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천민 출신 천재 과학자 장영실 (1/2)
장영실은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적 업적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였던 과학 분야에서 누구보다도 높은 기열를 한 뛰어난 과학자이다. 그는 엄격한 신분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사람으로 그의 업적도 대단하지만 고난을 이겨내고 우뚝 선 인간 승리의 모습에서 더 큰 교훈과 감동을 주는 인물이다. 다행히 민본 군주인 세종대에 살아서 자신의 능력을 살리고 입신도 할 수 있었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인재로 인하여 그 지설이 찬란한 문화 융성기로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 세종이 천민 출신인 그를 당상관의 지위에까지 끌어올린 것은 그의 능력이 워낙 뛰어난 때문이겠지만, 세종의 과학 기술 발전에 대한 의욕이 강했던 점도 큰 이유로 작용하였다.
나라가 반석 위에 선 것처럼 튼튼하려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예전보다 나아져야 한다고 믿은 세종은 그 시절 생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농업 활동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이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연적 조건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 농업 생산을 발달시키려면 자연의 변화를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절기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파종에서부터 수확까지 모든 일을 적기에 할 수 있도록 하고 한발과 폭우 등에도 대비할 수 있는 사전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 세종이 시계와 역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는 것이고 장영실이 만들어낸 발명품들이 그 시대에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까닭도 존재한다. 말하자면 장영실은 국가 경영의 가장 큰 토대가 되는 경제 발전과 민생 안정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이러한 관점에서는 세종대의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단 한번의 엄청난 실수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아서 지뢰밭 같은 인생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한편으로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하여 공직자는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바가 많다.
파격적인 관직 진출
장영실의 혈통은 세종실록에 의하면 아버지는 원나라의 소항주 출신의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동래현 소속 기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귀화하거나 파견 나온 중국인 기술자로서 조선의 기생을 현지처로 삼아서 살았던 듯싶다. 그의 문중으로 알려진 아산 장씨 가문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전서의 벼슬을 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추론들에 기초한다면 장영실의 과학적 자질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셈이었다. 그가 역사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 12년(1412년)으로서 그즈음에 그는 이미 발탁되어 궁중에서 일했던 것이다. 이렇게 태종대부터 전문 기술자로 활약하던 그는 세종 3년(1421년)에 천문기구의 제작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벌써 그가 조선에서 최고의 전문 과학 기술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적인 대사업을 계획하면서 공식 연구단 일행에 관노 출신인 그를 포함시켰다는 것은 실제적 기술 능력으로는 당시의 최고 실력자라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그는 중국에서 1,2년간 머무르면서 천문 기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보는 얻었지만, 실물을 얻거나 설계도와 같은 실제적 제작에 필요한 것은 구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당시에는 천문기구가 최신 과학 기술로서 타국에 그 중요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물 모습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을 가능성도 높다. 부득이 개괄적이고 원론적인 이론 정도를 입수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귀국해서는 이를 바탕으로 초보적인 관측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여 수많은 실험 단계를 거쳐서 완전히 새로 발명하는 수준으로 기구 제작에 임해야 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직후 세종은 그의 연구 공로를 인정하고 기구 제작의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왕실 사용 물품을 공급하는 상의원 별좌라는 종5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그에게 하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는 중신들의 반대로 그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가 그가 세종 6년(1424년)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를 개수해 내자 그 이듬해에 상의원 별좌에 결국 임명하게 되었다. 엄격한 신분 제도가 국가 운영의 기초였던 당시에 천민이 임금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공식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워낙 빼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며, 또한 당시만 해도 조선 후기 사회처럼 신분 의식이 극도로 경직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장영실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신뢰하고 있어서 환관들을 대신하여 용무를 시킬 만큼 측근으로 삼았다.
천문 관측 기구 제작 참여
장영실 등의 연구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자 세종 14년(1432년)부터는 왕명에 의하여 천문 관측 기구 제작을 위한 대규모 작업이 착수되었다. 천문 관측 기구와 현실에 맞는 수시력의 제작은 농업 국가인 조선에는 시급히 필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세종은 집권 초부터 이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고 있다가 이 시기에 여건이 성숙되었다고 판단하여 국책 사업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 해 가을부터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총지휘를 명하여 천문대와 그곳에서 필요한 각종 천문 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 사업에 착수하게 하였다.
우선 천문 관측 관청인 서운관을 확장 강화하고 대규모 관측대를 경복궁 안에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또 다른 소규모 관측대인 관천대도 북부 광화방(지금의 계동 현대사옥 근처) 부근에 같이 건설하도록 하였다. 또 각종 기구 제작 사업에는 공조참판을 역임한 무장이자 뛰어난 과학자인 이천이 실무 책임을 맡고 진행하였으며, 여기에 장영실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먼저 나무로 간의를 만들어 한성의 북극고도(위도)를 새로 측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구리로써 여러 의상을 제작하였다. 작업에 착수한 지 1년만에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주는 혼천의라는 일종의 천문시계를 만들었고, 장영실은 독자적으로 자격자행 하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세종은 장영실의 자격루가 정확하면서도 완전 자동 장치에 의하여 작동되는 것을 보고 크게 치하하며 그를 무관직의 정4품인 호군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미 연구 도중에 5위의정5품 무관 벼슬인 행사직을 세수받았었는데, 자격루의 완성으로 또 한번 승진한 것이다.
세종은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을 짓고 그 안에 자격루를 설치하게 하여 이듬해(1434년) 7월 1일부터 조선의 표준 시계로 운영하였다. 이 자격루는 보루각에 설치되었다고 하여 보루각루라고 하기도 하고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 내에 있다 해서 금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보루각의 자격루에서 보내주는 시보에 의하여 궁궐 밖 종루에서 파루, 오정, 인정 등의 시각을 북이나 종을 쳐서 일반에게 알려주었다. 보신각 옆으로 길이 난 서울의 종로 거리가 지금의 이름으로 명명된 것도 세종대 이후에 그곳에다 종루를 세우고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던 관례에서 비롯되었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중종 31년(1536년)에 숭례문, 흥인문에서도 시보를 알려주기 위해 추가로 만든 것이다. 중종 때 새로 만들어진 자격루는 창경궁 안에 새 보루각을 짓고 설치 하였는데 고종 때 시간을 알리는 방법이 바뀌자 일제에 의하여 이 보루각도 헐어지고 자격루만 장서각 앞에 방치해 두었던 것을 현재 덕수궁에 옮겨 보전하고 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지 5년 후인 세종 20년(1438년)에 더 정밀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 기능을 합쳐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자동시계였다. 옥루가 완성되자 세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집무실인 경복궁 천추전 서편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하게 하고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며 관심을 기울였다. 또 우승지 김돈에게 흠경각기를 짓게 하여 그 공을 치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옥루도 명종 8년(1553년)에 화재로 소실되어서 그 이듬해에 다시 제작하였지만 역시 임진왜란 때 이것마저 불타 버려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흠경각의 설치로 7년 여에 걸친 의표창제 사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는데, 그 외에 이때 만들어진 것들로는 천체 관측 기구인 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남북의 방위가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해시계인 정남일구, 최초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 주야 겸용 천체 관측 기구인 일성정시의, 해 그림자에 따라 절기를 결정하던 규표 등이 있었다.
이렇게 제작된 관측 기구들은 세종 16년(1434년)에 준공된 경복궁 대간의대 안팎으로 설치하여 본격적인 천문 관측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경복궁 간의대는 높이만 해도 9.5미터에 이르는 큰 규모의 왕립 천문대로서 15세기 무렵에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대간의대도 왜란 때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는데 경복궁 신무문 서쪽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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