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미녀들의 신화 - 김남석
제2장 마성의 육체 뒤에 남은 슬픔
'전갈'이라 불린 전설적인 배우 - 마리네 디트리히
아름답게 늙은 여인은 있다. 그러나 젊었을 때의 미모를 그대로 유지하는 여인은 많지 않다. 여기 이 여인, 미리네 디트리히는 어떤가.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각선미와 가는 눈썹, 음영이 깊은 냉냉한 얼굴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시대의 선망을 한몸에 받아 왔다. 그래서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늘 남성들의 시선을 모아 왔다.
세계적인 각선미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다리를 지닌 마리네 디트리히. 최고의 각선미를 자랑하는 그녀의 다리는 그에 걸맞게 그 당시에 무려 200만 달러의 보험에 들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아름다운 각선미를 유감없이 보여 준 영화는 놀랍게도 그녀가 일흔일곱 살에 찍은 영화 <저스트 어 지골로>였다. 인생의 황혼기에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대단한 정력이지만, 스크린에 등장한 그녀의 자태가 쉰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데에 모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영화라는 것이 분장술에 의해 20대도 60대로 보여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마리네 디트리히가 단지 분장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특히 검은 멋쟁이 드레스에 살짝살짝 가려진 아름다운 다리는 그녀의 보물답게 완벽하고 건재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저건 요물이야." "마네킹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자아냈다. 그녀의 다리는 200만 달러 다리답게 아직도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며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녀가 이처럼 완벽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여배우라는 직업을 가졌을 때부터 남보다 엄격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조개가 들어가면 섹시하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빼고, 눈썹을 뽑아 내고서 아이펜실로 얇게 눈썹을 그릴 정도로 미에 관심이 많았던 배우였다.
"어차피 배우의 길을 걷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의무지요."
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이상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게 남아 있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왔던 것이다. 그녀는 배우로서 자신을 관리하는 데 엄격했을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그만큼 엄격하고 철저한 긴장감의 연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녀를 두고 많은 식자들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장부라고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사상에 걸맞게 어네스트 헤밍웨이나 레마르크 같은 예술가들과 교제를 하였다. 그런 지성적인 남자들만 골라서 사랑을 하였으며, 그녀 또한 그런 남자들로부터만 사랑을 받았다.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스페인 전선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여객선에서였다. 1930년대 중반 호화 여객선 '일과 사랑'에 우연히 같이 탄 것이 계기가 되어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여객선 레스토랑에서 13번 자리를 받은 그녀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그때 헤밍웨이는 키가 크고 눈썹이 진한 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자신이 배정받은 자리를 양보하였다. 장시간 여객선을 타고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문학과 사상 그리고 세상의 일상사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후 미국에 도착해서도 두 사람의 만남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두 사람 사이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세계적인 대문호와 대스타의 평범하지 않은 관계는 줄곧 '우정'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미국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함께 사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개선문>의 작가 레마르크였다.
"레마르크는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없으면 그는 곤란한 사람입니다."
당시 레마르크는 디트리히와 같이 나치스가 싫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와 그녀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게 된 것이다. 그의 작품 <개선문> 속에서는 디트리히와 똑같은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콧대가 높고 눈과 눈 사이가 넓은 창백한 얼굴의 가수 '죠안'은 미트리히 그 자체였고, 또 다른 당장인물인 감성이 풍부하고 나치 독일을 미워하는 사교계의 꽃 '남 케이트'도 디트리히의 다른 일면이었다. 프랑스의 배우 장 가방도 그녀와 친한 관계의 남자였다. 그러나 그만은 다른 남자들과 성격을 달리한다. 두 명의 대작가 외에도 장 콕토, 루키노 비스곤티 등 마리네 디트리히가 어떤 방식으로 든 친했던 남자들은 전부 지적인 예술가들이었는데, 장 가방은 책 읽는 것은 싫어했고, 극장이나 오페라홀에서는잠을 잤으며, 멋진 매너도 없었고,지넉인 대화도 하지 못했다. 그는 노르망디의 자연을 사랑한, 마음씨 좋은 털털한 연예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헤밍웨이와 레마르크, 장 가방에게는 일면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바위와 같이 단단한 체격이었고, 내면에는 셈세하게 떨리는 혼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배우이자 가수 그리고 투사
디트리히의 이름이나 얼굴, 또 그녀의 유명한 노래 <릴리말렌>의 그 독특한 목소리는 잘 알고 있지만 영화로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녀는 <모로코>에서 게리쿠퍼와 같이 공연한 적이 있다.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보고 흘러흘러 모로토의 허름한 술집에서 가수가 된 그녀는 영화속의 '아리로리'로 분하여 퇴폐적이고 아름다우면서 선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역시 그 잘 빠진 다리가 거침없이 각선미를 드러낸다. 스토리 자체는 서로 내일도 없는 사랑에 불타는, 과거 있는 남녀의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하지만 광할한 사막이라든가 모로코의 술집, 대자연의 풍경이나 외인부태, 몰락한 여가수 등등 그야말로 독특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특히 사막 저편으로 죽을 각올 떠나는 게리쿠퍼를 쫓아서 모래에 발을 빠뜨려 가며 달려가고 매달리는 라스트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랜 감동을 준다. 디트리히가 하이힐을 벗어 버리고 비틀거리며 가는 장면에서는 관개도 자신의 발바닥에 뜨거운 모래의 감촉을 선명히 느낄 정도였다.
디트리히는 1901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1924년 영화 관계자인 루돌프 자퍼와 결혼하였다. 딸 마리아를 낳은 후, 1930년 미국으로 혼자 건너가 <모로코> <간첩X27> 등의 영화에 출연하여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디트리히가 영화의 제1선을 떠났을 때는 나이 오십이 지나고 있었다. 남편도 있고 딸도 성장하여 결혼했고 저축된 돈도 있을 네는 은퇴해도 좋을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은퇴 대신 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노래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순례했다. 과거 나치스를 싫어해 버려야 했던 그 모국에서 다시 노래할 무렵에 그녀의 나이는 이미 일흔이었다. 물론 가수 선언 이전에도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노래를 하고 있었다. 활발한 배우 시절에, 그것도 전장의 최전선을 누비면서 말이다. 그만큼 그녀는 열정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에겐 돈과 명예와 가정이 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풍족한 삶을 누릴수 있었지만 그녀는 가수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녀를 높이 사는 이유는 투사의 얼굴을 대중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국이 나치 독일이 되었을 때 히틀러의 정책을 실랄하게 비판했다. 히틀러와 그 측근들을 혐오한 나머지 국적을 버린 여자였다. 그녀가 미국인이 되어 할리우드에서 얌전히 영화만 찍었다면 나치 독일도 그녀를 용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얌전히 있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뜨거운 피를 그대로 잠재울 수가 없었다. 수없이 많은 인터뷰와 신문 지면을 통해 독일군과 히틀러를 비난했다. 그녀는 유태인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할 때 독일 국민은 왜 침묵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녀는 독일 국민들에게마저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원하여 미군에 3년간 종군하였다. 그것도 알제리, 이탈리아,벨기에,프랑스 등 위험천만한 전장과전선에서 <릴리말렌>을 부르며 다녔다. 전장을 누비던 군인들은 세계적인 대스타의 노래와 용모에 반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녀는 투쟁하는 가수였다. 과거에는 공연을 하거나 여행을 할 때마다 36개의 트렁크와 50개의 짐을 지니고 다니던 대스타였지만, 그 당시 그녀가 갖고 다닌 소지춤은 슈츠 하나뿌닝었다. 그녀는 그렇게 전장을 누비며 노래로 그녀의 조국 독일과 싸웠다. 그녀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을 용서한다? 그것은 독일에 의해 고통받았던 이들의 특권이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히틀러는 침묵 속에 잠들고 있지만 히틀러의 영혼은 아직도 독일과 독일인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이처럼 용기 있는 발언을 한 독일인이 또 있을까? 나치스를 신봉하고 세계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그녀는 전갈 같은 여자로 매도되고 있다.
건강한 미인, 큰 인물
그녀의 노래 중에 <나는 아직 베를린에 슈츠케이스를 두고 있습니다>라는 노스탤지어풍의 곡이 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슈츠케이스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에는 지나간 그리운 날들이 들어 있습니다. 베를린의 공기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나는 슈츠케이스를 가지러 또 베를린에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병사 디트리히, 용기 있는 여성 디트리히. 그녀의 삶은 전쟁과 같은 것이었다. 특히 조국을 적으로 삼았다는 의미에서 인생은 그녀에게 전장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독했다. 그녀가 히틀러와 나치스를 비난하고 있을 당시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독일에 남아 있었다. 매국노라고 불리는 딸을 두고 어머니는 얼마나 안타까운 생각을 했을까? 마리네는 어머니와 그의 여동생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며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딸과 서로 인정하고 서로 존경하는 좋은 남편과도 떨어져 살았다. 그러던 1976년 여름, 그녀의 좋은 동반자였던 남편 루돌프 자퍼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슬픔을 딛고 2년 뒤 <저스트 어 지골로>에 출연하였다. 그 이후 그녀는 파리의 하파트에서 조용히 생활하면서 노년을 보냈다. 그녀에게 부여된 마리네 디트리히의 전설을 안고서... 디트리히를 두고 사람들은 가장 현명하고 멋진 여성이라고 말한다. 마릴린 먼로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그렇게 부르진 않는다. 그만큼 그녀는 여느 여배우가 따라오지 못할 기품과 위엄이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건강했다. 그녀는 건강한 미인이었고, 큰 인물이었다.
그녀가 멋있다는 것은 헤밍우에나 레마르크와 같은 남자들에게 사랑받은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훼밍웨이나 레마르크와 같은 남자들을 '골라서 사랑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누구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자신이 사랑의 대상을 골라 찾아다녔다. 지적이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점잖은 남자들을. 일생 동안 한 사람의 남편을 사랑하고 그와의 결혼을 지키며 살아온 여자. 극히 보통의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로 딸을 키우며 살아온 여인. 인간의 생명은 모두 평등하고 귀하다는 신념으로 조국을 버리면서까지 투쟁한 용기있는 여성. 바로 마리네 디트리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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