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진정한 공직자의 사표 황희 (1/3)
명재상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황희는 고려조 쇠락기에 태어났으나 조선조에도 출사하여 태조부터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왕에게 봉직하다가 90살의 나이로 사망한, 당시로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의 강직함은 역대 왕에게서 모두 인정을 받았지만, 그가 실제로 자신의 능력을 꽃피운 시기는 노년인 세종대에 와서 였는데, 안목을 갖춘 군왕과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 역량을 국가 발전의 촉매제로 발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인정되고 있다.
사실 세종대에는 각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가 발굴되어 나라를 이끌어 갔다. 이는 뛰어난 지도자의 존재가 국가 발전과 인물 양성에 얼마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황희 같은 정승이 위로는 왕명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적재 적소의 인물 기용으로 정사를 바로 이끌었기 때문에 세종대가 국가 발흥기이자 문화 융성기로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국가 진흥기에 요구되는 대표적인 인물의 표상이 황희라고 볼 수 있으며 그는 명재상으로서의 역할도 돋보이지만 삶의 태도 자체가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성공한 관리로서의 일생
황희는 고려시대 공민왕 12년(1363년)에 개성에서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구부이며 호는 방촌이다. 14살 때인 우왕 2년(1376년)에 음직으로 복안궁 녹사가 되었고, 21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2년 후에는 진사시에도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27살인 창왕 원년(1389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그 이듬해에 성균학관이 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30살이 되던 해에 고려 왕조가 멸망하자, 선비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70여 명의 그려 구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가 외부와는 일체 교류를 끊고 초근목피로 살아가며 지조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 개국 초기 조정에서는 등을 돌린 고려 관리들을 회유하고, 인재를 불러모으기 위해 진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두문동에도 종용의 뜻을 보내왔다. 이에 따라 두문동 고려 구신들은 충절도 옳지만 일할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 것도 학문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그 중 가장 젊은 황희가 조선 조정에 홀로 출사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 조정에 출사한 후 곧바로 전 직책인 성균학관으로 복직하여 세자 우정자를 겸임한 후에 직예문 춘추관을 거쳐 사헌감찰, 우습유로 봉직하게 되었다. 지조를 꺾고 어렵게 시작한 조선조 관직 생활 초기에는 애초부터 조선 건국에 적극 참여한 인물들과의 정서적 간극 때문인지, 충절을 훼손한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에서였는지 관직에 잘 적응하지 못한 채 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외직으로 겉돌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39살 때 태종이 즉위한 후에야 조금씩 중앙 관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6조의 정랑을 차례로 거치면서 관리로서 경력을 쌓아갔다. 이 시기에 그는 대호군으로 승추부 경력을 겸직하여 중추원을 혁파하고 병권을 완전히 국왕에게 귀속시키는 병제 일원화 작업을 무리 없이 추진하여 태종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즈음 지신사로 있던 박석명이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황희를 적극 추천하여 그의 나이 43살에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게 되어 드디어 화려한 공직 생활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절 태종은 그를 전폭 신임하여 모든 정사에 대해 일일이 깊은 의논을 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외척의 발호를 걱정한 태종이 처남인 민무구, 무질 형제를 제거하려 하자 왕의 뜻을 받들어 그가 앞장서서 처리하기도 하였다. 또 태종은 원로 대신들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하여 그에게 인사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도 하였는데, 이 모두가 그의 신중하고도 사려 깊은 자세를 높이 샀기 때문이며 그가 특별한 지위를 이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인물이 아님을 잘 알았던 까닭이었다.
이후로 그는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47살에서 56살에 이르는 동안 6조의 판서를 모두 거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예조판서 시절 지병으로 일시 사임한 때에는 태종이 황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의원을 파견하고, 후에 그의 병이 낫자 의원들을 포상하기까지 하여 군신간의 의가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황희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조판서 시절에 폐세자 문제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왕과 의견을 달리하여 외직으로 내몰렸다가 태종 18년(14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지금의 파주) 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다. 그가 유배되던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나앉았으나 그의 유배는 계속되었고, 오히려 교하가 나무 가까워 징벌의 효과가 약하다는 지적 때문에 그의 유배 생활은 선영 근처인 남원으로 옮겨져 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의 나이 60살이 되던 해인 세종 4년(1422년) 2월에야 유배에서 풀려 경시서 제조로 복직되었고, 10월에는 의정부 참찬으로 중용되었다. 그것은 그 해 5월, 상왕인 태종이 사망하기 전 두 사람 사이의 오해가 풀린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세종의 혜안 덕분이었다. 세종은 비록 황희가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긴 했으나 그의 인물 됨이 바르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본 것이다.
또 태종은 일구월심으로 왕권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나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였는데, 이러한 심중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황희였다. 그 후 황희는 세종 5년(1423년)네 흉년으로 민심이 어지러운 강원도 관찰사를 맡아서 지방 행정을 안정시키고, 세종 8년(1426년)에는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고 65살 되던 해인 세종 9년(1427년)에 좌의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에 사위인 서달이 권력을 남용하였다는 죄로 처벌받을 때 사건의 심리를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태석균의 죄를 가볍게 다스리라는 청을 사헌부에 했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고 사임하였다가 1개월 후에 왕명으로 다시 복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모친상으로 재차 사직하고 상을 치른 후 파주 임진강 주변 반구정에서 칩거하였다. 그의 나이 69살이 되던 해에 세종은 영의정으로 그를 다시 부르니 당시로서는 이미 은퇴할 나이에 관직의 정상에 올라서 87살로 물러날 때까지 18년동안을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보필하고 당대를 태평성대로 이끌어 내는 견인차가 되었다. 그는 규칙적이고 엄격한 섭생으로 장수를 누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영의정에서 물러난 지 3년 뒤인 문종 2년(1452년)에 당시로는 놀랄 만한 고령인 90살의 나이로 편안히 영면하였다.
타인을 우선 배려한 성품
먼저 황희가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언행에 항상 엄중한 자세를 갖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다시 조감해 보자.
그가 아직 관직에 나가기 전 어느 여름날, 시골길을 가던 황희가 한창 농사일에 바쁜 밭 옆의 그늘에서 쉬게 되었다. 때마침 한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 두 마리를 데리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희는 한여름 뙤약볕에 고생하는 농부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쉬었다 하시라"는 등 말을 건넸다. 농부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별뜻 없이 황희는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어떤 놈이 일을 잘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농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황희는 뜬금없는 농부의 태도에 어리둥절하였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거니 하고 농부를 따라갔다. 밭에서 다소 떨어진 외진 곳으로 가자, 농부는 황희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일에 꾀가 많고 다루기도 힘들답니다."
무슨 중요한 얘기가 있을 줄 알고 따라온 황희는 농부의 말에 얼떨떨하여 묻기를, "아니 노인장, 그 얘기를 하시려고 일부러 이리 와서 그것도 무슨 비밀처럼 말씀하시오" 하였다. 그러자, 그 촌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다 안답니다. 내가 만일 아까 그 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그 놈들이 다 들을 것 아닙니까? 사람의 말을 짐승이 알아들으랴 싶지만, 나는 내 집일을 애써 해주는 그 놈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소."
촌부의 얘기를 들은 황희는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일생 동안을 다른 사람의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조심했다고 한다. 젊었을 때 흘려들을 수도 있는 촌부의 말 한 마디를 삶의 금도로 하여 일생을 통해 자기 생활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는 공사에는 엄격하고 강직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온후 자상한 인물로 알려졌는데, 그 점을 알 수 있는 일화들은 꽤 많다.
하루는 어린 종 둘이 다투다가 퇴청하는 황희와 마주치자 민망해져서 그 중 하나가 상대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사단이 발생하였다고 일렀다. 어린 종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황희는 "그래 그래 네가 옳다" 하고 다독거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종도 주인이 역성을 드는 줄 알고 자기 변명을 늘어놓자, 그 또한 다 듣고는 "그렇다면 네 말도 맞구나" 하고는 둘을 타일러 돌려보냈었다. 이때 이 작은 소동을 방안에서 다 들었던 부인이 타박하기를
"아니, 대감께서는 이 놈도 옳다, 저 놈도 옳다 하시니 어찌된 일이십니까? 시시비비를 확실히 밝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께서 그리도 사리가 확실치 않으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하고 농을 건넸다. 그러자 황희는 "맞소 맞소, 부인 말씀도 참으로 맞소" 하고 대답하여, 그만 부인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고 한다. 이는 집에서 부리는 어린 종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며, 젊은 시절 깨달은 삶의 자세를 일생 동안 잃지 않고 지켜온 한 인간의 모습에서 유쾌한 감정까지 느껴진다.
이것 외에도 타인에 대한 황희의 배려나 인간적인 일면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사례들은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 중 몇 가지를 더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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