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재상 중심 왕도정치를 꿈꾼 혁명가 정도전
정도전은 뛰어난 정치가이자 전략가이면서도 조선조에서는 부정적인 존재로 치부된 비극적 인물이다. 그는 조선 객구 과정의 수많은 개혁 작업을 주도하고 신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앞장섰지만 인생 절정의 순간에 그의 포부를 채 마무리 하지도 못하고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이방원 일파에게 제거됨으로써 조선시대 내내 반역의 원흉으로 매장되고 말았다. 그가 여말, 선초 혼란기에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내는 작업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소불능이라고 할 만큼 각 방면에 두루 소양이 깊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냉철한 현실 인식 감각이 다른 누구보다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적 이해에 따라서는 어떤 정책도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융통성 있는 현실주의적 사고로 행동하였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초기의 친명주의에도 불구하고 조선 건국 후 요동정벌 계획을 추진했던 점이다. 또한 그는 일찍이 천민 지역에서의 귀양과 긴 유랑 생활을 통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는 백성을 잘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정치의 방향임을 자각하고 윤리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이상향으로 지향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독주를 의심하고 왕권 강화 의지가 상대적으로 강했던 이방원에 의하여 몰락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불우했던 초기 관료 시절
정도전은 고려 28대 충혜왕 3년(1342년) 경북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 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종지이고 호는 삼봉이었으며 본관은 봉화였다. 그는 장성하여 부친의 친구이자 대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는데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과 동문으로 교유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명철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고, 특히 경서와 성리학에 능통하였다. 성품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못하는 양성적인 면이 강하고 날카로우면서 불 같은 일면이 있어 항시 주위의 저항과 공격을 받기 쉬웠는데 그는 스스로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평생을 투지와 용기로 일관하며 살았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좌고우면 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하는 강인한 태도를 가져서 스승이었지만 훗날 그와 정적이 되어 날카롭게 대립한 이색도 이 점을 높이 평가하여 "도전이는 항상 할 일을 다하지 못함이 없고 어떤 일도 두려워 피하지 않는다"고 칭찬하였다. 그는 20살이 되던 해인 공민왕 11년(1362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우왕 2년(1375년)에 명을 협공하자는 협상을 하기 위해 북원의 사절이 오자, "선왕이 사남(명) 정책을 세웠으니 사북(원)은 불가하다"고 끝까지 반대하다가, 당시 실권 세력인 친원파의 미움을 사 회진현(전라 나주 관하의 천민지역)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공민왕의 유지를 이어받자는 뜻도 있었지만, 원명 교체기의 국제정세를 꿰뚫어본 일면이 강하다.
아무튼 정도전은 이 귀양살이부터 10여 년 이상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유배에서 풀린 후에도 삼각산 아래에서 초막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절의 고심이 얼마나 심했던지 자신의 호를 고생하며 지냈던 삼각산의 모양을 본따서 삼봉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그 무렵 절치부심하며 10여 년의 세월을 유랑생활로 보내던 정도전은 정치판에서 뜻을 세우려면 자신을 강력히 지원해 줄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실세로 여겨지는 이성계의 휘하로 들어가서 재기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렇게 암중모색의 세월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정도전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우왕 10년(1384년)에 정몽주가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면서 동문 수학한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추천하여 전교부령으로 수행하면서 관계에 복직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귀국한 뒤 성균제주 지제교로 얼마 동안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기를 스스로 청하여 남양 부사로 봉직하면서 지방 관리로서 민생을 직접 경험하고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지방관 생활 얼마 후인 우왕 14년(1388년)에 이성계의 추천에 의해 성균관 대사성으로 중앙 관계에 일약 복귀하면서 드디어 그의 생애 중 가장 화려한 시기를 펼치게 되었다. 그로서는 일생 일대의 최고 후원자인 이성계를 도와서 여말의 개혁과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 최대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여말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서다
위화도 회군 후 그 주도 세력은 폐가입진의 논리로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아직도 구가 세력들이 잔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성계 동조 세력과 구신들의 알력이 마지막 정점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병권은 이성계가 완전히 장악하여 실권적 지위를 행사하고 있었으나, 아직도 고려 조정은 구신과 세족들이 대부분 남아 있어 오히려 이성계 세력은 수적으로 열세에 있으면서 군사력의 중심인 이성계에 의해 서로 견제되는 묘한 대치 상황이 계속 되었다. 특히, 전제와 군제 개혁은 양 세력간에 첨예한 이해와 실권의 향방이 결정되는 사안인 만큼 충돌이 심했지만, 결국은 무력을 가지고 있던 이성계측 의도대로 관철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양 세력간의 반목이 극에 달하였음은 물론, 군제 개편은 이성계파 내부에서도 시기와 반목을 싹트게 하였는데 특히 이방원이 정도전을 질시하고 의심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하여튼 양 세력의 극한 대립 와중에서 공양왕은 구신 세족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이성계가 휘하 세력들의 무리한 요구를 제압하지 않고 오히려 방관, 조장한다는 불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성계는 이성계대로 공양왕이 자신의 도움으로 왕위를 계승했으면서도 자신을 의심하고 개혁 추진에 적극적이지 않는 데에 불만을 품어 양자 사이의 틈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이성계는 이런 상황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사직을 시사하고 평주 온천으로 가 전격 은둔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성계의 이러한 태도는 실제 은퇴 의사라기보다 자신의 정치 방향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왕과 구신 세력들에 대한 일종의 위협성 경고였다. 그러나 유일한 힘의 중심인 이성계의 사직으로 공백이 생기자, 구파는 이성계 세력을 집중 탄핵하여 일시적으로 조정에서 몰아낼 수 있었는데, 이때 정도전도 봉화현으로 두 번째 유배의 길을 가게 되었다. 당시 구파 세력은 이성계파의 개혁 정책을 비방하고 그 순수성을 훼손할 목적으로 정도전 등 신진 정객들의 대부분이 사대부 직계가 아닌 비천한 신분 출신인 것을 집중 공격하여, 개혁 추진의 의도가 자기들의 천근을 숨기기 위해 본주를 제거하려는 불순한 음모에서 출발하였다고 몰아붙였다. 결국 정도전은 "가풍이 부정하고, 주관이 확실하지 못하여 관직에의 등용이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첩과 공신녹권이 회수되고 일가족이 폐서인되는 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힘의 중심이 이성계에게 있었고, 이성계의 은둔이 실제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파 세력은 은둔하고 있던 이성계가 때마침 낙마까지 하여 장기 칩거가 불가피해지자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이성계 휘하의 신진 정객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하여 득달같이 유배간 이들을 극형에 처하라는 주청을 강화하게 된다. 이에 더 이상의 은둔과 방관은 자기 세력의 완전한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고 판단한 이성계 일파는 이방원이 선두에 나서서 구파 최후의 보루인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하고 구신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정국의 일대 반전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이성계 세력이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정도전도 유배에서 풀려 복직하게 되어 정계의 중심으로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사실 공양왕도 이성계의 위세를 믿고 사사건건 분란을 야기하며 고분고분하지 않는 신진 사류에 반감을 가지고 유배 조치는 하고도 정작 이성계를 의식해 극형에 처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성계의 공백이 장기화 될 조짐이 보이자 구파 세력에 동조하여 이들을 죽이려는 의사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의 거사로 상황은 다시 반전되고 정도전 등은 죽음의 위협과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정도전을 사지에서 구해내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이 후에 정도전을 도륙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성계 일파가 전제 개혁을 통하여 구파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군권을 장악이후에 정권까지 틀어쥐게 되자 왕은 완벽히 유명무실화 되어버렸고, 급기야 고금에도 없는 군신간의 동맹을 추진하여 연명하려 하였지만 이성계 일파는 대비의 명을 빌려 왕을 폐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니, 이로써 고려왕조는 종언을 고하고 조선의 개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신왕조 기반 형성 주도
1392년 7월에 마침내 475년간 34대왕까지 이어지던 고려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을 염려하여 얼마간은 고려의 국호와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 탄생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각 분야의 개혁이 잇달았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다재 다능한 식견과 특유의 돌파력을 가진 정도전이 있었다. 이때부터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왕자의 난까지의 6,7년이 정도전으로서는 최고의 절정기이자 자신의 경륜을 현실 정치에 펼쳐나갈 수 있었던 황금기였다. 사실 정도전은 큰 세력이 없고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경제적 고충이 극심하였으며. 20살에 출사한 후 내외 관직에 12년간 봉직 했으나 주요 직책은 거의 맡지 못하였다. 그나마 강경한 배원 주장 때문에 당시 친원 세력 위주의 구신 세력에 의해 탄핵을 받아 10여 년을 유배 및 유랑생활로 보냈었다. 42살인 1383년에 겨우 이성계의 막하에 들어감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위화도 회군 후에도 구파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항상 선봉에 서게 되자, 견제와 질시를 집중적으로 받아 또다시 유배되는 등 청장년기에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50대에야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도모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만, 권력 투쟁의 와중에서 신왕조를 창건한 중심 인물이면서도 자신이 만든 왕조에 들어와서 비명 횡사한 불행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 창건 후 죽기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도저히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 냈다고는 믿어지지 않은 불꽃 같은 업적을 남겼는데, 실로 놀랍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는 우선 새 왕조의 백년대계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작업에 즉각 착수하였다. 제일 먼저 강병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 역대의 병법을 참고로 하여 오행 진출기도, 강무도 등을 지어서 군사를 조련케 하였다. 외교 방면에 있어서도 개국에 따른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여진족과의 불손한 관계를 의심하는 명의 시비에 대하여 해명의 표문을 작성하는 등 발군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문덕곡, 수보록, 몽금척 등 창업의 어려움과 수성의 지난함을 일깨우는 악곡을 지어 왕조의 귀감을 삼게 하는 것은 물론, 국가의 제도와 운영의 근본이 되는 경국전을 제정하였으며, 이것은 이후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이행되었다.
그뿐 아니라 조야에 역사의 위중함을 각성시키기 위해 고려사 37권을 편찬하였고, 지방 행정 방법을 기술한 감사요약을 만들어 지방 행정의 근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앙 관료들의 임무와 위병 및 감사 제도에 이르기까지 행정의 지침을 정한 경제문감을 저술하였고, 새 도읍지를 무학과 함께 한양으로 정하고 궁궐을 실제로 설계한 후,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 신도 팔경시 까지 지어 송축하였다 하니, 정도전의 무소 불능한 능력은 찬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당시 명망가들의 필적과 시문을 채집하여 만든 국초군영진적, 척불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불씨잡변도 그의 작품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적 소양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국방 정책에 있어서도 독보적 능력을 발휘하여 동북면 도 선무순찰사 시절에 군,현의 지계를 결정하고 성곽을 수리하게 하는 것은 물론, 참호까지 파게 하여 국경지대의 안보태세를 강화하였고 이미 독자적 진법까지 창안한 것으로 보아 군사 전략가로서의 자질 또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도무지 그 능력의 한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건국의 기초를 세우는 작업을 쉬지 않고 선도해 나갔던 셈인데, 그가 없었다면 신왕조의 출발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되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와 같이 다방면에 능통한 천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예비 된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깊게 남는다. 그의 이러한 독보적 성과는 천성적으로 명민함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40대에 이르기까지 불우한 시절에 자학에 빠지지 않고 수많은 독서와 사색으로 능력을 다져나갔기 때문이다.
정도전을 통해서 한 인간이 좌절의 질곡에서 그것을 오히려 자기 연단의 시간으로 활용하여 인생의 성취를 이루어 낸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 시절 지식인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고, 더 나아가 뿌리깊은 우리 민족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은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정도전이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각 방면에서 대단한 업적을 만들어 내고는 있었지만, 시각을 바꿔 보면 다른 사람들의 참여폭을 억제시키고 독단적 업무 수행의 일면도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질시와 견제의 분위기가 당연히 조성되었다. 역사는 천재 한 사람의 독주를 용납하지 않는 냉혹함을 가지고 있어서 정도전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소외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일면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비참한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실 정도전은 타고난 성품 자체가 날카롭고 투쟁성이 강하며 타협적이지 못했다. 그의 이 같은 천성은 정치적 기반의 차이에서 비롯되기는 하였지만 스승인 이색과 반목 대립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고, 고난의 출발이 되었던 첫번째 유배의 사유도 외교 현실을 직시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조정에서 원사의 영접 책임을 자신에게 맡기려 하자 "그렇다면 나는 원사의 목을 베든지 잡아서 명나라에 압송하겠다."고까지 말하는 그의 극렬성에 기인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말에도 구파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항상 반대파를 공격하는데 앞장섰으니, 당연히 주위에 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다.
비극적 최후
조선 개국 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던 명나라로부터 태조 6년에 보낸 정조표전에 예의에 벗어나는 어구가 있다는 시비로 표문 작성자를 압송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상당히 강했는데, 표문의 어디엔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문구가 있다고 대노하여 외교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명은 이 문제를 가지고 주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조선을 괴롭혔는데, 급기야 표문 작성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잡아 보내라고까지 하였다. 조선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십 명의 사신을 보냈지만, 명은 해명 사신을 오히려 구속하고 유배시켜 돌려보내지 않기까지 하는 횡포를 부려서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가 십수인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사태가 해결의 기미 없이 악화되자, 조선조정도 상하 모두 분격하게 되었고 정도전은 마침내 과거에 자신이 그렇게도 반대했던 요동 정벌을 건의하였다.
이렇게 급격한 분위기 속에서 정도전은 중앙 관료들을 군관뿐 아니라 문관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만든 5진도로 훈련시키고 지방에도 훈도관을 파견하여 강습시킨 후 순군천호를 보내서 진법 훈련 정도를 감찰케 하여, 진법에 무능한 자는 절제사와 상대 장군이라도 처벌하는 등 출병 준비를 강화하게 되었다. 더구나 효율적 군사력 통제를 위하여 고려조 이후 권문세가의 관행으로 굳어진 사병제도를 폐지하여 관군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자 그 동안 정도전의 독주로 실권에서 소외된 인사들의 불만이 현재화되었고 그나마 힘의 배경인 사병들까지 존속시킬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반대파들은 정도전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표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방원의 위기의식이 가장 컸다. 사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개국의 최대 공로자인 자신을 제쳐두고 이성계가 계비 강씨 소생의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여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 배경에 재상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이 있다고 여겨 평소에도 정도전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게다가 사병까지 철폐된다면 완전히 끈 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기 때문에 이방원으로서는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공교롭게도 태조 7년(1398년)8월 13일에 이성계가 덜컥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방원은 이성계가 건강체이기는 하였으나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64세)이고 보니 회복하지 못하고 죽기라도 한다면 왕위는 자연히 세자인 방석이 잇게 되고, 지금도 무소불위인 정도전은 왕의 대부로서 그 권한을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판단이 서자, 또 한명의 희대의 야심가인 그는 드디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칼을 들게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어떤 점쟁이가 "세자의 이복 형들 중에는 왕이 될 천명을 타고난 인물이 많다"고 하자, 이 말을 들은 정도전이 "그런 자가 있으면 모두 제거해 버릴 것"이라고 했다는데, 이를 풍설로 선해 들은 이방원은 더욱 경계를 하였고 그러던 차에 왕의 와병은 극도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대로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실록에 의하면 정도전측에서 왕의 사후 어린 세자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복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정당방위 차원에서 선제 기습 공격을 한 것이라고 한다. 소위 공소의 난 또는 무인정사라고 불리는, 조선 건국 초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을 실록에 나오는 내용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태조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은 왕의 병이 위급함을 기회로 삼아 왕자들을 궐내에 불러들여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드디어 운명의 8월 26일, 왕의 안위를 걱정하여 왕자와 근친들은 근정전 밖의 한 별채에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위험한 정보를 미리 전해 들은 이방원은 민씨 부인의 흉복통을 핑계로 잠시 사저로 나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다시 궐내로 돌아오자, 왕의 병이 급박하니 왕자들은 시종 없이 단신으로 대궐로 입시 하라는 전갈이 왔다. 이때 이미 밤이 되어 불을 켜야 하는데 궁문에 불이 없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어렵자 방원의 의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결국 부랴부랴 형들을 불러내서 자신이 파악한 사태를 설명하고 급히 궁을 빠져나와 미리 연통이 되었던 이숙번의 무리와 조영무, 처남인 무질 형제 등과 합류했으나 전체 병력수는 기병 10명, 보병 9명에 불과했다. 이때에는 이미 개인의 군권을 회수한 지도 10여 일이 지나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많지 않았거니와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 거사가 아니었으므로 병장기도 방원의 처인 민씨가 만일을 위해 숨겨 놓았던 것들로 겨우 충당할 수 있었다.
사실 그대로를 믿는다면, 방원은 궁지에서 결사적인 마지막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위기를 감지하고 칼을 빼 들었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이숙번의 제의로 일단 정도전 일행이 모여 있는 것으로 확인된 송현 근처 넘은의 소실 집으로 몰려갔다. 그곳에 이르자 그 이웃집 세 채에 불을 지르고는 매복해 있다가 정도전 일행이 놀라서 뛰쳐나오자 그대로 척살해 버렸다. 심효생, 장지화 등은 현장에서 맞아 죽었고 정도전은 이웃집으로 달아나 숨었지만 잡혀와서 결국 목이 잘렸고, 남은도 당시에는 겨우 도망을 하였으나 또한 잡혀서 주살되었다. 방원은 그 밤 동안에 자신의 적이 될 만한 인물을 모두 제거한 후 자신의 이복 동생인 방번, 방석 형제까지 참살하였다. 태조에게는 사태가 다 끝난 후에 정도전 일파가 정비 소생 왕자와 근친을 해치고 국권을 찬탈하려고 하여 미리 고하지 못하고 해결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참으로 허무하고 어이없는 파국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정도전이 제거된 이유
정도전이 정말로 방원 등 정비 소생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권문세가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과정에서 불만이 증폭되고 왕의 와병으로 의심의 기운이 정국을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이 그리도 허술하게 대비하였다는 것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더구나 당시가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 조련에 박차를 가하던 비상 시국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는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정도전의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한 방심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될 뿐이다. 사실 평소에도 정도전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장량이 한 고조를 통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을 장량에 비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자기 과신에서 비롯된 소이이며, 어찌 보면 무릇 경박하기까지 한 처신으로 비추어지는데 당시 이미 개인의 군사력이 혁파된 상황에서 자신이 무력으로 공격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듯하다. 결국 천재의 자기 과신이 불러온 방심의 결과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군신 관계라기보다는 내심 혁명의 동지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실 이 점은 이성계도 이미 인정을 하여 그에 대한 신임을 전폭적으로 보여 주었고, 그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과한 것이 역설적으로 정도전에게는 비극의 출발이 되었다. 보통 사람도 권력의 정점에 서면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정도전 같은 인물로서는 타인이 두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설사 일말의 걱정스러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도전은 성품상 자기 생각이 옳다고 판단되면 머뭇거리지 않고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타인에 대한 심리적 우월감으로 스스로를 보존하는 대비에는 등한시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정도전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제왕제도를 수용해서 신왕조를 열었으나, 그가 생각한 정치의 본질은 윤리적 규범을 전제로 하고 근본적으로 백성들의 안정 도모를 왕도로 삼았다. 그 방법으로는 왕이 전권을 행사하지 않고,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가 각 조직이 자기 역할을 감당해 나가는, 어찌 보면 근대적 의미의 민주정치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상정하였다.
이를 위해 대간의 견제 기능을 강화하고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노력을 불철주야 기울이고 있었다. 정도전의 의도대로 조선 건국 초기의 기본이 형성되었다면, 우리는 또 다른 선진된 조선을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죽음은 자신의 비극이자 조선의 불운이며 우리 민족의 불행이라고까지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또 하나, 돌연한 정도전의 죽음은 역사라는 것이 잘 준비된 현상만으로 연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즉, 부실하고 준비 없는 상태가 주역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방원이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통하여 정도전을 공격하려 했다면 아마도 정도전에 의하여 차단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에서도 살펴본 것과 같이 급박한 상황에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병력으로 허겁지겁 거사에 임했기 때문에 정도전으로서는 미처 낌새도 채지 못하게 된 것이고, 이방원으로서는 오히려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동 정벌론의 실체
이제 마지막으로 정도전의 요동 정벌론에 대하여 살펴보자.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정도전이 과연 실제로 요동 정벌의 뜻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자신이 친명주의자이기도 하였지만, 당시에는 개국 초의 혼란함에다 한양으로 천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국내 정세 자체가 어수선하였기 때문에 위화도 회군 시기보다 더 나은 상황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원체 명나라의 시비와 요구가 조선 조저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였지만, 이 또한 여말 철령 이북의 땅을 복속 시키겠다는 강압적 자세보다 더 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을 압송하라고까지 하여 개인적 감정도 악화되었겠지만 감정적 대응으로 국가 대사를 결정할 만큼 정도전이 작은 위인은 아니라고 본다면 이 또한 설득력이 약해진다. 그렇다면 정말로 중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면 위화도 회군도 없었을 것이고, 친명이니 친원이니 고심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중원 국가들과 대항했을 것이며, 조선을 건국한 후에 친명 외교로 상국에 대한 예를 다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고려나 조선의 국력은 이미 한반도 지역으로 위축되어 있어서, 중국과 정면으로 대항하기는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자위의 차원에서 명멸하는 중원의 국가들과 선린관계를 통한 줄타기 외교를 해왔던 것이 고구려 이후 이 땅의 국가들의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정도전의 요동 정벌론의 실체는 무엇인가? 지금의 시각에서는 그 사유를 3가지 정도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단은 중국의 시비가 거세지자 조선으로서도 마냥 약세로만 있을 수 없었고 어느 정도 자강지세를 보일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또 그때의 외교분쟁이 양국간의 실제적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표문의 문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명으로서도 조선과 무력 충돌까지 불사할 사안은 아니었다. 또한 명이 대국이라고는 하지만, 기나긴 원과의 전쟁을 겨우 마무리 지은 시점에서 아무리 약소국이라고 해도 조선과의 분쟁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도전은 명의 태도를 초기 양국 관계에서 먼저 주도권을 제압하려는 것으로 해석하고, 명나라에 대하여 무리한 요구를 계속 하면 군사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명의 입장에서도 이미 여말 10만 대군이 압록강까지 출병한 전력이 있는지라 조선의 군사적 대응 의지를 단순한 위협으로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외교 분쟁으로 인한 전쟁 위기를 국내 정세 장악의 기회로 활용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명민한 정도전은 명과의 분쟁이 심화되자, 오히려 이것을 불안정한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카드로 삼았다고 보여진다. 국론의 통합을 위해 위기론을 조장하기까지 하는 것이 정치의 현실이라고 보면 명과의 분쟁은 난제이기도 하지만 개국 초 어수선한 분위기를 장악해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구실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국가 위기를 명분으로 국가 전체를 통합해 나가는 계기를 만들고, 그 자신 문무백관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는 발상은 정도전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일찍이 국가의 통제권 밖에 있었던 사병 제도의 폐지 없이는 신왕조의 백년대계를 도모할 수 없다고 간파한 정도전이 이 시기를 국가적 고질을 타파할 기회로 삼아 추진했다는 점이다. 그는 평상시에는 이루기 힘든 지난한 작업을, 출병을 위한 효율적 병력 동원이라는 구실로 차제에 사병을 모조리 관군으로 편입시켜서 껄끄럽고 곤란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결국 사병이 혁파되기는 했지만 정도전으로서는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고 말았으니, 양날을 가진 칼과 같은 사안을 정도전은 절묘한 시기에 교묘한 방법으로 추진해 나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반대파들의 결사적 대항을 간과하여 그로서는 성공의 플랫폼에서 57살을 일기로 비명에 죽는 불행을 당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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