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우국 충정의 상승장군 이순신 (2/2)
한산도, 부산포 대첩
육지에서는 무인지경으로 진격하던 왜군이 해상에서 이순신에게 연패를 당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노하여 와키사카, 구키, 가토 3인의 수군장이 힘을 합쳐서라도 단시일 내에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개전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아예 도외시하고 육전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명령을 받고는 부산에 총집결하기로 하였다. 또 이순신의 관할인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하여 육지에서도 금산 부근의 병력을 증강시킨 후 서진 태세를 갖추고 있어서 이순신은 수륙 양면으로 협공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이순신은 왜군이 합동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선제 공격으로 적의 예봉을 차단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3차 출격을 위해 다시 원균, 이억기와 합세한 후, 대격전을 앞두고 7월 7일 당포에 닻을 내렸다. 당포에서 적정을 탐지해 보니 70여 척의 적선이 견내량(현 통영)에 나타나 있었다. 이 왜군 전선들은 와키사카 지휘부대로서 다른 부대가 채 집결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전공을 얻기 위해 단독으로 출동한 상태였다. 견내량은 우리 나라 남해안의 일반적인 특성 그대로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내해에서는 대규모 해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결국 진격을 포기하고 또다시 적군을 외양으로 유인해 섬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 유명한 한산대첩의 막이 다시 드디어 오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전쟁 발발 후 전투과정을 보면 이순신의 작전 수행상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우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내해에서의 전투를 지양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을 충분히 숙지한 결과이며 혹시라도 전세가 불리한 적군이 육지로 도망하여 내지에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로는 적선과 아군 전선의 구조적 차이와 적군의 전투방법까지 파악한 다음 대처하고 있는 점이다. 왜군의 배는 먼 거리를 이동하여 원정해야 하는 만큼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 배의 모양이 가늘고 길며, 바닥은 뾰족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반면에 조선의 배는 주로 연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갑판이 넓고 배 밑바닥도 평평했다. 즉, 왜선은 안택선 또는 관선이라고 하는 형태였고, 조선의 함선은 판옥선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배는 왜선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회전성이 좋았다. 그래서 추격하기에는 만만해 보이지만 유인 작전시 회전 반경이 적기 때문에 일시에 포위망을 형성하기 쉬웠다. 또 왜군의 전투 방법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활이나 총통 또는 함포 공격을 하기보다는 자기 배를 상대편 배에 접근시킨 후 판자로 양 배를 연결시킨 다음 병력이 상대편 배로 돌입하는 백병전에 능했다. 그런데 조선 배들은 갑판이 상당히 높아서 왜군 전선들과 근접해도 병력들이 건너오기 좀처럼 힘들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거북선은 갑판 자체가 철판으로 덮여 있는 데다가 그 위에 뾰족한 쇠못까지 촘촘히 박혀 있어서 적군이 기어오를 수조차 없었다.
세 번째로는 아군에게 유리하고 적군에게는 불리한 전법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학익진이라는 것으로서 적선을 자신이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한 뒤 일거에 포위하여 집중 공격하는 전법이다. 이렇게되면 왜선은 회전 반경이 크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이때에 판옥선의 높은 갑판에서 활을 비오듯이 쏘면서 집중 포화를 퍼부어 대면 왜군은 속수무책으로 궤멸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철갑선인 거북선이 왜선에 그대로 돌진하여 충돌하면 길기만 하지 충격에는 약한 왜선은 동강이 나거나 파손되어 제기능을 잃고 침몰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이순신은 양국 전선의 차이를 파악하여 적의 단점을 이용하고, 아군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작전 환경을 조성한 후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싸우면 싸우는 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한산도 싸움에서도 그러한 이순신의 전법의 백미를 볼 수 있다. 우선 5척의 전선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선을 공격하여 적을 유도하자 적군은 일제히 추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적군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전 함대가 뱃머리를 급선회하여 왜군의 좌우양편으로 마치 학이 날개를 편 것처럼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 결과 왜선 73척 중 42척을 격침시키고 17척을 나포하는,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를 거두고 임진왜란의 전세가 바뀌게 되었다.
한산대첩 이후에도 이순신은 안골포(현 창원군 웅천면)까지 이동하여 또 다른 왜군 함대를 발견했다. 이곳에 있던 왜군들은 구키와 가토 휘하의 부대들이었는데 와키사카 군의 대패 소식을 들었는지 끝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부득이 조선 수군은 각 전선들이 교대로 공격하는 작전을 펴서 하루 종일 격전을 계속한 끝에 왜군 선단을 대부분 격파하였다. 이후 근처 도서를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더 이상의 왜선을 발견하지 못하자 7월 13일에 좌수영으로 귀환하였다.
이렇게 3차에 걸친 출동 결과 가덕도 서쪽 방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순신은 왜군의 본진이 있는 부산포 공략을 마음놓고 추진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또한 신중한 이순신의 작전 수행 방법을 잘 알 수 있다. 즉, 완전한 승산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으며, 승리가 확실시되더라도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고려하였다. 그러나 일단 결정된 이후에는 불굴의 용기와 멸사의 정신으로 공격에 임하여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순신은 드디어 8월 24일에 전라 좌, 우수영 소속 166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부산을 향해 출격하였다. 이제 양국 해군의 본진이 운명을 건 대결전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9월 1일에 절영도(현 영도)에 이르러 적정을 탐색해 보니 왜선 약 500척이 동쪽 해안에 세 개의 진으로 나뉘어 정박해 있었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고도 승선하여 해상전을 전개하려 하지 않고, 이미 요새화한 부산포 내에 틀어박혀 강력한 저항을 시도하였다.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군의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전면적인 직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종일토록 치열하게 전투한 결과 1,00여 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지만, 아군도 상당수의 사상자를 내는 등 피해가 컸다. 특히 매전투마다 앞장섰던 녹도 만호 정운의 전사는 이순신의 마음을 애통하게 했다. 이렇게 이순신의 연승으로 조선 수군은 남해에서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이에 따라 전라 좌수영은 여수에서 한산도로 본영을 옮겨갔다. 이것은 한산도가 남해 제해권의 목줄에 해당되는 요처이기 때문에 이곳에 본영을 구축해야만 왜군의 서쪽 해상 진출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왜군 중심 세력을 그의 공격권 안에 두어서 언제라도 격멸시킬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산도는 원래 이순신의 관할 구역 밖이었으므로 실제로는 그의 부대 이외에는 왜군과 대적할 만한 조선 수군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선 조정은 이러한 사정을 참작하여 선조 26년(1593년) 8월에 그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의 지휘권을 일원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순신의 나이 49살로 무관으로 과직 생활을 시작한 지 17년만에 무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이라기 보다 자신이 무너지면 조선 수군 전체가 궤멸된다는 엄청난 책임감이 과중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또한 한산도는 왜군의 전진 기지가 설치되어 있는 거제도와는 빤히 마주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 수역은 남해에서 쌍방간 동서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세력을 잃으면 남해의전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해상에서는 긴박한 대치 국면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에 명군과 왜군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왜군은 육지에서 전승가도를 달리고는 있었지만 명군의 참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소강 상태를 보이고, 해상에서의 연패로 후방이 교란되고 잇었으므로 강화회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명군은 명군대로 전쟁을 속히 끝내고 귀국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므로 강화회담은 조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략군과 참전군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별수 없이 강화회담 추이에 관심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었다.
모함과 백의종군
강화회담이 지루하게 진행되자 해상에서도 정면 충돌이 억제되고 있는 가운데 이순신은 끊임없이 적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면서 군비 보강과 군사 훈련에 몰두하였다. 이에 따라 거제도 서쪽의 외딴섬에 불과했던 한산섬은 최전방 해군 요새이자 조병창이며 완벽한 군수 조달지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많이 줄어들고 대치 상태가 지속되자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해묵은 불화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수군 총지휘자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도 나이도 많고 선임이었던 점을 내세워 항상 불만을 가지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였다. 더구나 원균은 조정의 고관 대작은 물론 왕까지도 잘 알고 있었으나, 이순신은 류성룡이나 이원익 이외에는 별다른 후원자가 없었다. 말하자면 원균은 전형적인 정치 군인이었고 이순신은 야전 군인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부득이 이순신을 수군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였으나 원균과 조정은 그 권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리고 원균은 임진년 전투 과정에서 자신의 지휘 병력을 잃어버린 입장이면서도 대책과 능력도 없이 강공만을 주장하다가 대부분 이순신에 의해 배척되자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순신이 전라 좌도 수군 책임자이면서도 경상도 수군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에서 경상도 수역의 제일선까지 담당하여 싸우면서 전승을 거두자 자존심마저 상해 있었다.
사실 왜란이 발생하고 육지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는 당시 전황에서 이순신마저 해상에서 적을 막지 못했다면 왜군은 육로뿐 아니라 수로를 통하여 서해로 진격하여 육해군 협격으로 조기에 조선 조정을 항복시켰을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은 그 후 청군 침입시 적군의 침입로를 한 곳에서도 막지 못하자 일거에 무너졌던 점을 대비하여 보면 여실히 증명된다. 어쨌든 원균은 이순신의 지휘권을 부단히 무시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를 전공에 대한 불만때문에 야기된 갈등으로 단순히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부득이 원균을 경상 우수사에서 충청병사로 전보시키면서도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통제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주력 수군은 이순신이 만들어 놓은 전라 좌수영군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순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강화 회담이 진척되지 않아 대치 상태가 길어지자 선조를 위시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전략 그 자체를 불신하기 시작하였다. 뾰족한 방법도 없으면서 항상 승리했던 수군이 왜군을 격멸시킬 수 있다고 기대한 때문인지 이순신에게 공격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었다. 당시 왜군들이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강화 회담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서 왜군을 격파하려면 육지에서 견딜 수 없는 공격을 가하여 바다로 몰아내고 이순신의 수군이 퇴로를 차단하여 이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섬멸하는 작전을 펴야만했다. 따라서 명군은 강화 회담에만 매달려 있고 조선 자체 군사력으로는 왜군과 육지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순신의 수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해서라도 적을 공격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러한 무모한 공격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육상에서의 적극적인 공격을 요청하였다.
바다에서의 전투라면 또 모르지만 병력 수에서 절대 열세인 수군이 상륙하여 육상전을 감행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만일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그나마 마지막 보루인 수군마저 궤멸되어서 조선은 군사적으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왜군은 강화 회담을 깨버리고 또다시 전면전을 불사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이순신이라고 이 피말리는 대치 형국이 빨리 해소되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난중 일기의 이 시기 부분을 보면 과중한 업무와 코앞에 적을 사령관으로서 신경이 곤두선 데다가 조정의 몰이해 때문에 괴로워하여 몸이 아프다는 기록이 수없이 나온다. 심신이 급속히 상하여서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처럼 팽팽하게 대치한 상태에서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움직이는 쪽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병력과 장비, 전투력 모두에서 월등히 우세한 왜군이 남해안 일대에서 장기간 응거하면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던 것도 이처럼 철저하게 버티고 있는 이순신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자기 영토에서 5년간이나 머무르고 있는데도 육지에서는 한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이순신의 소극책만을 탓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에 대한 조정의 오해가 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략을 수정하지 않았다. 숨막히는 대치 상황에서 그 혼자 힘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왜군이 견디지 못하고 먼저 움직이는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주위의 비판 때문에 이 전략을 수정하는 것은 자멸을 자초하는 것으로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 조정의 입장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던 왜군은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이순신을 제거할 수 있는 계책을 꾸며내었다. 이른바 반간계를 수립한 것이다. 왜장 고니시는 또 다른 왜군 지휘관인 가토와 불화설을 조선측에 은근히 흘린 후 가토가 일시적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환하는 일정을 조선군에게 알려줄 테니 조선 수군이 매복했다가 이를 제거해 달라고 은밀히 요청하였다. 이 거짓 정보를 접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하였고 이순신은 왜군의 계략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동했다. 왜군의 함정을 의심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느라 출동이 다소 지연되기도 하였지만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로 돌아온 뒤였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동을 지연하여 잡을 수 있는 왜장을 놓쳤다고 이순신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해졌으며 마침내 이순신을 문책하기로 결정했다. 이때에는 지금까지 이순신을 옹호해 주던 류성룡조차도 그를 더 이상 옹호해 줄 수 없었다.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휘관을 의심만 하다가 결국에는 적의 반간계에 속아 처벌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조선은 적전에서 스스로 약점을 노출시킨 꼴이었다. 결국 이순신은 정유년인 선조 30년(1957년) 2월 25일에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그 직책을 인계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다가 재조사를 통하여 결백이 증명되자 4월 1일에 겨우 사면되어 또다시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 종군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당시 권율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 중에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이용해서 먼길을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리운 아들을 지척에 둔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당시 이순신 위로 두 형은 이미 오래 전에 병사하여 이순신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순신에 대하여 각별한 의지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통한의 심정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뛰며 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고 적고 있다. 겨우 입관을 마치고 4월 19일에 다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난중일기에 "울며 부르짖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라고 그때의 아픈 마음을 적고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상태에서 그가 경상도 초계에 있는 권율의 본진에 도착한 것은 50여 일이 지난 6월 8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권율의 자문 상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7월 16일에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까지 전멸하였다는 급보를 접하게 되었다.
정유년 전투의 대승, 그리고 죽음
마침내 정유년 왜군의 재침이 시작된 것이다. 당황한 조선 조정은 8월 3일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하였고, 이에 그는 곧바로 순천을 거쳐 회령포(현장흥)에 도착해 보니 남아 있는 전선이라고는 12척에 불과하였다. 그가 그토록 애써 가꾸어 놓은 함대가 모두 궤멸되어 버린 것이다. 비통한 마음을 삼키며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서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며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9월 14일, 왜군 수백 척이 재차 공격을 시도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명량 해협에서 이를 대적하기 위해 겨우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명량 해역은 일명 울돌목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간조와 만조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대적을 상대하기 위해 넓은 바다를 피해 이 좁은 해역을선택한 것이다. 이순신의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명량 해협은 조류가 빠른 데다 좁은 지형이기 때문에 100여 척의 적선은 행동이 부자유스러워 조선 수군은 적은 수의 함선으로도 적에게 포위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대등한 싸움을 펼칠 수가 있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믿을 수 없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둬 서해를 통하여 북상하려는 왜군의 의도를 또 한번 분쇄하였다. 명량 대첩 이후 고금도(현 완도)로 진을 옮기고 군세를 거의 회복해가던 이듬해(1598년)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철병을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명군 제독 진인을 설득하여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기로 하고 11월 19일 새벽에 노량 해역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기습하였다. 이리하여 양군 합쳐 1,000 여 척의 대선단이 서로 충돌하는 마지막 대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한창일 때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고 홀연히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죽음을 안 것은 몸종 김이와 맏아들 회, 그리고 조카 완세 세 사람이었다. 그토록 일구월심 소원했던 왜적을 섬멸하는 마지막 전투의 절정에서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마치 자신의 할 일은 이제 모두 끝났다는 듯이 마지막 싸움의 대승을 뒤로한 채 험난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왜선 200 여 척을 격침하는 전쟁발발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이순신은 풍전등화 같던 조국을 수호하고 전장에서 최후를 맞은 참군인의 모습을 남긴 채 장렬히 산화하였다. 그리고 이 싸움을 끝으로 7년간 전화에 시달리던 조선도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또한 이 싸움의 결과가 이순신이 그 동안 취했던 전략이 맞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순신이 대치하고 있던 상태가 절대 적을 두려워 한 소극책이 아니라 현실적인 상책이었으며, 적을 바다로 끌어내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판단은 정확했던 것이다.
한 몸을 모두 던져 조국을 지켜냈던 그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본가가 있던 아산의 어라산 기슭에 잠들었다. 5.16 군사 쿠데타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그에 대한 영웅화 작업을 추진하는 바람에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지만, 그의 멸사봉공과 우국충정의 정신만은 후세에 길이 기려야 될 본보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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