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박차오르는 필흥
조선조 때 조씨라던가 하는 명필의 얘기가 있다. 주인공되는 조모라는 분은 물론 상당한 벼슬자리에 있고, 또 처신이 고결하여 사회의 칭송을 받는 분이었다. 그가 하루는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이 생겨 하인 하나만을 데리고 나귀를 몰아 대문을 나섰는데, 사실은 어디라고 뚜렷한 목표도 없이, 심심하니까 그저 바깥구경이나 할까 하고 그래서 나섰을 뿐이다. 그런데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연전에 작고한 매형 생각이다. 촉망받은 분이었는데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혼자된 누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바느질 품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고 계신 터였다.
“옳지! 게나 가 보아야겠다.”
그래도 살던 끝이라 아담하게 꾸민 중문을 들어서니 그댁 하인이 알아보고 반색을 한다.
“마님, 사직골 나으리께서 행차하셨사와요.”
옛날 법에 조관이라고 하여 양반이 하는 벼슬은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아홉 품수에 정과 종이 있어 18단계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6품 이상은 정, 종 품수 안에 다시 두 계층이 있어서 모두 30계단이다. 그리고 정3품은 동반(문관)일 경우 통정대부와 통훈대부로 갈리고, 서반(무관)을 절충장군과 어모장군으로 나뉘어서, 통정대부와 절충장군은 같은 정3품이면서도 당상관이라 하였고 나머지 둘은 당하관 품계였다. 그리하여 정2품 이상일때는 대감이라는 칭호를 올리고, 종2품과 정3품의 당상관을 영감이라 불렀으며, 그 이하는 모조리 나으리 - 한자로 쓸때는 진역 - 라 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벼슬지위가 높으면 젊은 영감도 있게 마련이나, 당상관에 오르기는 참으로 쉽지않은 일이다.
“어이구, 어쩐 일이셔? 동생이 우리집엘 다 납시니...”
누님의 영접을 대청에 올라서며 보니, 잘 정돈된 안방 방바닥엔, 중국서 들여온 좋은 비단이 이제 옷을 마르려고 펼쳐져 있다.
“동생! 잠깐 앉아 계시게. 내 장국상 차릴테니... 그동안 심심하더라도 잠깐 혼자 앉아 계셔야겠네.”
앞치마를 두르며 호들갑을 떨고 뜰에 내려서 갔는데, 동생되는 나으리는 딴 생각이 들었다. 방 안을 휘둘러보니 매형이 쓰던 문방구가 그냥 있는데, 아껴쓰던 용연도 그대로다. 얼른 잡아다니어 물을 붓고 먹을 갈았다.
“이크! 알맞은 크기의 붓도 그냥 있고...”
말이 장국상이지,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을 대접하려고 점심상을 차리는덴 시간이 조만히 걸렸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지.` 나으리는 잘 갈린 먹을 붓에 찍어 공글렸다. 그리고는 예의 중국비단을 폭 맞춰 방바닥에 깔아 폈다. 슬쩍 안마당의 기척을 살피고 나서, 팔을 걷어부치고 무릎걸음으로 비단폭 앞에 섰다. 고문진보나 문장궤범의 실린 글은 달달 외우는 터라, 구중의 좋은 글 하나를 책을 보지 않고 웅얼거리면서, 붓끝은 사뭇 바람을 일구어 행서와 초서를 섞어가며 써 내려가는데, 얘기쟁이 표현마따나 그냥 소맷자락에서 비파소리가 날 지경이다.
“아이구, 저걸 어쩌나?”
점심상을 마루에 놓으며 소스라쳐 놀라는 누님을,
“쉬이잇!”
손을 저어 제지하고, 여울에 흐르듯 용트름치며, 내려가는 필세에 누님도 혀를 내둘렀다. 동생이 명필이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참으로 놀랍다. 마지막 서명까지 하더니, 이마에 솟은 땀을 소매자락으로 닦아 올리면서 물러나 서서히 훑어본다. 그리곤 히죽이 웃으면서,
“누님! 모처럼의 바느질감을 버려놨으니 어떡하우?” “얘,칠복아! 이것 갖고 종로 육주비전 배주부에게 갖다주고 이와 똑같은 비단으로 한 필, 그리고 돈을 줄테니 쌀과 나무를 사서 지워가지고 오너라.”
방엔 글씨가 마르지 않은 채 있어서 점심상은 마루에서 받았다.
“역시 우리 누님이셔, 술도 마련하셨구려! 글씨를 쓰고 나서 컬컬하니, 그냥 이 공기에다 부어 주슈.”
연거푸 몇 잔을 들이키고 다른 음식도 걸신 들린 사람모양 탐스럽게 자셔 치웠다.
“동생! 식성은 변하지 않으셨네 그랴?” “그게 아니예요. 흥이 나서 글을 쓰고 났으니까 이렇게 먹히는 거지요.”
퇴침을 끌어당겨 베더니 이내 잠이 든다. 해가 설핏하여 하인 칠복이가 돌아오는데 아, 이게 다 뭐지? 쌀이 몇 섬, 나무가 바리 바리, 그것만이 아니다. 마루가 쾅 하도록 돈도 한짐을 내려놓았다. 나으리가 일어나 앉아 싱그레 웃었다.
“역시 배주부가 알아보는군!”
그 뒤 나으리는 누님에게 졸리고 배주부에게 부대끼었다. 그때 그런 글씨 다시 한 번 써 달라는 거다.
“그런 글씨가 그렇게 쉽게 써지나요? 벅차오르는 필홍이 일순 돋아야지!”
어느 원로 출판인이 애써 만든 책의 제호를 누구에게 써달라나 하고 궁리가 많았는데, 마침 마음에 드는 서체를 발견해 그의 댁을 찾았더란다. 이차저차 말씀 드렸더니 쾌히 승낙하면서 아무 날 오라 하기에 갔더니 글씨 쓴 종이 둘을 내어 놓더란다.
“이중 마음에 드시는 걸로...” “어느 게 먼저 쓰신 겁니까?”
그래 이쪽 거라 하길래
“네, 그것을 쓰겠습니다. 나중 쓰신거야 첫장의 모자라는 점을 보강해 겉모양은 정제돼 있겠지만, 기가 살아있는 건 처음 것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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