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 흐린 온누리
‘사람이 아니무니다.’ 코미디의 대사가 아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았던 ‘올해의 인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잡지가 1972년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기 시작한 이후 사람이 아닌 것을 뽑은 첫 주인공은 컴퓨터. 당시 ‘경쟁자’는 베긴 이스라엘 총리, 대처 영국 총리, 영화 주인공 ‘이티’(ET)였다. 30년 전인 1982년의 일이다. 이렇듯 서양문화권은 한해를 마무리하며 사람이나 사물을 떠올리지만, 한자문화권인 한·중·일 삼국은 관념적인 한자로 지난해를 돌아본다.
<중국신문망>은 ‘올해의 한자’로 ‘멍(夢)’을 선정해 발표했다. 올림픽 개최와 유인우주선 발사, 노벨상 수상을 비롯한 ‘중국의 꿈’이 실현된 성취감을 담은 것이라고 언론은 풀이했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꼽은 ‘올해의 한자’는 ‘가네(金)’이다. 소비세 증세 논란 따위의 돈 문제로 떠들썩했던 일본 경제를 반영한 것이라 한다. 한국의 <교수신문>이 고른 ‘올해의 사자성어’는 ‘거세개탁(擧世皆濁)’이다. ‘정권 끝자락에서 윤리와 도덕이 붕괴되고 편법과 탈법이 판을 치는 세상’을 반영했다는 게 선정에 참여한 한 교수의 말이다.
한·중·일 삼국이 한자에 세상을 담아내는 방법도 다르다. 중국과 일본은 한 글자, 한국은 사자성어이다. 고려 중엽부터 전해오는 시조의 4음절 음보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방식의 다름은 ‘올해의 사자성어(한자·인물)’에서도 드러나는 걸 보니, 미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이 <생각의 지도>에서 공자의 후손과 아리스토텔레스 후손의 문화를 비교분석한 것은 괜한 게 아니었다. 한글날이 23년 만에 공휴일이 되는 새해부터는 ‘올해의 낱말(글월)’도 뽑아보면 어떨까. ‘거세개탁’이라면 ‘두루 흐린 온누리’나 ‘흐린 세상’, 시빗거리 많은 세상이라면 ‘따따부따’(딱딱한 말씨로 따지고 다투는 소리, 또는 그 모양)처럼 말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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