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새 시대를 열어간 선도자 이성계 (1/3)
조선의 인물을 기술하면서 태조 이성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범인으로서는 이루기 힘든 큰일이며 하나의 민족사에 있어서도 큰 획을 긋는 대사건으로서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 의미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외침으로 인한 흥망성쇠가 아니라면 국가 권력층 내의 정권 이동은 설사 그것이 한 나라의 멸망과 생성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반 민중과는 상관이 없는 권력층의 부침 이상의 큰 의미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왕조 사회라 하더라도 새 나라의 창건은 그 시대 전반에 걸쳐 새로운 가치 체계 및 이념을 정립하므로, 그 실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일반 백성의 생활에도 일대 변화가 없을 수 없다. 따라서 새 왕조의 가치를 창건 이후 사회상의 발전이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순기능적으로 역할을 하였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할 때, 조선은 중기 이후의 시대적 부패상이나 지나친 유교적 고집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창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무튼 이성계는 우리 민족 마지막 왕조의 시조로서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며, 특히 혼란기에 정세를 장악하고 새 시대를 연 인물로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대상이다.
전란 속에 뜬 별
이성계는 고려 27대 충숙왕 4년(1335년)에 화령부(현 영흥)에서 아버지 이자춘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중결이고 호는 송헌이었는데 왕위에 오른 후 이름을 단으로 바꾸면서 자도 군진으로 고쳤다. 그의 선조는 원래 전주 사람으로 고조부 이안사 대에 간도 지방인 남경으로 들어가 원의 지방관으로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는데,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에서부터 이춘, 이자춘에 이르기까지 원의 지방 관리인 천호 정도의 벼슬을 하였다. 시기는 원의 쇠퇴기로서 고려 조정은 배원 정책의 기조가 높았었고 급기야 공민왕 5년(1356년)에 고려가 쌍성 총관부를 공략할 때 쌍성의 천호로 있던 이자춘이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지금의 함흥지방 이북을 고려가 탈환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성계 집안이 고려의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공민왕 10년(1361년)에는 이자춘이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지금의 함경도 지방인 동북면 일대의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형성된 기반이 장차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서 성장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아버지의 후광이나 군사적 물리력만을 배경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가 고려 말의 혼란기에 있었던 수많은 전란을 통해 빼어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난세를 맞아 자신의 길을 열어간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도와 쌍성 총관부를 공략한 것부터 강계지방 만호 박의의 난(1361년), 홍건적 침입(1362년), 원의 나하추 임입(1362년), 최유와 원군의 침입(1364년), 동북면 삼선, 삼개의 난(1364년), 왜구 토벌(1380년),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1382년)등에서 보여준 발군의 전공이 그를 고려 정계에서 확고부동한 지위로 격상시켜 주었다. 아무리 상승 장군이라 하더라도 출전한 모든 전장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개인의 무예도 물론이려니와 전략적 능력도 뛰어나야 하므로, 이 점만으로도 이성계의 비범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에게 패해 겨우 목숨만을 부지했던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후일 탄복하기를, "이자춘이 자기 아들 자랑을 천하에 늘어놓아 비웃기를 그지없었는데 직접 상대해 보니 과연 허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는 일화만 보더라도 무장으로서 이성계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개인적인 무예의 출중함에 대한 수많은 예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아서 명궁 소리를 들었으며 완력도 세어 화살촉도 배만한 크기의 것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화살은 장사로 이름이 났던 그의 아버지조차도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라며 버린 것을 주워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니 그의 용력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완강한 체력을 타고난 데다 어려서는 사냥을 통하여 육체를 단련하였고,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임기응변이나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전략적 사고를 습득하였다.
유연한 정치감각
어느 시기에나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질시하고 경계하는 무리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게 마련인데, 이성계가 하찮은 지방 군벌 세력 출신이면서도 고려 정계에서 큰 탄핵 없이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갔던 것을 보면 그의 정치적 능력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 말이 크고 작은 전란의 와중에서 뛰어난 무인을 사장시킬 수 없었던 현실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겠으나 그의 인간적 처세 능력도 무예 못지 않게 탁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강골한 무인이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는 융화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결정적 시기에 그와 적대적 관계에 섰던 최영이나 정몽주 등과도 정치적 입장 차이로 반대 세력이 되었을 뿐 그 이전에는 어떤 기록에도 서로 반복하였다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무반이면서도 일찍이 조준, 권근,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지지 세력을 넓혀갔다는 것이다. 물론 세력가를 통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는 무리들이 이성계의 주변에 모여든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같은 무인도 아니고 기존 권력가들도 아닌, 어찌 보면 그 시대의 개혁 추구 세력인 신진 유학자들과 교분을 쌓아간 점은 그의 탁월한 시대 정신이나 정치적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일면이다.
물론 이성계 자신도 변방 세력이고 신진 사대부들도 그 시대 상황에서는 자신들의 뜻을 세울 수 없다는 공통적 소외 의식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감정적 유대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대 인간의 연대라는 것이 입장의 유사성만으로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서로를 인정해 줄 수 있는 동렬적 사고의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신진 유학자들과의 교류는 그가 고려 정계의 중심 세력이 되기 이전부터였기 때문에 정치적 결합을 통한 상호 이해 충족이라는 측면과 함께 동지적 의기 투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일생 동안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불교에 대해 배타적인 사상을 지닌 인사들과의 결탁은 그가 개인적 믿음관을 초월하여 시대적 필요를 이해한 탁견의 소유자였음을 잘 알게 하는 대목이다.
고려 말은 불교계의 지나친 횡행으로 그 폐단을 척결하지 않고는 사회개혁을 이룰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개인의 믿음과는 다르게 배불주의 자들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진 것인데, 이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취하기 어려운 일면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이성계는 수많은 전공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면서 시대의 필요성을 꿰뚫어보아 그때까지는 장외 세력이었던 개혁적 인사들을 포용하여 결정적 시기에 대업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