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수기치인 했던 개혁의 기수 조광조 (2/2)
훈구 세력의 대반격
당시 홍경주의 딸은 중종의 후궁으로 희빈의 자리에 있었다. 아버지의 부추김을 받은 홍 희빈은 수시로 중종에게 정암의 축출을 건의하였다. 또한 심정은 중종의 다른 후궁인 경빈 박씨측도 끌어들여 궁중에 정암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도록 음모를 꾸몄다. 경빈 박씨는 반정 주도 인물인 박원종의 양녀로서 이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정암의 제거에 자신들의 장래를 건 이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결정적 타격을 가하기 위한 음헌한 계략을 꾸미는 것도 불사하였다. 먼저 홍빈을 사주하여 궁권 내에서 눈에 잘 띄는 나뭇잎마다 꿀물로 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벌레들이 이를 갉아먹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처럼 위장하였다. 주초를 합자하면 조자가 되므로 정암이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을 암시하여 왕과 궁중 세력으로 하여금 위기감과 분노를 가지고 그를 제거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 사실이 중종에게 보고되었다. 중종은 정암과 신진 사류의 지나친 이상주의와 국왕까지 가르치려는 엄격성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데다, 그들의 급진적인 개혁 추진에 끌려가고는 있었지만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이런 불길한 내용을 보고받자 극도의 위기감을 느꼈다.
홍경주 등은 자신들의 계략이 점점 무르익어 가자 중종에게 사태의 전말을 직보하겠다는 간청을 넣어 중종 14년(1519년)11월 15일 밤에 은밀히 신무문을 통해 입궐하여 왕을 독대하였다. 원래 대궐 문을 열고 닫을 때는 이 사실을 입직승지에게 알리고 열쇠도 승정원에 보관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단 한 곳인 신무문의 열쇠만은 대궐 열쇠를 총괄하여 관리하던 사약방에서 보관하고 있어서 이곳을 통하여 음모 세력들이 입궐하였다. 이날의 입직 승지가 정암 일파인 윤자임이었기 때문에 비상 방법을 강구했던 것이다. 신무문을 통해 밤늦게 대궐로 들어온 사람들은 홍경주를 비롯하여 예조판서 남곤, 공조판서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병조판서 이장곤, 화천군 심정, 병조 참지 성운과 윤희인, 손주, 방유녕, 홍숙 등이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인물은 이장곤이다. 그는 원래 정암을 후원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즈음 신진 관료들의 지나친 독선과 급진적 개혁 성향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중 음모 세력의 충동으로 뒤늦게 참가한 것이었다. 남곤 등도 거사를 모의하면서 병조판서 이장곤을 포섭하지 않고서는 병력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그들의 계획 속에 끌어들였다. 입궐한 이들은 곧바로 중종에게 달려가 정암 일파를 탄핵하였다. 탄핵의 내용인즉,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농단하고 선배와 상사를 업신여기는 것은 물론 임금을 속여서 사사로운 이익만을 취하려 하여 국정을 문란시켰다"는 것이었다. 이에 중종은 마침내 정암 일파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잡혀온 사람들은 조광조를 비롯하여 승지 윤자임, 공서린, 유인숙, 홍언필, 박세희, 박훈과 승정원 수저 안정, 예문관 검열 이구, 홍문관 응교 기준, 대사성 김식, 부제학 김구, 우참찬 이자, 형조판서 이정, 수찬 심연원 등이었다.
마침내 개혁의 기수가 꺾이다
정암 일파를 체포한 홍경주 등은 사태가 급박하여 일일이 국문할 수 없다는 핑계로 즉결 처분을 주장하였으나, 이장곤의 반대와 다소 노여움이 풀린 중종에 의해 의정부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벌하기로 하였다. 이장곤으로서는 정암 일파의 독선적 행동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모의에 참가하였으나 사태가 이렇게까지 발전될 줄은 몰랐다가 부랴부랴 불길을 진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당황스럽기는 홍경주 등도 마찬가지였다. 정암을 죽이지 않고는 자신들이 안전하지 못하겠기에 극구 처형시킬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정광필, 안당 등 의정부 재상들이 관대한 처분을 간청하여 날이 밝자 잡혀온 대부분이 석방되었으나, 정암,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 등 8명은 부득이 국문을 받게 되었다. 잡혀온 이들은 모두 사심 없음과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16일 해질 무렵에 왕의 하교에 의해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4인은 사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배시키기로 잠정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정암 등이 잡혀 들어간 사실이 알려지자 성균관 학생을 비롯한 수백 명의 유생들이 대궐까지 몰려들어 정암 등의석방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런 예상치 못한 사태에 극도로 분노한 중종은 주모자를 체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궐 밖으로 내쫓게 하였으나 서로 다투어 잡혀가기를 원하는 사태가 벌어져 감옥이 부족하여 다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날 밤 재상들과일부 대신들의 간청에 의해 구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유배 조치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정암 등은 유배의 길을 떠나고 조정은 홍경주 등의 세력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김전은 우의정, 남곤은 좌찬성 겸 이조판서, 이장곤은 우찬성 겸 병조판서, 심정은 지의금부사, 홍경주는 판중추부사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에 의하여 삭훈되었던 정국 공신의 훈적이 다시 복권되고 향약의 기능을 정지하였으며, 현량과도 폐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새로 관직을 맡은 일부 사람들이 정암 등의 사면을 주장하며 관직을 사양하고 조정 일각에서는 계속 그의 구명운동이 일어나자 홍경주 등은 그의 지지 세력을 축출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를 죽이는 방법을 모색했다. 12월에 들어서자 홍경주 일파는 현량과가 불공평하게 실시되었으므로 현량과에 의해 등용된 사람들은 그 합격을 취소하고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암을 두둔하던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을 탄핵하였다. 여기에다 일부 기회주의적 유생들이 정암 등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중에 황계옥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한달 전 정암이 투옥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성균관 학생들과 많은 유생들이 대궐로 몰려가 농성할 때 주동자로 잡히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불과한 달 사이에 입장을 바꾸어 정암을 사지에 모는 일에 앞장서는 파렴치한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처음에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정암의 석방을 탄원하였으나 그가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진 것을 깨닫게 되자 위험에 처한 사람을 짓밟고 자신의 연명을 도모한 것이다. 이처럼 점점 정암에게 불리하도록 여론이 조성되어 가자, 홍경주 일파가 장악한 대간에서 이 기회에 그의 동조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연이은 상소를 통하여 중종에게 계속 압박을 가했다. 이에 중종은 온건론을 개진하던 재상 모두를 물러나게 하고 훈구 강경파들인 김전, 남곤,이유청을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이제 정암을 옹호해 줄 사람은 조정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암이 끌려간지 1개월 만에 왕은 정암과 김정, 김식, 김구 등 4인을 사사하도록 지시하여 정암으로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서고 말았으니 중종 14년(1519년) 12월 16일의 일이었다. 또, 윤자임 등 4명은 고도에 이배시키도록 하였으며, 대간에서 정암의 동조 세력으로 숙청을 요청했던 35명 중 18명을 처벌하였고, 현량과도 완전히 폐지했다. 이로써 5년 여에 걸친 정암의 개혁 정치는 그의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정암은 유배지인 전라도 화순 땅 능주에서 12월 20일에 사약을 받고 38살의 젊은 나이로 자신의 뜻을 펴나가는 길목에서 끝내 좌절하여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조광조가 조선 사회에 던진 의미
정암의 이상주의적 왕도정치 이념은 그의 생명을 앗아가 버림과 동시에 좌절되었지만, 그 이후 조선 사회 통치 질서를 구획하는 모델이 되었다. 그는 조선시대의 사회 변화에 큰 분수령을 이루는 인물로서 역사상 실제로 존재한 시간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사림을 정계의 주도세력으로 확실히 자리잡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지방의 신흥 유학자 집단이었던 사림이 정치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그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그 이후 조선의 정치는 사림의 여론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왕권에 대한 신권의 강화로 나타났으며, 조선 사회가 관료적 지배 체계로 정착되는 토대가 되었다.
학문적 측면에서도 그는 성리학의 문예적 경향의 사조를 배격하고, 순수 이론적 연구의 방향으로 물꼬를 잡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에 의하여 성리학의 이론 연구가 활발해져서 그가 만들어 놓은 이학적 풍토 아래 이황과 이이 같은 대학자가 속속 배출되어 독보적인 조선 성리학을 꽃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도덕성이 무너진 위기의시대로 진단했다. 연이은 정변과 사화로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무시되고 개인적 이해에만 집착하는 풍토가 생긴 것을 깊이 우려하였으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성현의 가르침에 입각한 도덕적 각성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천하의 근본이 되는 도를 바로 세우고, 왕과 지도층이 먼저 그러한 가치를 엄격히 지켜야만 올바른 이상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도라는 것은 아무리 세상이 변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근본 가치로서 그 연원이 하늘에 있으나 사람이 그 의지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고 정치를 펴나가는 기본이 되는 것이며, 도를 행하는 요체는 정성스러움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실제 생활에서도 항상 의관을 단정히 하고 절제된 행동을 보여주었다. 어려서 스승인 김굉필에게도 군자의 도리를 진언하여 감복하게 만들 정도로 그의 도학적 처신은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국가의 근본이 올바르게 서려면 임금이 도의 텃밭이 되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정성을 다한 뒤에 자신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대신으로 삼아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치라는 것은 마땅히 지향해야 할 도덕적 가치를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이므로 그 지향하는 바가 아무리 선하고 고귀하다고 해도 다스리는 자가 스스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갈파하였다.
그의 주장과 이론은 구구절절이 오늘의 시대에도 합당한 가치로 보여진다. 그래서 그의 좌절이 더욱 안타깝지만 당시대에서의 그의 실패 원인은 흔히 말하는 지나친 엄격함이나 급진성에서 찾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이 그가 추진한 왕도정치를 제대로 소화해 낼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믿었던 중종도 개혁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 정암이 추진하는 내용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가 스스로 한계를 느낀 시점에서 발길을 되돌렸던 것이 기묘년 그의 죽음과 비극의 실마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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