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용문
“‘집채만 한 파도’와 ‘집채를 덮을 만한 파도’의 차이점, 구분되세요?” 국립국어원이 새해 들어 펴낸 <쉼표, 마침표.>에 실은 글의 제목이다. 조사와 보조사는 앞말에 붙여 쓰고 의존명사는 띄어 쓴다는 걸 설명한 글이다. 앞 문장의 ‘만’은 보조사, 뒤 문장의 ‘만’은 의존명사이니 띄어쓰기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 띄어쓰기 구별은 이래저래 쉽지 않은 일이다. 작은아버지의 집은 ‘작은집’으로 붙여 쓰지만, 규모가 작은 집은 ‘작은 집’으로 띄어 써야 하니 말이다.
글쓰기에 띄어쓰기가 있다면 말하기에는 끊어 읽기가 있다. 끊어 읽기는 현행 어문규정에 정리되어 있는 게 없으니 띄어쓰기보다 더 까다롭다. 같은 기사나 원고로 뉴스를 내보내고 낭독을 해도 사람에 따라 끊어 읽기가 달라지는 현상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끊어 읽으려면 어절보다 뜻에 따른 ‘의미절’을 따져야 한다. 지구 온난화 방지 협약의 하나인 ‘교토의정서’를 ‘교토의 정서[교토에 정서]’로 잘못 말한 방송 진행자가 톡톡히 망신을 당한 것도 문장의 뜻을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송을 비롯한 입말의 세상에서는 띄어쓰기보다 중요한 게 끊어 읽기이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인 <레미제라블>의 원제목은 ‘Les Miserables’로 ‘불쌍한(비천한) 사람들’이니 뜻에 따라 끊어 읽으면 ‘레-미제라블’이다. ‘레미-제라블’이 아닌 것이다.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은 여주인공 ‘프리마돈나’(prima donna)는 ‘제1의 여인’이란 뜻이니(브리태니커) ‘프리마-돈나’가 된다. 신라 화랑인 ‘기파랑’(耆婆郞)을 기린 향가는 ‘찬-기파랑-가’(讚---歌), 죽은 누이(亡妹)를 위한 향가는 ‘제-망매-가’(祭--歌)로 읽는 게 맞다. ‘잉어가 황허강 상류의 용문(龍門)을 오르면(登)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등용문’은 그래서 ‘등-용문’으로 끊어야 제 뜻에 어울리는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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