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 이원용
행동하는 지성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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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의심이 나는 것이 있으면 이를 끝까지 규명하여 밝혀내는 강인한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18세가 될 때까지 중학교에서 그런대로 별 탈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그 후 마르세유 대학의 입학 시험에 떨어지자, 전학을 깨끗이 단념하고 말았다. 그 무렵부터 그는 과학을 좋아하는 한편 위고나 발자크 등의 작품을 구해다 밤이 가는 줄 모르고 탐독했다. 그렇지만 집안 형편은 더욱더 어려워져, 가냘픈 어머니에게만 의지해서는 입에 제대로 풀칠해 나가기도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한두 끼를 굶어도 결코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태연히 이를 참아냈다. 오히려 어머니를 걱정하며 위로하는 편에 섰다. 그는 입학 시험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위해서도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 대신 독학으로 학식을 쌓겠다고, 남모르는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가계를 다소라도 돕겠다는 생각으로 세관의 말단직에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보조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제도가 개혁되는 바람에 그만 면직 대상이 되어,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처없이 파리 시내를 방황하면서 직업을 구해 돌아다녔다. 그때는 불을 밝힐 수가 없어 집에 돌아가서도 독서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초 한 개라도 구하게 되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집으로 달려가, 자신이 공복인 것도 잊은 채 그 초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열심히 책을 읽곤 했다. 초가 다 타 없어지고 캄캄한 어둠이 찾아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날 한 끼의 식사밖에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새삼스럽게 허기를 느끼곤 했다. 그럴 때면 부엌으로 들어가 더듬어 먹을 것을 찾아봤지만 먹을 것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허리띠를 새삼 강하게 졸라매고는 그대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허기진 소녀에게 웃옷을 벗어 주다
하루는 역시 두 끼나 굶고 돈 한 푼 없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넣고 안개 낀 파리 시내를 방황하고 있었다. 배고픔이 한층 더 강하게 엄습했다. 그는 배고프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는 공원 벤치에 어른스럽게 상체를 기댄 채 시를 짓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소녀가 접근해 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은 특히 추운 날이었다. 그렇게 벤치에 기댄 채 쓰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소녀가 추위에 입술을 덜덜 떨며 가까이 다가와서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동전 한 푼도 없습니다. 게다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졸라가 대답했다. "그건 나도 똑같은데..." 그리고 나서 잠시 생각한 끝에 "잠시만 기다려, 밥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게 해 줄 테니" 하더니, 일어서서 웃옷을 벗어 소녀에게 주며, "이걸 헌옷집에 가서 팔면, 밥 한 끼 정도 먹을 돈을 줄 거야. 자아 어서 그렇게 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선뜻 졸라가 벗어 준 웃옷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졸라가 채근했다. "하나도 미안해할 거 없어. 집에 또 입을 옷이 있으니까, 어서 받아 가지고 가." 하는 수 없이 소녀는 그의 웃옷을 받아 가지고 총총히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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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라는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시 쓰는 일을 그만두고 열심히 출판에 관련된 일에 전념했으므로, 사장이 일을 그만두고 열심히 출판에 관련된 일에 전념했으므로, 사장이 이를 알게 되어 그의 지위를 조금 높여 서기로 임명함과 동시에 연봉 3,000프랑을 주기로 했다. 그렇지만 졸라는 도저히 문학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유지 내지 지속해 나가려는 강한 집념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바쁜 중에서도 조금씩 틈을 내어 소설을 써 나갔다. 이것이 마침내 많은 수의 단편 소설이 되었으며, 이를 한 권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이 뜻밖에도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어 그는 촉망받는 작가로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계기로 "피가로 신문"의 기자가 되기를 희망했는데, 당시의 주필이 그의 재능을 인정해, 즉각 발탁해서는 신간 담당자로 채용했다. 이렇게 해서 졸라는 실직 상태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낭만주의까지 버리고 자연주의의 투사로서 일어서게 되었다. 이 무렵 프랑스의 문단에 자연주의가 성해져서, 젊은 문인이라든가 미술가 등이 서로 앞을 다투어 자연주의의 기치 아래 모이게 되었는데, 졸라는 그 중견이 됨과 동시에 대표자가 되었다. 그 대신 적대하는 측의 공격을 한몸에 받게 되어 맹렬한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문단에서의 화려한 싸움
1867년, 주필의 명에 따라 그는 당시의 파리 회화 박람회를 비평하게 되었는데 프랑스 화단에서 명화로서 정평이 나 있는 작품까지 가차없이 매도했으므로, 화단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며, 유명한 신문인 "피가로 신문"조차도 팔방에서 공격을 받아, 도저히 맞받아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신문사측은 졸라로 하여금 그 비평을 중단케 함과 동시에 그를 해고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다시금 가난한 생활로 빠져 들어갔으며, 그런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보고 들은 것 또는 자신이 부딪친 상황이라든가 하층 사회의 고충이나 열악한 현실 및 죄악 등을 후일의 저작의 소재로 삼았다.
"피가로 신문"을 그만둔 후 그는 다시금 다른 신문사에 입사했지만 그의 논평이 과격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재직할 수가 없었으며, 그 후에도 다른 신문사에 입사했지만 같은 이유로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어떤 신문은(루 크르세르) 졸라의 논문 때문에 발행 금지의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 까닭으로 파리가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그의 논문을 게재해 줄 곳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생활의 어려움은 날로 더해 갔다. 그렇지만 그렇듯 온갖 곤란 속에서도 그는 비범한 정력과 불굴의 정신력을 발휘해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 년 동안에 돈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이 그 무렵의 졸라의 절실한 소망이었다.
작가로서 성공하다
금전 문제로 걱정하는 일 없이 조용히 글을 쓰고 싶다는 희망은, 다행히도 한 출판업자의 협조로 실현되게 되었다. 그의 계획은 프랑스 제2 제정 시대의 어느 한 가족의 생활을 20권의 총서 속에 담는 것을 통해, 유전의 법칙에 지배되는 인간 사회를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엄청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단한 노력이 아니면 이룩해 낼 수 없는 일이다. 출판사와의 계약에 따라 10년간에 걸쳐 매년 두 권씩 출판하기로 하고 매월 500프랑씩 보수도 받기로 했다. 출판사에서 이렇듯 후한 대접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 동안의 졸라의 작가적인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면 정규 교육이라곤 중학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가, 그 동안 남모르게 어느 정도로 노력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그는 남이 편히 자는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소설을 썼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보람이 있어, 그 후부터는 닭과 토끼를 벗삼아 조용한 정원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서 자기 뜻대로 즐거운 소설 집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20권의 총서는 유명한 "루공 마카르 총서"인데 그 중 불과 두 권을 출판했을 때, 출판사가 사업에 실패해 문을 닫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의 대작 집필의 큰 계획은 좌절되게 될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젊고 대담한 청년 출판업자가 출판사를 그대로 인수해, 졸라로 하여금 아무 걱정 말고 그 작업을 계속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졸라는 속필이 아니어서 계약대로 약속한 원고를 넘겨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불구하고 출판사 쪽에서는 계약한 대로 돈을 매월 졸라에게 지불했다. 그러하여 3년이 끝날 무렵에는 1만 프랑의 빚을 출판사에게 진 꼴이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으므로 채무에 대한 담판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가 보게 되었다.
그러나 출판사 사장은, "나는 선생의 소설 덕분에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나는 선생께서 어쩔 수 없이 체결한 계약에 의해 혼자서 모든 이익을 차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계약을 고치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새로운 계약이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선생은 저에게 한 푼의 빚도 없게 됩니다. 빚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가 선생에게 1만 프랑의 빚이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한 출판사 사장은 다시금 그에게 1만 프랑의 돈을 건네 주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약과 때마침 투르게네프의 주선으로 러시아의 어떤 평론 잡지에 기고하고 계약이 성립되어 그는 1년에 평균 2만 프랑의 수입을 얻게 되어 안심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7세경까지 저능아라고까지 불렸던 그가 이만큼 대성하기에는 남모르는 숨은 노력과 피나는 분발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가까운 사람들도 잘 모르는 일이며 오직 혼자서만 이를 악물고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살아오면서 부끄러운 일을 한 게 없었으므로 모든 부정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고 격렬할 정도로 이를 파헤쳤으며, 또한 공격했다. 그의 평론이 대담할 정도로 격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도 대담할 정도의 필치로 주제를 파헤쳐 대단히 노골적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정직한 성격의 발로로서 졸라만큼 정의의 신념이 강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실천력, 다시 말해서 졸라 만큼 정의라고 믿는 바에 따라 매진하는 용기를 지녔던 사람도 모르긴 하지만 드물었을 것이다.
"나는 탄핵한다."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 때 졸라가 취했던 태도는 그의 대쪽 같은 성격은 가장 잘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관철해 나가는 강한 의지의 사나이라고 할 수 있다. 드레퓌스란 사람은 당시 프랑스의 군인으로서 포병 대위였으며, 유대인이었다. 참모 본부에 근무중 독일에 구사 기밀을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군법회의 재판 절차의 비합법성 등의 폭로로 여론을 자극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군부, 교회, 우익 단체 등에 의한 재심 반대 운동도 격렬해졌다. 더하여 졸라를 중심으로 아나톨 프랑스 동 작가를 비롯한 다수의 지식인들이 참가해 프랑스 국내가 온통 둘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대세가 간신히 재심 쪽으로 기울어졌으나, 군법 회의 는 다시금 유죄 판결을 내렸고,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1897년에 진범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군부에서 사실을 은폐하는 등의 부정이 있었으며 반유대주의 감정이 원인이 된 조작 사건임이 드러났다. 여기에는 또한 군부 쿠데타의 움직임도 있어 그야말로 제 3공화국의 위기를 초래할 사건이었다.
그 당시 졸라는 그 사건이 군부의 조작이라는 것을 확신해 군부를 성토, 고발하는 성명을 당시의 "오로라 신문"에 게재했다. "나는 탄핵한다, 나의 명예와 전 저작과 전 재산을 걸고 나는 군부의 잘못을 고발 및 탄핵한다." 이런 식으로 서두부터 격렬의 극을 다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정계에는 보수당과 공화당이 있었으며, 공화당 안에 국민파가 있었고 급진 사회파가 있어, 실제로 정권 싸움을 한 것은 이 공화당 가운데의 두 파, 즉 국민파와 급진 사회파였으며, 국민파와 손을 잡은 집단에 유대인 배척단이라는 것이 있어, 경제적인 이해 관계와 인종적인 편견에서 국내의 유대인을 배척할 목적으로 그러했던 것이다. 드레퓌스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이었으며, 그가 유대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유대인 배척단과 손을 잡고 있는 국민파에 의해 누명을 썼던 것이다.
육군 군부는 대부분이 국민파였으므로 세력으로 봐서 단번에 그렇게 돼 버린 것이다. 그간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레퓌스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감정적으로 법을 다루는 육군의 횡포를 꾸짖었다. 그리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 행렬이 시가지를 누비고 지났다. 시위대의 선봉에서는 "타이스"의 작가인 아나톨 프랑스가 빨간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군부의 횡포를 규탄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대담하게 정면에서 군부를 질타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에밀 졸라가 감연히 일어섰다. 1897년의 일로, 졸라는 언제나와 같은 과격한 필치로 프랑스 정계의 부패를 적발하고 도려내어 이 사건의 부정을 통박하면서 파카르 소령 등과 손을 잡아 육군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세상이 떠들썩해지면서 이에 응해 드레퓌스 연합 전선이라는 결사까지 생겨 유대인 배척당과 충돌해 자칫하면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프랑스 정부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어, 민의를 받아들여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명령했으며, 그 결과 드디어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보다 앞서 이 때문에 졸라는 정부의 비위를 건드려 본인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재판에서 3,000프랑의 벌금과 12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미리 알고 영국으로 피신해 숨어 있었다. 1899년 사건이 일단락되자 그는 즉시 귀국했는데, 이 드레퓌스 사건이 제대로 해결된 것은 졸라의 용감한 주장 덕택이며, 이 사건은 한낱 프랑스 한 나라의 정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종 문제인 동시에 인도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졸라는 한낱 예술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도주의의 전사였던 것이다. 졸라의 진면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디까지나 진실을 밝히는 게 목적
그의 소설 또한 어디까지나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했다. 그의 예술관은 후에 언급하겠지만, 요컨대 과학자가 물질 세계의 현상을 연구해서 설명하듯이, 인간의 현실을 연구해 기술한다고 하는 것이 그의 예술적 태도였다. 따라서 종전의 작가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인생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묘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으며 온갖 악덕을, 또한 외설스러운 일까지 계속해서 묘사해 나갔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혹시나'하고 그의 품성을 의심하기까지 했지만, 이는 커다란 오해로서, 그는 매우 인격이 높은 훌륭한 신사였다. 이는 그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다 같이 그를 경애하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18세 이후 철저하게 독학으로 많은 지식을 쌓았으면서도 성격이 본래 강직하고 정직했으므로 일그러짐도 비뚤어짐도 없이 그대로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의 일상 생활은 성직자의 그것하고도 비슷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는 일까지 규칙대로여서,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매수의 소설을 썼다. 이는 거의 기계적이었으며 결코 게을러서 예정된 일을 등한시하는 일이 없었고 또한 잘 써진다고 예정했던 매수 이상을 쓰는 일도 없었다.
그가 인간을 보는 눈이 기계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활, 그의 창작도 역시 기계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전에 소설을 썼으며 오후에는 평론을 써곤 했다. 그리하여 12시가 되면 1분도 어김없이 식당에 나타나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점심 식사를 했는데 그는 대식가로도 유명했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낮잠을 잤다. 낮잠에서 깨게 되면 그때부터 졸라는 소설가가 아니고 평론가가 되었다. 문제의 신랄하고 예리한 필봉을 휘둘러 희곡을 논했고 그림을 평했으며, 때로는 사회 및 정치상의 평론을 써서 이를 러시아의 신문사에 송고하기도 했다. 남의 작품을 평한다는 것은 그만한 안목과 식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의 평론을 각계가 문제시했던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런 식견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말하자면 졸라는 그만한 공부를 해서 누구든 귀를 기울일 만큼의 높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평론은 자주 프랑스 사회로 하여금 격분케 하기도 했지만, 그는 태연히 이렇게 말했다.
"공격하는 자를 공격토록 내버려둬라.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도 스스로 사고한 것은 자유롭게 토로할 권리가 있다."
그의 소설은 곧잘 심한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 세계로부터의 공격이었다. 혹자는 그의 소설을 가리켜 인심을 타락시키는 음탕한 책이라고도 했으며, 또 혹자는 부질없이 인간의 죄악을 들춰내기만 하는 부도덕한 책이라고도 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입장에서 서로 앞다투어 그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공격자의 얕은 소견과 속된 해석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옳게 그의 진가를 이해했다. 참다운 문예 비평가는 그를 부도덕한 인간으로 보는 대신 최대의 도덕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예술관이 어떠했는지 잠시 더듬어 보기로 하자.
과학적 자연주의와 실험 소설 제창
졸라의 자연주의는 일반적으로 졸라이즘이라 불리고 있다. 그만큼 그것이 독자적인 색깔을 지니고 있었으며, 플로베르나 모파상 등의 그것과 완전히 면모를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과학적이란 일면에서 졸라이즘만큼 색깔이 짙은 것은, 일반적으로 과학적인 자연주의 속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 한마디로 자연주의가 과학적인 자연 속에서 자란 것이며, 과학적인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과학적 자연의 직접적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 것, 가장 과학적인 것이 그의 자연주의였다. 그의 예술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여러 사상을 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관찰하고 해부하여 현실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데 있다. 그의 대표적인 "루공 마카르 총서" 20권은, '제2제정 치하에 있어서의 한 가족의 자연적 및 사회적 역사'라 풀이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는 그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개인의 집단인 한 가족과 사회의 관계를 제시하기 전에 유선 옛날의 가족이 10여명의 자손을 남기고 단절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리하여 그 남녀 자손 각각이 전 가족으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성과 갖가지 경우의 변화에 따라 여러 종류의 비극이 야기된다고 하는 일관된 사상을 그리려고 한다. 그 방법으로서 나는 여기에 유전과 상황이라는 두 가지를 세밀하게 연구해 하나가 다른 것을 탄생시키는 관계를 과학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또한 그는 그의 예술론인 "실험 소설"에서, "금세기의 세계는 그야말로 과학의 세계이다. 이와 같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이상이라든가 절대 혹은 불가지라고 하는 말은 이제 그만 하자. 사람은 정직하고 솔직해져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과학적인 자연에 철저했는지는 이를 통해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과학의 연구법을 문학 작품 제작에 응용한 것이다. 마치 과학자가 물질 세계의 현상을 연구해 기술하는 것과 같이 인간 세계의 현상을 연구 기술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장 철저한 유물론적 견지에서 소설은 썼다고 할 수 있다. 졸라는 관찰이라는 사실 위에 한 걸음 더 나가서 실험이라는 것을 제창하고 있다. 관찰이란 스스로 현상에 대해 보는 것이지만, 실험이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경우를 만들어 인간을 이 새로운 경우에 놓고 보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인간을 시험관 속에 넣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란 물론 실험자의 뜻대로 되는 물질이 아니다. 시험관 안에 넣어 그 반응을 실험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역시 상상을 추구하지 않으며 안 된다. 상상을 추가하는 이상 아무래도 주관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사정에 작가가 가지고 있었던 틀 속에 맞추어 넣어 인간을 보는 것이다. 졸라의 소설은 객관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그의 자연주의가 파탄을 가져온 원인, 이른바 실험 소설의 약점이 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약점이라는 더욱더 그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그가 어떤 식으로 소설을 구상해 어떤 식으로 줄거리를 묘사해 나갔는지, 본인 자신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이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고자 할 때는, 소설 속에 어떠한 사건을 만들어 내며, 어떠한 인물을 출현시키고, 어떤 식으로 시작해 어떤 식으로 끝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주인공의 성격을 분명히 마음속에 그리도록 전념하며, 그런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 인물의 기질과, 그가 태어난 가정 및 받아 온 감화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을 깊이 생각한다. 그 다음은 주인공이 관계를 가질 인물의 성격이나 습관 또는 직업이라든가 환경 등을 잘 연구한다. 이와 같은 연구를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소설 안에 묘사해야 될 일이 스스로 정해진다. 그리하여 만약 제1급의 극장 광경을 그린다든가, 제 1급의 요정의 모양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는, 우선 이들 장소를 훤히 알 수 있게 될 때까지 이를 실지로 관찰하는 데 주력한다. 이런 식으로 2, 3개월간 열심히 연구 관찰하게 되면, 그리고자 하는 생활 상태를 완전히 알게 됨으로써, 참다운 색깔과 참다운 향기를 내 소설에 부여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내가 묘사하는 사회는 나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회로서, 주로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기억을 펜 끝에 환기시켜 그렸으므로 내가 묘사한 인생은 진실한 인생인지 공상의 인생이 아니다. 살아 있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용이하지만 기억을 연결짓는 실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를 연결하는데 공상의 살을 가지고 하지 않고, 논리의 끈을 가지고 한다.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일보다 논리적으로 자연적으로 또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인간의 성격 및 그런 경우에서 발생하는 결과를 제시하는 일에 가장 고심한다. 나는 사소한 실마리에 연연하기보다 복잡한 관계를 찾아내서 마침내는 비밀의 큰 죄를 발견해 내는 탐정과 똑같은 방법으로 소설을 쓴다. 만약 아무리 해도 사실의 관계를 발견해 낼 수 없을 경우에는, 나는 이에 대해 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다. 왜냐하면, 나는 반드시 그러한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동시에 때가 오지 않으면 발견해 낼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2, 3일을 기다리면, 날씨가 싱그러운 아침이나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순간적으로 전에 도저히 찾아내지 못했던 관계의 실을 발견해서 되어 그때까지의 모든 어려움이 깨끗이 없어지게 된다. 일의 관계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고통이 가슴에 응어리지져 있는 동안에는 어쩐지 불안하지만, 어려운 문제가 제거됨과 동시에 마음은 평온을 회복해 나의 일에서 괴로운 분자는 완전히 없어져 남은 것은 단지 펜을 들고 쓴다고 하는 마음 편한 일뿐이다. 나는 거의 한 정도 찢지 않고 원고를 쓰며, 써 버리고 나면 인쇄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읽어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매일 3페이지 분량만 쓰므로 나의 소설은 그것을 며칠 동안에 완성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가 있다. 어떤 소설은 6개월이 소요되었으며 어떤 소설은 1년이 소요되었다.]
그는 스스로 변장을 하고 하층 사회에 출입했는가 하면 마굴을 탐험하는 등, 실험적인 관찰을 통해 얻은 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했다. 그는 그와 같은 관찰을 자세하게 스케치해 몇 십 권의 노트를 만들었다. 그의 창작의 주요부는 이와 같은 노트를 만드는 일이며, 노트만 완전히 작성할 수가 있으면 그 다음에 만들어지는 작품은 발자크의 반공상적인 작품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렇듯 졸라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주로 하여 거리낌없이 인생의 어두운 면을 묘사했다. "실험 소설"에서 그가, "우리의 임무는 사회의 죄악의 원인을 찾는데 있다" 고 말한 것처럼. 사회의 죄악의 원인을 찾는 것은 사회의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사회를 개량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래도 졸라는 사회 개혁가라는 의욕을 가지고 펜을 들었던 것 같다. 그는 언젠가 "나는 유일한 이상을 위해 싸우는 병사일 뿐이다" 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는 열렬한 이상가였던 것이다. 이렇듯 그가 이상가라는 점에 그의 진면목이 있었던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루공 마카르 총서"에서 졸라는 루르드(Lourdes), 로마, 파리로 이루어지는 "세 도시의 이야기"를 썼다. 졸라는 여기에 이르러 이상가적인 면모가 더욱 현저해진다. "세 도시의 이야기"를 쓴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1권에서 내가 쓰고자 한 점은 현재의 과학의 발전은 모든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다 주었지만, 그와 같은 희망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며 사람들이 과학 이외의 힘, 즉 신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제2권 로마에서는 근세 카톨릭 교회의 야심과 고심을 함께 그렸으며, 그리하여 이를 루르드에 도착한 순례자의 순결한 종교심과 대조시키려고 생각했다. 제3권에서는 파리의 부패와 죄악을 낱낱이 묘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파리에서 내가 묘사하려고 한 것은 바로 문명국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폐해이다.]
"세 도시의 이야기"에 이어 그는 "사복음서"를 썼다. 이것은 생식, 노동, 진리, 정의의 4개 소재로 된 것인데 진리의 편이 채 완성되기에 앞서 그는 과실로 인한 가스 질식으로 그만 아깝게 목숨을 잃었다. 바로 1902년 2월 29일의 일이었다. "세 도시의 이야기"에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사상은, 인생의 의의는 활동에 있다는 것, 즉 힘껏 활동하고 힘껏 사랑하며, 힘껏 일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사복음서"의 사상은 이를 한층 더 강조한 것으로, 생식 편에서는 인류의 번식은 인류의 발달을 의미하므로 낳고 또 낳으라는 사상을 그리고 있다. 파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유아 살해죄를 파헤치고 척결하며, 간음과 낙태, 어린이 살해 등 죄악을 상세하게 그려 냈으며, 이와 함께 한편에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자손이 번창해 단란한 일가의 화목한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생식의 복음을 주장했다.
노동 편에서는 빈부의 커다란 차가 사회로 하여금 더욱더 비자연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한다고 보아,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지능과 노동의 3자에게 이익이 평등히 나누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상을 묘사했다. 즉 한쪽에서는 프랑스에서의 노동자의 비운과 그 생활의 어두운 면을 열심히 묘사함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이른바 세 개의 커다란 이익의 평등한 분배에 의해 평화와 행복이 유지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 내고 있다.
진리 편에서는, 이것은 결국 탈고할 수 없었지만, 기독교와 여권과의 관계를 기술하려 한 것으로 "세 도시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통렬한 비난을 가한 것이다. 그는 당신의 생명을 중히 여겨라, 당신에게 평화와 건강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뿐이다, 당신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당신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생명을 존중했으며, 반대로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또한 신에 대한 의무 때문에 괴로워하고 혹은 내세를 원해 번민하는 것은 인생의 자연적인 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질주의자로서의 그의 인생관은 당연히 그랬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가장 철저한 물질주의였던 것이다. 그의 그와 같은 자연주의는 물론 물질주의에서 자라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연주의는 플로베르나 모파상의 자연주의하고는 다르다. 그의 자연주의는 그 안에 커다란 이상, 즉 구제의 대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단순한 문학인이 아니고 실로 용감한 인도주의의 전사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의 참다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촛불이 다는 것을 아껴 가며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공부한 보람과 가치가 바로 이런 점에서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졸라 (프랑스 소설가·문학평론가) [Zola, Emile-Edouard-Charles-Antoine, 에밀 졸라] Cliche Musees Nationaux, Paris 졸라, Edouard Manet가 1868년에 그린 유화 〈Portrait d' Emile Zola〉(부분),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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