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수기치인 했던 개혁의 기수 조광조 (1/2)
흔히들 도학자라도 부르는 정암 조광조는 자기 시대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찾아내어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조선의 유교 국가적 이상을 확실하게 제시하였고, 동시대인들에 대해 도덕적 각성을 일깨웠다. 올바른 이상이 없는 사회는 인간의 존재 가치가 아예 상실되는 부도덕한 사회로 전락한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의 근본이 되는 도리를 구축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친 구도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철저하고 엄격하였으며 남을 다스리기에 앞서 자신을 수양한 수기치인의 표본이었다. 또 마음이 정성스러워야 천하의 근본이 되는 도가 굳건할 수 있으며, 정치의 실효도 거둘 수 있다고 하여 정성의 우선함을 강조하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찌 보면 간단하고 명료하다. 도리와 절의가 바로 서지 않으면 국가나 사회도 제대로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인식한 당시의 문제는 세조의 찬역과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유교적 이념의 토대 위에 건국된 조선 왕조의 존립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도덕적 교양이 모든 것에 우선 되던 사대부 계층의 존재 이유마저 의심되는 일대 가치관의 혼란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일련의 사태들은 조선 사회가 지향하고 있던 성리학의 이념적 효용성에 엄청난 타격을 초래하였고, 그로 인한 시대 정신의 혼란에 따라 국가 지도층은 심각한 분열을 야기하고 있었으며, 일반의 사고는 세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도층의 탐욕에서 비롯된 도덕적인 모순이 전 사회를 지배하여 사회 기강과 올바른 정신이 모두 무너졌다는 진단이었다. 따라서 그가 나아갈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치란 조건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가변적 존재라는 점을 너무 무시한 것이 그의 몰락을 불러오고 말았다. 충정과 열성으로 오로지 외골수의 길을 일로 매진한 것이 그의 적들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로서는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들을 처리한 것이지만, 반대로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이 많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던 것이 그의 몰락을 불러오고 말았다. 결국, 사심은 없었지만 심혈을 다하여 올바른 가치와 질서를 세워보려던 그의 단심은 하룻밤 음모로 모두 분쇄되었으니 허무한 결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고, 그 자신과 나라에 모두 불행한 일이었다.
엄격하고 단정한 성품의 소유자
조광조는 조선 9대 왕인 성종 13년(1482년)에 한성에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조원강과 민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성으로 자는 효직이고 호를 정암이라 하였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가짐이 비범하고 이목이 수려하여 다른 이들의 호감을 샀다. 17살 때 평안도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마침 희천에 유배중이던 한훤당 김굉필에게서 수학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김굉필은 사림의 비조격인 김종직의 문하로서 조선 성리학에서 도학정신의 시원을 연 인물이며, 입언수훈한 뛰어난 교육자였다. 김굉필은 그 해(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그곳으로 귀양을 와 있었으며 순천으로 이배될 때까지 2년 동안 그를 지도해 주었다. 18살 때 첨사 한윤형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항상 단정한 행동을 보여주었는데, 시묘살이를 할 때도 모든 절차를 주자가례에 어긋남 없이 실천하였다 한다. 또한 스승인 김굉필의 영향을 받아 소학과 근사록을 좋아하였으며, 항상 부지런하고 검소하면서 말과 행동이 정연하였다.
그의 스승 김굉필은 30살이 될 때까지 소학만 거듭 읽어 소학동자로 일컬어지던 인물이었다. 학문과 지식의 함양에 앞서 인격과 실천을 중시하는 조광조의 도학 정신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소학 정신에서 기초한 것이다. 조광조 이후 소학은 교육과학문의 필독서로 인정되어 유교 윤리의 실천과 사회적 구현을 위한 기본 지침이 되었다. 23살 나던 해(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김굉필이 이배지인 순천에서 처형되고 그도 시련을 겪었지만 2년 뒤에 중종 반정이 일어나 힘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해부터 아직 과거에도 나가지 않은 25살의 젊은 나이로 유생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으니 이때에 이미 그의 학문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29살 되던 해(중종 5년)에 진사회시에서 장원 급제한 그는 성균관 유생이 되어 사가독서의 명을 받고 개성 천마산과 성거산에 들어가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간 이듬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하산하여 상을 치른 후 중종 10년(1515년)에 다시 경기도에 있는 용문산에서 독서하던 중에 당시 이조판서인 안당의 천거로 조지서의 사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두 달 뒤,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그의 명성은 과거에 최종 합격하기 전부터 이미 높아져 있어 급제하자마자 제일 먼저 관직을 제수받았으며, 뛰어난 실력을 물론 탁월한 언변과 풍모에 의해 중종의 눈에 들어 고속 승진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4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강력한 개혁 추진 주도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비 윤씨가 세자를 낳은 지 7일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 군수 김정이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다. 신씨는 중종의 첫부인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폐위를 반대하여 반정 세력에게 죽임을 당한 연고로 중종 즉위 직후 반정 주동자들이 후환을 걱정하여 신씨를 폐출하고 새로운 왕비를 들이게 하였다. 그만큼 신씨 문제는 정국에 심각한 파장을 몰고 올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복위시키자는 박상과 김정의 상소는 반정 주도 세력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이에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은 공연히 문제를 유발시키는 사론이라고 몰아붙여 상소를 올린 두 사람을 강력하게 탄핵하였다. 반정 핵심 세력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그들의 생각과 어긋나는 상소를 올린 박상과 김정은 처벌을 면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런데 정언에 임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정암이 양인을 처벌하려는 대세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에 의해 제기된 반론의 요지는 이러했다.
" 언로가 열렸느냐, 막혔느냐 하는 것은 나라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박상과 김정은 간언을 구하는 임금의 뜻을 좇아 그들의 생각을 말한 것뿐입니다. 그들의 말이 지나치다하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죄를 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들을 벌하라고 청하여도 대간들은 마땅히 변호하여 언로를 열어야 하는 법인데, 도리어 대간에서 이들을 벌하라고 청하여 언로를 막으니 이는 맡은 바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은 정언으로써 이렇게 부당한 대간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오니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을 파직하고 다시금 언로가 열리게 하여 주소서."
문과에 급제한 직후 곧바로 정언에 임명된 것도 파격이지만, 임명되자마자 자신의 상관과 선배 대간을 모두 파직해 달라고 요청한 정암의 태도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반정의 주역들이 서슬 퍼렇게 존재해 있는 당시 상황에서 그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잘못하면 자신의 정치적 장래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위험한 주장을 과감하게 전개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의 결말은 정암을 제외한 대간 전원을 교체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의 명분과 논리가 너무도 사리 정연하여 반박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임 언관으로서 자신의 상관을 모두 탄핵하고 나선다는 것은 웬만한 신념과 용기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힘든 일이며, 그러한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결정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암은 관직에 등용되자마자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지만, 반면에 많은 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그는 사림의 대변자이자 영도자로 확고하게 부각되었으며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35살 때에 호조, 예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으로 부임한 그는 계심잠을 제진하였다. 또 그 이듬해에는 한층, 기준 등과 함께 사장을 물리치고 이학을 장려할 것을 왕에게 진언하였고, 시강의 자리에서 군자와 소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응교로 승진하여 전국적으로 향약을 실시하게 하였다. 37살이 되던 중종 13년(1518년)에는 홍문관 부제학과 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드디어 언관의 최고위직인 대사헌이 되었다. 이 해에 그는 공물의 폐해를 진언하여 그 제도를 개선케 하였으며(2월), 국초부터 궁충에서 무속을 관장하던 소격서를 폐지하였고(7월), 대사헌이 되어서는 현량과를 실시하도록 하여 재야에 있는 덕망과 교양을 갖춘 인재들을 두루 등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11월). 이러한 모든 제도 개혁은 유교적 도덕 사회로 국가를 개조하기 위한 일환으로 적극 추진되었던 것이다. 먼저 향약 실시의 의미를 살펴보자.
향약은 모든 백성을 유교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왕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실시한 향약은 중국 북송 시대의 여씨 가문에서 집안 통솔을 위하여 시행했던 여씨 향약이 그 모체였다. 정암이 인식한 당시의 상황은 조선 창건 후 연이은 정변으로 국가의 기풍이 흐려지고 정치의 도가 무너진 상태라고 판단했다. 사실 도덕적인 유교 이념을 건국 정신으로 표방한 조선 왕조에서 불과 50년 사이에 세조의 왕권 찬탈과 연산군의 폐위가 연거푸 일어났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을 통하여 떨어진 사회 기풍을 진작시킬 목적으로 민간 자치 규약인 향약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적들에게는 자신의 정치 기반을 형성하기 위한 조치로 오해되기도 했으며, 민간 자치 규약을 관 주도로 강제하다 보니 반발을 사기도 했다. 또한 너무 급속히 추진하였던 까닭에 이를 제대로 이끌어 갈 인재의 토양도 형성되지 못했고, 관리들의 통치력에 장애가 생기는 요인도 발생하였다. 결국 이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보완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의 실각으로 제도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다음으로 소격서 폐지의 건을 살펴보자.
소격서는 일월성진에 제사 지내는 일을 주관하던 관청으로서 성리학적인 원칙과 이념에는 맞지 않는 기관이었다. 유교적 왕도정치를 지향하는 정암으로서는 당연히 폐지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국초부터 인정되던 기관이고 경국대전에도 엄연히 수록되어 있는 관청이다 보니 중종도 그 폐지를 쉽게 승낙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정암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밤샘 연좌농성을 통해 기어코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는 그의 이상주의적 집요함과 급진성을 다시 한번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소격서 폐지는 정암으로 하여금 궁중의 비빈이나 궁녀들의 반감을 사서 궁중 세력들도 그를 적대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도 궁중에서는 전통적으로 불교를 숭상하고 무속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암의 개혁 정치에 있어서 최대 성과요 목표라고 할 수 있는 현량과 도입에 대하여 살펴보자.
현량과는 정암이 언관의 수장인 대사헌이 되고 나서 추진한 제도로서 그의 동조 세력을 조정에 대거 유입시키는 역할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불행을 재촉한 셈이 되었다. 종래의 과거 제도는 학문 공부를 단순히 과거 시험 준비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학식과 인품을 판단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종래의 과거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추천으로 등용시키는 제도가 현량과였다. 중국 한나라의 현량방정과를 본받아 도입한 이 제도는 7가지 추천 기준이 있었는데 학식과 행실에 가장 높은 비중을 두었다. 중종 14년(1519년)에 최초로 실시한 결과 최종 28명이 뽑혔는데, 21명이 기호 지방 출신으로서 그와 학맥 등을 같이하여 강한 연대의식을 갖는 신진 사림들이 대부분 등용되었다. 이들의 관계 각 분야 진출은 기득권 세력들에게 큰 위협일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 정암이 이들을 통하여 실천하려는 정치는 기성층의 기반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므로 구세력으로서는 앉아서 고사하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구세력의 일대 반격과 정암의 좌절을 재촉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그는 내수사의 고리대금 행위를 중지시키고 궁중 여악을 폐지하였으며, 유학적 기풍 확립을 위해 가례와 삼강행실을 적극 보급하고 소학 교육을 장려했다. 이 모두가 도덕적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구세력과의 첨예한 갈등
운명의 중종 14년(1519년)에 그는 세자부빈객까지 겸하여서 명실상부한 조정의 강력한 실권자가 되었다. 등과한 지 불과 5년이 채 못 되어 이토록 고속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 것은 그의 능력을 인정한 중종의 전폭적인 지원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정적들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는 반대파에게 경계와 질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현량과 등을 통하여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더욱 늘어갔으며, 국정은 거의 그가 도맡다시피 하였다. 경연장도 그의 동조 세력들이 독점하였으며, 어떤 때는 경연이 하루종일 계속되어 신하들은 물론 왕까지도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도덕과 학문으로 무장한 신진 관료들은 기성 관리들을 부정한 세력으로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어 상관과 선배들에게 결례하는 경우가 많았고, 왕까지도 지나치게 가르치려 하여서 그들의 과격한 개혁정치는 마침내 중종도 염증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고 말았다.
사실 중종의 입장에서도 신진 사림들의 과도한 세력 강화가 반갑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중종이 정암을 중용한 것은 그의 학식과 철학을 높이산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려는 의도도 상당히 강했다. 왜냐하면 중종은 반정 세력들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옹립한 왕이었으므로 즉위 이후에도 정치적 기반과 실권이 약했다. 정치는 공신들의 손에 전단되기 일쑤여서 이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이에 따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지 세력 양성이 절실했었다. 그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정암이었다. 그의 학식과 덕망은 이미 조야에 인정되고 있었으며, 왕도정치를 실현한다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대의명분을 앞세웠고, 또한 강한 추진력과 동조 세력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중종의 입장에서는 정암이야말로 근왕 세력이 될 수 있는 조건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었고, 공신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불리한 여건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옹립시킨 강력한 권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중용한 정암의 세력이 너무 급속도로 비대해져 이제는 오히려 공신들보다 정암일파에 대한 권력 집중을 걱정해야 할 계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중종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며 바라던 바도 아니었다. 거기에다 사사건건 수기치인을 강조하며 왕인 자신까지 가르치려 하는 정암의 도학정치 기조에 넌더리가 나기 시작했고 과도한 개혁추진에 거부감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미묘한 상황 아래 마침 공석으로 있던 형조판서의 자리를 놓고 공신 세력과 신진 사림 간에 알력이 심화되었다. 남곤 등 공신세력들은 그들의 측근인 심정을 추천했는데 정암의 지지자인 이조판서 이장곤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남곤, 심정 등은 백방으로 손을 써서 기어코 심정을 형조판서로 임명하려는 결정을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정암이 달려와 왕에게 간청하여 이 결정은 번복되고 말았다. 심정으로서는 형조판서 자리를 제수받기 목전에서 정암에 의하여 취소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심정은 정암이라면 이를 갈게 되었고, 이러한 시점에서 정암은 반정 공신들을 결정적으로 자극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공신들의 관작이 잘못되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변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중종14년(1519년) 10월에 대사헌이던 정암은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상소를 올려 정국 공신 중에 부당하게 책록된 사람은 조사하여 삭훈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암의 입장에서는 연산군대에 관직에 있으면서 목숨을 걸고 간쟁을 해서라도 임금의 잘못을 말려야 했던 사람들이 이를 방관하고 있다가 정권이 바뀌자 공신으로 책봉되어 또다시 권력의 자리에 남아 있는 부도덕한 자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거론한 대로 그가 인식한 자신의 시대는 도덕적 위기에 빠져 있었고, 이의 원인은 정국 공신들의 도덕적 기초가 부실한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으며,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대 도덕적 각성을 일깨우고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위선적인 정국 공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치의 새 장을 결코 열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는 그가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작정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시기와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미루어 놓았던 사안이었는데, 그즈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마음먹고 추진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그 당시 자신의 세력과 정치적 배경으로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 세력 판도나 대의명분상으로 그의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지는 않았다. 단 하나 그가 간과한 것은 그의 정치철학이나 개혁 추진이 너무 급속했으며, 앞만 보고 달려와서 많은 적을 양산했다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중종의 생각이 이즈음에 와서 바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암 일파는 "정국 공신 문제를 그냥 묵인하고 넘어간다는 것은 비단 정사의잘못으로만 끝나지 않고 종당에는 이익만을 좇아 인의가 실종되는 세태를 만들어 장차 그 화가 나라의 모든 부분에 미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대간이 사직을 불사하고 간청하고 나섰다. 결국 103명의 공신 가운데 78명이 삭훈되었고, 여기에는 나중에 정암의 제거에 앞장섰던 남곤과 홍경주 등도 포함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정암의 일파와 훈구 세력들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이르렀으며, 정암에게 치명적 일격을 당한 심정, 남곤, 홍경주 등은 은밀히 그를 제거할 음모를 진행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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