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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 아니다
말이란 줄여서 쓸 때도 있고, 이미 줄어든 말을 쓸 때도 있다. “그것이다, 그것이야!”를 줄인다면 “그것이다, 그거야!” “그거다 그거야!”가 나오고, 나아가 “그기다 그기야~” “기다 기야~”까지 갈 수 있을 터이다. 현재 국어사전 풀이에서는 ‘기다’를 ‘그것이다’가 줄어든 말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기다 기야’가 성립하게 되고, 실제 쓰기도 한다. ‘그기다’는 무엇인가? 이는 ‘그+기다’로 나눌 수 있는데, ‘기다’는 ‘것이다’에 해당하므로 ‘기다’는 ‘것이다’가 줄어든 말로도 봐야겠다. ‘이+기다, 저+기다, 조+기다, 요+기다’ 들이 쓰이는데, 이 말들은 더 줄어들지 않는다. 국어사전에서 ‘게’를 ‘것이’의 준말로 다루듯 ‘기’ 역시 ‘것이’의 준말로 다뤄야 할 성싶다. ‘기’는 또한 ‘곳’의 뜻으로 ‘요기·조기·저기·여기·거기’에서 그 제한적인 쓰임을 찾을 수 있다.
‘기다 아니다’에서 ‘기다’는 ‘그것이다’란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쓰임새는 ‘그러하다·그렇다/ 그와 같다/ 맞다’ 쪽에 더 가깝다. 여기서 ‘기다’의 뜻갈래를 ‘그렇다’와 같은 쓰임으로 하나 더 잡을 필요가 생긴다. 그래야 ‘기다’의 현실적 쓰임을 가다듬을 수 있겠다. “기다 아니다 말이 없다”면 달리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 ~, 그것이다 그것이 아니다 ~, 있다 없다 ~, 맞다 틀리다 ~” 정도까지 갈 수 있겠다.
흔히 “긍정도 부정도 아니하다, 시인도 부인도 아니하다, 확인도 부인도 아니하다’란 말을 쓴다. 영어 익은말(NCND/neither confirm nor deny, refused to deny or confirm, declined ether to affirm or to deny)을 뒤친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기 곤란할 때, 투명하지 못할 때를 상정하여 나온 표현이긴 하나 무척 식상해진다. 이를 대체할 말로 ‘기다 아니다 ~’를 써봄직하겠다. 물론 여기까지 가지 않아도 이런 말을 비켜갈 간략한 표현은 많다.
△CIA의 고전적인 답변 방식으로 내가 대답하자면, 그런 시설이 존재하는지에 관해선 긍정도 부정도 않겠다 → ~ 그런 시설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 줄 수는 없다.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해선) 미국도 몇십년 동안 엔시엔디(NCND) 정책으로 일관했는데, 우리의 기본 입장도 엔시엔디다. → 미국도 몇 십년을 ‘모른다’(NCND)는 정책으로 일관했는데, 우리의 기본 정책도 그렇다.
△홍 의원은 “그건 이야기 할 수 없다”며 당권출마에 대한 말을 회피하면서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당권출마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한 모습이다 → ~ 당권 도전에 대한 말을 피하면서도 기다 아니다 확인을 하지 않고 있어 ~.
△지마켓은 상장 추진을 두고 “노 코멘트”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증권가에서는 하반기 상장 추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 지마켓 쪽은 하반기 상장 문제를 두고 ‘할말이 없다’며 확인을 하지 않고 있지만 증권가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라크 납치범들이 미국의 사주를 받고 그를 납치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 이라크 납치범들이 미국의 사주를 받고 그를 납치했을 가능성을 두고도 그는 기다 아니다 언급이 없었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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