로 기운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가 이내 허공 위로 긴 한숨을 내뱉고는 답답한 가슴을 팡팡 치기도 하고 맥없이 드러누워 있다가 급작스럽게 벌떡 일어나기를 거듭하며 입이 깔깔하고 볼살이 빠지며 주름은 깊어지는데 예전엔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자리에 눕는 걸로 시위라도 했건만 이젠 그마저도 보기 어려워졌다.
기록상 최초의 화병 환자는 선조였는데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리는 자가 울화병에 시달렸다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겠으나 방계로 왕위에 올라 주변의 눈치를 봐야 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굴욕을 당했으며 전쟁 뒤엔 자신들이 왕을 잘 모셨다며 휘호를 내려달라는 조정 대신들의 상소를 접하니 어찌 화병을 앓지 않고 배길쏘냐. 선조 스스로 “나는 화병을 앓고 있는데 나에게 올리는 글을 읽으니 심기가 더욱 상하여 목구멍이 붓고 가래가 끓는 걸 내시들도 다 알고 있다”고 토로하였더라.
왕의 화병에 측은지심이 발동하다가 문득, 화를 내는 왕과 화병을 앓는 왕 중에 누구를 골라야 할지 궁금해진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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