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미녀들의 신화 - 김남석
제1장 사랑은 전설이 되어
아르헨티나를 사랑했던 성녀 - 에바 페론
1997년 전세계는 한 여자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을 그린 영화 <에비타>에 주목하였다. 이미 그너에 대한 전설적인 삶과 사랑은 <아르헨티나여 울지 마오>라는 노래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아 온 지 오래이다. 한마디로 이 노래 덕분에 아르헨티나라는 국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로 이 노래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세기의 가수 마돈나의 얼굴로 스크린 위에 그려진 여인, 에바 페론. 미국이나 유럽도 아닌 남미의 개발도상국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안주인이었던 그녀가 죽은 지 45년 만에 다시 우리들 가슴 속에서 부활 한 것이다. 그녀의 인기는 아른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필리핀의 이멜다와 버마의 아우산 수지 그리고 지나치게 총명한 미국의 힐러리가 있지만, 이들은 에바 페론이라는 한 여자의 인생 역정을 따라올 수가 없다.
거리의 부나비에서 대통령의 부인으로
그녀는 1919년 아르헨티나의 대초원 로스 톨도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이 일하던 농장 주인과의 상이에서 다섯 명의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넷째로 에바가 태어났다. 이런 이력과 계급성은 그녀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들을 발판 삼아 권력의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아무도 기뻐하거나 돌보지 않았던 사생아 시절에서부터 대통령의 안주인이 되기까지, 그녀가 겪어야 했던 인생 역정은 그래로 한 편의 드라마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그녀의 입지전적인 삶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는 일종의 대리 만족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가 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자 간단한 옷을 넣은 가방 하나만을 들고는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모든 게 낯설고 어려은 삶이었지만, 타고난 미모 덕택에 그녀의 삶은 공장 노공자의 그것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낮에는 삼류 배우로 활동하면서 밤이면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날아다녔다. 때로는 하룻밤의 열정으로, 때로는 짧은 동거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부나비처럼 떠돌던 그녀가 후안 페론이라는 육군 대령과 만나 긴 동거 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넷이었고, 후안의 나이는 마흔여덟이었다.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후안 페론은 히틀러의 사회주의를 내걸고 선거를 치러 당선되었다. 페론이 대통령이 된 것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며 선거운동을 했던 그녀의 절대적인 역할 때문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페론에게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은 무수히 맣다. 페론이 자유민주주의 성향이 큰 '반페론 주위자들'에게 감금되었을 때, 그녀는 미모와 정열과 수류탄과 돈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노동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매수하고 사주햇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이루어졌고 그 덕택에 후안 페론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에바 신화'에 감동한 노동자들이 후안 페론을 지지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후안은 에바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니지 못한 하층 계급의 지지율을 그녀는 갖고 있었다.
"에바. 우리 결혼합시다."
후안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직전 장기적인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떳떳하게 결혼하자며 에바에게 제의를 했다. 에바가 하층 계급을 단결시키면 그 힘이 자신의지지 세력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후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페론주의를 내걸고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후안이었지만 페론주의를 추동하고 선봉에서 이끈 것은 에바였다. 페론주의는 애국자본주의를 우선 아르헨티나에서 몰아냈다 그 위험하고도 과감한 조치를 그들은 페론주의에 입각해 거침없이 취해 나갔다. 자신들의지지 기반인 노동장들의 생활과 권익을 위해 법을 만들고 실행에 옮겼다. 한순간에 노동자들의 생활이 신장되었다. 남녀 노동 임금에 대한 차별도 거의 사라져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90%에 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근접한 임금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다. 또한 여성들의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평등을 입법화했다.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등 여성들의 활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에바와 후안을 환호하며 그 동안 고통받고 억압당하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운명을 바꿔 줄 인물로 믿고 광적인 지지와 열광을 보냈다.
독재자의 면모
대통령의 아내가 된 후 그녀는 자신이 마음대로 정권을 주무를 수 있도록 교묘히 자기 사람들을 내각에 임명했다. 또한 자신과 남편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들어갔다. 한마디로 김일성 우상화 작업과 다를 게 없었다. 국민학교에서는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는 글짓기 숙제를 해야 했으며, 에바를 차양한 자서전 <내 인생의 사명>을 배웠다. 우상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그녀의 독선을 염려한 나머지 반대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소리 없이 잡혀가 고문당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이제 그녀 때문에 흘린 눈물이 그 여자가 닦아 준 눈물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움을 준 사람들로부터는 성녀로 통했지만,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악녀라 불렀다. 따라서 그녀는 거룩한 악녀였고, 천한 성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에바의 생활은 나날이 사치스러워졌고, 군부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의 안주인에게 내맡겨진 아르헨티나 정부는 나눠먹기 식으로 이권을 챙기는 등 부패하기 짝잉 없었다. 그리고 국가의 기간산업을 확충한다는 미명 아래 무리한 중공업 계획이 추진되어 경제가 기우뚱거리고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런 와중에 에바는 척수백혈병과 자궁암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남은 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노동자와 빈민들을 만나고, 여성들 정치적인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조직을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말없이 저 세상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으며 또 한편으로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에바. 장례는 아르헨티나 국장으로 치러졌다. 한달간 아르헨티나는 에바라는 한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기뻐하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에바 페론이 없는 아르헨티나는 곧 혼돈 그 자체였다. 더 이상 후안 페론은 대통령에 머물 수가 없었다. 후안 페론에 대한 카톨릭의 반대가 심해지자 그는 권력을 이용해 카톨릭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페론은 자신의지지 기반이었던 군부에게 쫓겨나 1955년 해외로 망명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20년간 떠돈 에바의 시신
정권을 잡은 새 군부는 제일 먼저 '페론주의'를 없앴다. 그리고 아직 에바 페론의 노동자와 여성을 중심으로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의 시신을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빼돌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에바 페론의 시신을 당장 돌려 보내라." 페론주의를 지지하는 일부 국민의 거센 반발과 압력에 의해1971년 이탈리아에 있던 그녀의 시신은 후안 페론이 망명 가 있던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넘겨졌다. 여기서 에바의 시신은 또 한번 후안 페론을 위해 기적을 일으킨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는 잦은 정권 교체와 악성 인플레이션, 엄청난 실업률로 인해 혼란과 빈곤 그 자체였다. 노동자와 빈민들은 당연히 그 옛날 '에바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바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좌경 세력을 결성하고 투쟁의 기치를 내세우는 집단들이 늘어났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총파업이 이어지며 유혈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에바는 소원대로 죽어서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후광을 보내고 있었다. 정국의 혼란을 수습할 기력이 없는 군부는 망명 가있던 '후안 페론'의 귀국을 허용했으며, 뒤이어 선거를 실시했다. 197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의 후광을 업고 후보로 나온 일흔여덟의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 선거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인 61.85%를 얻어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는 기적을 보여 주었다. 노동자와 여성들은 에바가 저승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르헨티나를 도와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페론 대통령은 노령에다 심장마비로 권자에 오른 지 열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망명지에서 결혼한 이사벨 페론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이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에바의 관을 자신의 관저로 옮겨 놓는 일이었다. 비록 죽었지만 에바가 있는 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 에비타'의 효험은 그녀에게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을 가로챈 여인을 죽은 사람인들 좋아할 리가 있을까. 결국 세계 최초의 이 여자 대통령은 21개월 만에 군부의 쿠데타로 물러나고 말았다. 대통령의 관저에 극진히 모셔져 있던 에바의 관도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에 안치되었다. 죽은 지 24년만에 비로소 그녀는 정열을 바쳐 일했던 조국 아르헨티나의 흙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녀로 하여금 깊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하였는가?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조국 아르헨티나에 묻혔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이룩한 전설적인 신화를 들으며 지금도 열광하고 있다. 1997년 영화 <에비타>로 그녀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다시 한번 복원되었고 세계인들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거리의 창녀에서 대통령의 안주인으로, 독재자로, 그리고 노동자와 여성을 사랑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입지적인 여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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