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인습의 굴레 속에서 자아를 구현한 여류시인 - 허난설헌(1563-1589, 27살, 병사).
허난설헌은 조서 규방 문학의 새 지평을 연 대표적 인물이다 그녀는 평생을 집안의 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던 조선 여인들의 한을 시로써 표현하여 생명 있는 문학의 진수를 선보인 여류 문인이다. 그 시절에 여자가 학문이나 시를 배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하물며 두터운 남존여비 사고의 각질을 뚫고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재능이 있어 작품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알고 숨막히는 인습의 굴레 속에서도 감연히 붓을 들어 올올이 아름다운 꽃 시를 수놓았으며, 그녀의 재능을 존경하고 아까워하여 누이의 작품을 모아서 세상에 소개한 동생이 있었기에 작가의 감정이 소롯이 담겨 있는 시들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시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작품들은 모두 스스로 불태워 버렸으며, 다른 곳에 남겨진 것도 없애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녀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어찌 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담아내는 수단으로 붓을 잡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성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다른 규방 작품들과 좋은 대비가 된다. 그녀 이외에 조선의 다른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은 고달픈 일상사의 감정 표출이 억제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부종사', '여필종부'로 대변되는 당시의 인습과 자신의 감정표현까지 억제할 것을 강요당하는 현실에 항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많은 작품들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유탕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개방적이고 다정 다감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녀는 숨막히는 시집살이에 질식되어갔고 상처받기 쉬운 여린 심성 때문에 작은 아픔도 서럽기만 하였다. 그래서 애초의 밝고 맑았던 심성이 차츰 우울과 번민으로 어두워져가면서 하루하루의 지친 삶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는지 그녀는 가장 무성하고 아름다워야 할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었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
허난설헌은 조선 13대 왕인 명종 18년(1563년)에 강릉 초당리에서 초당 허엽과 김씨 부인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양친 허씨의 명문가 출신이며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동지중추 부사 등 내외의 요직을 지냈던 인물로 첫 번째 무인 한씨가 1남(허성) 2녀를 두고 죽자, 두 번째 부인 김씨를 들여 2남(허봉, 허균) 1녀(난설헌)을 얻었다. 전처 소생 자식들은 대체로 아버지의 유학자다운 면모를 많이 물려받았는데, 후처 소생들은 어머니 김씨의 예민한 감수성을 닮아서 모두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을 보였다. 난설헌의 본명은 초희였고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이었는데 그녀의 자인 경번에 대해 훗날 세간에 억측이 생기기도 하였다. 당나라 시인 번천 두목지를 경모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이름으로 번연히 남편이 있는 사대부가의 여인으로 합당하지 않은 처신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5살 때 아버지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어서 그때부터 한성의 건천동에서 살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동생 균과 함께 글공부를 같이 배웠는데 둘째 오빠 허봉이 초년의 글 선생이었고, 그 후 서애 류성룡과 서얼 출신 시인 손곡 이달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그녀의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에게서 수학하여 화담의 도교적인 분위기를 체득하였던지라 집안에 도교 관련 서적들을 많이 소장했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이런 책들을 통해 신선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길렀는데, 7살때에 신선 세계의 광한전에서 백옥루라는 누각을 새로 짓고 있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그 건물의 상량문을 자신이 직접 지어 보기도 했다. 이 시가 바로 명나라의 문인 조문기가 "마치 신선이 되어 백옥루에 올라 있는 느낌이 든다"고까지 극찬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다. 그녀의 집안은 일반적인 사대부가와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어서 남매간의 우애도 유별나게 좋았으며, 자랄 때 그녀는 남자 형제들과 큰 차별 없이 같이 공부하면서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냈다. 그러한 집안 경향은 그 후 오빠 허봉과 동생 허균의 행적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점은 엄격한 사대부가의 풍속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던 배다른 큰오빠 허성이나 두 언니들과 좋은 대비가 되기도 한다. 또한 그녀는 시인으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데다 그녀의 예민한 감수성이 시 선생 손곡의 낭만적인 시풍에 영향을 받아 성품마저도 다소곳함보다는 자유 분방하였다.
그녀의 시 선생이었던 손곡은 3당시인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는데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백락천의 시풍을 많이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백락천은 당나라 시인으로 고통받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편에서 시를 썼던 사회파 시인으로도 유명한데 이러한 그의 경향이 손곡을 통해서 난설헌에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고달픈 환경과 절망스러운 생활
난설헌은 17살 때 둘째 오빠 허봉이 중매를 서서 안동 김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 신랑 김성립은 그녀의 오빠 허봉과 호당에서 사가 독서하던 동료인 김첨의 아들로서 그녀보다 한 살 위였다. 그녀의 시집은 대대로 명문가로서 시할아버지 김홍도는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홍문관 전한을 역임하면서 명종대에 윤원형을 탄핵하다가 죽었으나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증조부 김로는 첨중추 부사를 지냈으며, 시고조부 김희수도 대사헌까지 역임한 바 있었다. 그야말로 더 이상 고를 수 없는 최고의 집안으로 시집간 것이지만 그녀의 불행한 삶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시집의 분위기는 친정과는 완전히 다르게 엄격한 사대부가의 표본과 같은 모습이었다. 시어머니인 송씨 부인도 이조판서를 지낸 송기수의 딸로서 그 아버지의 엄격함을 그대로 배우고 자란 여인이었다. 완전히 바뀐 생활 환경에서 예민한 감성을 가진 난설헌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녀는 자라면서 실과 바늘보다 먹과 뭇을 더 가까이 하였기 때문에 가정 살림에 익숙하지도 못하였다. 자연히 반듯한 시어머니와 뜻이 맞지 않았고, 남편과의 사이도 썩 좋지 못했다.
가정에서 점점 소외되어 간 그녀는 더욱 시문과 독서에 몰두하여 텅빈 가슴을 메우려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져 갔다. 게다가 가녀린 심성을 가진 새색시의 한은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 때문에도 갈수록 쌓여만 갔다. 그녀가 시집 온 이듬해에 아버지가 상주의 객관에서 돌연히 세상을 떠났고, 그 3년 후에는 그녀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해 주던 둘째오빠 하곡 허봉이 동인의 선두에 서서 율곡을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믿고 의지하던 두 기둥이 모두 그녀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더구나 슬하의 두 자식이 모두 어려서 죽자 그녀의 삶은 삭막함과 애절함에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그녀가 죽기 한 해 전에는 둘째 오빠 하곡이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관직에 뜻을 잃고 세상을 유랑하다가 금강산에서 병사하여 삶에 대한 의지의 끈이 더욱 희미해졌다.
친정의 배다른 큰오빠 악록 허성은 근엄하여 심중을 하소연하기도 어려웠고, 동생 교산 허균은 아직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어린 소년일 뿐이었다. 천지간에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진 외톨이처럼 느껴진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몽유 광상산'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27살 되던 해(1589년) 어느 날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단장한 후에 집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그동안 자신이 시를 짓고 책을 읽던 초당에서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
"올해는 내 나이 세 번째 아홉수에 해당하는 해인데 마침 오늘 연꽃들이 서리를 맞아 붉게 변했으므로 미리 말했던 것처럼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지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 나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는 조선 땅에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
사후에 다시 태어난 여인
2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규방 여인의 존재와 그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특이하게도 명나라에서 먼저 그녀의 작품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널리 애송하게 된 후의 일이다. 중국인들 중에서 제일 먼저 그녀의 시를 접한 인물은 정유재란 당시에 명의원군을 따라 조선에 온 오명제라는 시인이었다. 그는 한때 허균의 집에 머물렀는데 허균으로부터 난설헌의 시 200여수를 전해 받고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조선시선'이라는 시집에서 이를 소개했다. 그 다음으로 그녀의 시를 알게 된 중국인들은 선조 39년(1606년)에 황장손의 탄생을 알리는 사신으로 온 주지번과 양유년이었다. 이때 그녀의 동생 허균이 원접사 유근의 종사관이 되어 이들을 영접하며 친교를 맺는 과정에서 그들이 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누이의 유고를 보여주게 되었다. 난설헌의 시들을 살펴본 두 사람이 경탄을 금하지못하자 허균은 그들에게서 찬사의 서문을 받아두고 자신이 만들었던 누이의 문집 필사본을 전해주었다.
그 후 광해군 원년(1609년)에 책봉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유용과 서명도 허균에게 난설헌의 문집을 얻고자 요청할 정도로 중국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녀의 동생 허균이 광해군 10년(1618년)에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한동안 매장되었다가 숙종 18년(1692년)에 동래에서 재간행된 후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숙종 37년(1711년)에는 일본에도 이 시집이 전해져서 분다이야 지로베등에 의해 간행되어 널리 애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그녀의 시가 애송되기 전에 조선에서 완전히 사장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생 허균이 그녀가 죽은 다음해에 '난설헌고'라는 문집을 꾸며서 스승인 류성룡의 발문을 붙인 다음 필사본으로 몇몇이들에게 전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그녀의 시가 허균이 자작하여 놓고 죽은 누이가 지은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남용익이 그의 저서'호곡시화'에서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명해 주었다.
"하곡의 시는 아름답게 빼어나고 고법을 알아 동생 교산의 그것보다 훨씬 격이 높았다. 그런데 난설헌의 시는 격조가 하곡보다 높기 때문에 교산이 미치지 못한다."
허씨 가문 삼남매의 시를 짓는 능력에 대해 평을 한 것인데, 시에 있어서는 셋 중에 가장 실력이 뒤쳐지는 허균이 제일 뛰어난 난설헌의 시를 꾸며서 지어낼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난설헌의 시가 왜 중국에서 그토록 칭찬과 인기가 높았는지를 알아보자.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악부라는 시의 한 형태가 있어서 그들은 옛악부 속의 시들을 변형하여 자기만의 새로운 시를 짓는 것을 즐겨 했었다. 그런데 손곡을 통해서 당나라의 시 경향에 많은 영향을 받은 난설헌도 악부의 소재들을 재각색하여 많은 시를 지었다. 즉 난설헌의 시에는 중국 시인들의 시구와 시상들이 반영된 작품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친근감을 샀던 것이다.
허난설헌의 시 세계
현재 그녀의 시는 숙종 18년(1692년)에 동래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난설헌집'에 수록된 242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시 속에서 현실에 대한 절망스러움을 '그리움'으로 승화시켜 표현했으며, 그 질곡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상으로 '신선 세계'를 택하여 정신적 탈출을 시도했다. 그녀의 숨막힐 것 같은 자신의 현실을 이겨낼 수 없자 그것을 스스로 순간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부질없는 찰나의 고통에서 탈피하는 도피처로서 신선 셰계를 동경하여 자신을 현세의 사람이기보다는 선계의 존재로 감정이입을 했던 것이다. '유선사'라는 제목의 87수나 '동선요'등 신선 셰계와 관련된 100여 수는 모두 현실의 고통 때문에 환상의 세계에 절실하게 빠져들었던 그녀의 모습을 대변하는 내용들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몽유 광상산'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신선 셰계와 인연이 있는 존재로 묘사하였던 것만을 보아도 그녀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선계를 동경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어릴 적에 많이 보았던 도교 관련 책들의 영향도 컸던 듯하다.
또 하나 그녀의 시의 큰 특징은 악부체 시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선유사'를 비롯하여 밝고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그려진 20여 편의 '궁사'들을 포함한 170여 수가 악부체 형태로 지어졌다. 악부체의 특징은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시의 시상이나 구절 등을 빌려와서 자신만의 새로운 시로 재구성해 내는 형태의 시작방법인데, 대체로 제목이 요, 사, 언, 곡, 악, 행, 음 등으로 끝나며 중국적 소재가 많이 인용되었다. 또한 그녀의 시는 악부체 경향과 함께 시어가 풍요롭고 화려한 것은 물론 현란한 감정 또한 전편에 풍성하게 흐르는, 당의 시풍이 두드러진 것이 특색이다. 이것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3당 시인으로 일컬어지던 그녀의 스승 손곡 이달의 영향 때문이었음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감정과 현실을 숨김 없이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그 가치가 인정된다. 그녀의 작품을 접해보면 거기에서 배어나오는 그녀의 현실을 느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그녀의 지나온 삶을 오늘날에도 마주 앉아 대화하듯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실제 작품 감상
그녀의 시를 내용이나 소재 면에서 대별해 보면 크게 네 가지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행복하고 꿈 많은 시절을 노래한 것이고, 둘째는 불행과 절망 가운데 그 한과 아픔을 새겨낸 것이며, 셋째로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을 담아낸 것과, 넷째로는 사회에 대한 원망과 걱정을 토로한 것 등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녀의 삶과 죽음을 조명해 보는 의미에서 행복과 불행을 다룬 작품 몇 편만 감상해 보자.
인가여반 경추천, 결대반건 학반선, 풍송채승 천상거, 패성시락 녹양연.
'이웃집 여자 친구와 그네뛰기 경주할 적에 수건으로 허리춤을 질끈 동여매고 신선인 양 반쯤 배운 모습이 바람을 일으키며 오색 그넷줄을 타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데 우거진 버드나무 위로 패물 소리만 흩날리는구나'
그야말로 세속적인 근심이 하나도 뭍어나지 않는 꿈 많던 소녀 시절의 모습을 밝고 가벼운 분위기 속에 그려내고 있다. 오색 새끼로 꾸며진 그네를 타고 창공을 차고 오르는 광경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는 듯하다.
호리월초명, 채연중야귀, 경뇨막근안, 공경원앙비.
'이윽고 돋은 달이 호수로 비쳐드니 연 캐던 조각배는 밤으로만 돌아오는데, 저 배야 기슭으로 들지 말아라. 단잠 든 원앙이 놀라 날아가겠다.'
이 시는 신혼의 단꿈을 노래한 것으로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여인의 바람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한 시간도 잠시뿐이었고 그녀에게는 시집살이의 고통과 절망스러운 나날들이 닥쳐왔다. 그녀는 부푼 낭만과 정열을 뒤로한 채 수심과 고뇌를 안고 생활해야 했고 그것이 다감한 그녀의 가슴에 오롯이 상처로 남아서 한으로 쌓여갔다. 이러한 불행한 기시에 썼던 작품들에는 그녀의 심정이 그대로 배어 나온다.
영영창하란, 지엽하분방, 서풍일피불, 영락비추상, 수색종조췌, 청향종불사, 감불상아심, 체루첨의몌.
'창 아래 피어난 아름다운 난은 가녀린 줄기 같은 이파리가 그리도 예쁘기만 하였는데, 가을 바람 소슬함에 그 잎마저 애처롭게 흔들리더니 시들어 떨어지며 찬 서리를 슬퍼해야 하는구나. 빼어난 그 자태가 시들어 떨어진다 해도 맑은 향기는 끝내 다하지 않겠지만 초라해진 모습에 마음이 상하여 흐르는 눈물로 소매를 적시는구나'
난 속에 자신을 투영시켜서 서리 맞는 난이 영락하듯이 아름다운 모습에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스스로 아무리 힘들어도 맑은 향기만은 잃지 않겠다는 애처로운 다짐을 하고 있다. 그녀의 불행은 시집살이의 어려움과 남편과의 소원한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어린 자식 둘을 강보에서 잃어버리고 그 애끓는 모정을 가눌 길 없어 지은 '곡자'라는 작품에는 그녀의 가슴에 일었던 비통이 절절이 묻어나온다.
거년상애녀 금년상애자, 애애광릉토 쌍분상대기, 소소백양품 귀화명송추, 지전초여혼 현주전여구, 응지제형혼 야야상추유, 종유복중해 안기기장성, 낭금황대사 혈읍비탄성.
'지난 해에 잃은 딸과 올해에 잃은 아들을, 울며 울며 묻던 광릉 땅에 두 무덤으로 마주섰구나, 백양 나무에 소슬바람 불고 소나무 숲에는 귀신불이 밝을 때, 지전으로 너희 혼을 불러놓고 무덤 위에 술 부을 뿐이지만, 너희 형제 혼은 서로 알아보고 밤이 되면 어울려 놀겠지. 뱃속에 새 생명이 생긴다 한들 다시 낳아서 잘 자랄 수 있을까. 허무한 황대사만 읊조리고 슬픈 울음을 삼키며 피눈물만 흘릴 뿐이구나.'
어린 자식들을 앞서 보내고 그녀는 더욱 자신을 잃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참척의 고통은 그녀에게 살고 싶은 의욕을 모두 빼앗아 가버려서 사슬 같고 절망스러운 삶을 어서 빨리 마감하고 싶은 심정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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