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새 시대를 열어간 선도자 이성계 (3/3)
요동 정벌의 허실
여기에서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근거로 제시한 소위 4불가론의 의미와 회군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를 통해 회군의 성격과 이성계의 인물됨을 되짚어 보자. 4불가론이라는 것은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고 둘째, 농사철이자 더운 여름에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고 셋째,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원정하면 왜구가 빈틈을 노려 기승을 부릴 것이며 넷째, 장마철을 맞아 활의 아교가 풀리고 군사들이 질병에 걸릴 것도 염려된다는 내용이었다. 첫번째 사유는 사대주의적 발상으로 볼 수도 있으나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명과 군사적으로 대적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진단으로 이해 될 수 있으며 나머지 사유들도 민생과 군사적 측면에서는 일응 납득이 가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일견 무리하게 보이는 정벌 계획을 우왕과 최영은 왜 강행하여 화를 자초했을까. 왕은 차치하고하도 최영까지도 우매하고 비현실적 인물로 치부하지 않는다면 당시에 처해 있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최영 등은 정권 책임자였고 이성계는 아직까지 권력의 중심에서 비껴 있었으므로 정책 결정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정권 책임자는 국가 보위 차원에서 극도로 예민한 문제인 영토 분쟁에 대해 어떤 결과로든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명의 압력이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백년 만에 겨우 회복한 고토를 선선히 내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명의 의사가 철회되지 않는 한 정면 대응을 해서라도 국토를 수호해야 했었다. 그리고 이성계는 아직까지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적 입장에서 반대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최영의 무장으로서의 강인함과 이성계의 무인이면서도 유연한 태도의 차이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이다.
실제 당시 정권 실세들이 명의 압력에 굴복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명에 넘겨주었다 해도 영토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대 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고 실각될 수 있는 것이 정치현실이기 때문에 당시 정권 실세들의 입장에서 요동 정벌은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선택이었던 셈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던 대로 외교적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버거운 무력 대결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았나 하는 점은 후세의 입장에서 거론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튼 위화도 회군은 국내외적 정세와 제 세력의 정치적 현실 및 양 세력 대표 인물의 개인적 성향 등이 복합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어쩔 수 없는 대반전의 전주곡이 되었다.
다음으로 회군이 준비된 쿠데타인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발생된 사건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애초부터 권력을 탈취할 목적으로 계획한 사건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출정군의 서열을 볼 때 이성계는 독단으로 주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의 위치가 아니었고,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할 의도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출정 전후를 통해 끝까지 반대하기보다는 출정에 동조하는 체하였다가 병력을 장악할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계로서는 본의 아닌 북정 길에서 물리적 난관에 부딪히자 압록강을 건널 수도 없고 철군의 간청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기민하게 반전의 기회를 포착하여 출정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비상 수단으로 회군을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회군 과정에서 이성계가 취한 행동들에서 이성계의 인물됨과 성향을 미루어 확인해 보자. 회군 결심 후 이성계는 제 장병들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요동 정벌을 포기하고 본거지인 동북면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을 냈었는데, 그때 제일 먼저 조민수가 허둥지둥 달려와 굴복을 하고 결국 전군의 동조까지 이끌어낸 사실을 보면 그가 뛰어난 용맹과 함께 임기 응변의 지모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이성계는 정세의 변화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는 데 능했다. 또한 회군 과정에서 명분상으로도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였는데, 반역을 도모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하여 개경까지의 회군 도중에 왕의 일행과 마주쳐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속도를 조절하여 움직였다. 이와 같이 회군 전 과정을 조감해 볼 때 이성계는 무인으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뛰어난 것은 물론 진중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판단된다.
불행한 말년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고 수창궁에서 즉위한 날이 1392년 7월 17이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이미 58살로 왕위에 나서자마자 세자를 서둘러 책봉해야만 했다. 이성계는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번째 부인의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6명이 있었고,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는 방번과 방석 두 형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지방 관리들이고향이나 근무지에는 향처를 두고, 중앙에서 기거할 때는 경처를 두는 풍습이 있었다. 이성계에게는 젊어서 혼인한 한씨는 향처, 두 번째 부인 강씨는 경처인 셈이었다. 그런데 한씨는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 해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강씨가 결국 왕후로서의 영광과 역할을 고스란히 안게 되었다. 원래 강씨는 황해도 곡산 사람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강윤성은 그 지방 대부호였는데, 이성계가 사냥 길에 곡산 땅에 들렀다가 강씨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이 혼인하게 되었다. 본디 강씨는 미모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강윤성의 외동딸로서 그녀의 아버지가 이성계의 경제, 정치적 후원자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사랑이 자연히 각별하였다.
이렇게 말년까지 살갑게 같이 지낸 강씨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때문인지, 아니면 노년에 본 자식이 더 사랑스러웠는지 이성계는 장성한 전처 소생들보다 후처 소생들에 대한 애정이 더 깊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 책봉 문제가 대두되자 강씨는 자기 자식 중에서 왕위를 잇게 할 욕심으로 이성계를 졸랐고, 이성계도 내심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다만, 적장자 승계라는 전통에도 벗어나고 개국에 있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공이 컸던 터라 결정은 못하고 공론에 부치려 했지만 이미 중신들도 이성계의 뜻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때 신덕왕후와 정치적 이해를 교감한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강씨는 자신의 소생으로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서 이성계의 최측근이자 실권자인 정도전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도전은 정도전대로 자신의 이념인 재상 중심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 고집이 정립된 성인이며 강성 지향적인 신의왕후 소생보다는 나이 어리고 부드러운 성격의 막내 왕자 방석이 세자가 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왕과 왕후, 그리고 당시 실권자의 심중이 일치하여 결국 태조가 즉위한 다음달 8월 20일에 11살의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불합리한 세자 책봉은 당연히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평을 불러 왔고, 그 중에서도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방원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미 결정된 이상 어찌할 수 없이 세월은 흐르고, 태조 5년(1396년)8월 13일에 강씨는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도 못한 채 위장병의 악화로 세상을 뜨게 된다. 애지중지하던 강씨가 죽자 이성계는 애모의 정이 간절하여 정사에도 관심을 잃고 지내는 양이 마치 고려 공민왕이 그의 왕비 노국 공주가 죽었을 때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성계는 강씨에게 신덕왕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지금의 정동 근처에 장사를 지내고는 그곳을 정릉이라고 불렀다. 또, 능 옆에는 흥천사라는 절을 짓고, 중들을 거처시켜 향불이 꺼지지 않게 모시도록 하였다. 이 흥천사 이후 조선은 왕실의 능에 절을 같이 짓고, 중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는데, 이 절을 조포사라고 한다. 그 후 태조 7년(1398년)8월 13일에 이성계의 애도 속에 강씨의 대상을 마치자 이성계는 상심의 골이 깊었던지 덜컥 자리에 눕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13일이 지났는데도 왕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자, 세자는 왕의 침소에서 직접 병수발을 하고, 모든 왕자와 근친들은 만일을 대비하여 근정전 밖의 한 장소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이때 정도전 일당이 왕의 전처 소생 왕자들을 모두 제거하여 어린 세자의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는 소문에 노심초사하던 방원이 먼저 기습 공격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척살하고 이복 동생인 방번, 방석과 매제인 이제까지 죽이니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이성계는 이 사실을 보고 받고 경악과 분노에 휩싸였으나 결국 어쩔 수 없이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로 다시 세웠다. (장남 방우는 고려를 멸망시킨 아버지가 못마땅하여 해주 수양산에 들어가서 완전히 세상을 등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사에 더 이상 뜻을 잃고 있다가 그 다음해 9월에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정치 일선에서 아예 물러나 버렸다. 왕위에서 물러난 지 2년 후에 넷째 아들 방간이 지중추부사 박포의 선동으로 난을 일으키고 또다시 골육간에 권력 쟁탈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세상사 자체에 환멸을 느껴 금강산을 거쳐 아예 고향인 동북면으로 들어가서 환궁하지 않았다.
그 후, 방원이 그 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아 등극하자 방원은 부자간의 불목에 대한 백성들의 시선도 부담스럽고 이성계의 노환도 걱정이 되어 이성계가 평소 신임하던 창녕부원군 성석린을 보내서 겨우 그를 환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울분은 아직 가시지 않아 태종 2년(1402년) 11월 밤에 홀연히 대궐을 떠나 소요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함주로 가서 다시 칩거하고 말았다. 야사에 의하면 이성계는 이 시절 태종이 문안사를 보내면 모두 죽여서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 소식이 없는 사람을 함흥차사하고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즈음, 안변부사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기도 하여 이성계가 외지에서 거처하는 것 자체가 말썽의 소지가 되었기 때문에 방원은 이성계가 왕사로 존경하던 무학을 보내서야 겨우 그를 대궐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고 새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였지만, 그의 말년은 이토록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젊어서 그 발군의 판단력도 나이가 들자 흐려졌는지, 아니면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앞선 것인지, 장성한 전처 소생들을 모두 제치고 계비 소생의 막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우를 범하여 비극의 씨앗을 스스로 뿌리고 말았다. 어쨌든 인생을 안온히 정리해야 될 노년에 밀어닥친 비극은 그에게 엄청난 고뇌와 허탈감을 안겨 주었다. 그는 결국 젊어서부터 신앙으로 믿어왔던 불교에 더욱 몰입하여 궁전 내에 덕안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염불 삼매로 하루하루를 살다가 태종 8년(1408년) 5월 24일에74살을 일기로 말년의 한을 삭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이루고 난 후 방심을 한 것인지, 사리를 벗어난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애꿎은 자식들간의 살육극을 자초하고 자신은 말년을 오욕으로 고통받다가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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