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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다, 비추다
'달빛이 비치는 밤인데도 그믐에 가까워 골목길이 깜깜해서 손전등으로 거리를 비추며 문 밖으로 나섰다.' 이 문장에서처럼 대부분 '비치다'는 목적어를 갖지 않고, '비추다'는 목적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속이 비치는 분홍빛 여자 속옷'에서는 목적격 조사(-을/를)가 나오지 않으므로 '비치다'를 쓰고, '가로등이 거리를 비추었다'에서는 목적격 조사가 나오므로 '비추다'를 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 원칙이 어긋날 때, 대부분의 사람이 표기에 혼동을 일으켜 잘못 쓰는 경우를 종종 본다. '비치다'가 목적격 조사를 동반하는 경우다. 주로 '…에/에게 …을' 형태로 쓰여 '얼굴이나 눈치 따위를 잠시 또는 약간 나타내다'라는 뜻(너무 바빠 집에 얼굴을 비칠 시간도 없다)과 '의향을 떠보려고 슬쩍 말을 꺼내거나 의사를 넌지시 깨우쳐 주다'라는 뜻(이번 선거에 출마할 의향을 어느 정도 측근들에게 비쳤다)을 나타낸다. 이때는 목적격 조사가 있지만 '비추다'를 쓰지 않고 '비치다'를 쓴다.
반대로 '비추다'가 목적격 조사를 동반하지 않는 경우다. 주로 '…에 비추어' 꼴로 쓰여 '어떤 것과 관련해 견주어 보다'의 의미(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사업은 성공하기가 어렵다)를 나타낸다. 이때는 목적격 조사가 없지만 '비치다'를 쓰지 않고 '비추다'를 쓴다. 이렇듯 우리말은 그 의미를 잘 생각해야 바르게 표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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