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죽 한 그릇 나눠주고 복을 받아
서울 남대문 밖 현재의 서울역에서 조금 남쪽 낮은편 일대를 도동이라 했는데, 그 날가지 끝으로 관운장을 모신 남관왕묘가 지금도 있고, 그 가까이 언덕위로 양녕대군의 종손이 살았다고 한다. 양녕대군이라면 조선조의 셋째번 임금 태종대왕의 맏아드님이다. 건국초의 왕운을 띠어서 그랬는지, 조선조 초기의 임금들은 예외없이 많은 왕자를 두었다. 태종 역시 훌륭한 아드님을 여럿 두어서 첫째가 양녕, 둘째가 효령대군, 셋째가 세종대왕, 넷째가 성녕대군이며, 후궁 몸에서 태어난 분이 경녕군, 성녕군, 온녕군, 근녕군, 혜녕군, 회녕군, 후녕군, 익녕군의 여덟 형제나 된다. 그밖에 왕후 몸에 난 공주가 넷이요, 후궁 출생의 옹주가 열씩이나 되니 대단한 자녀복이다. 전하는 말에 처음 세자로 봉했던 양녕대군이 덕을 잃어 세자를 폐하기로 조정에 공론이 돌자, 둘째 효령대군이 혹시나 자기 앞으로 왕 자리가 돌아올까 하여 얌전을 빼고 공부를 하는데, 형님 양녕이 방에 들어서며 책읽고 앉았는 효령의 엉덩이를 발길로 차면서 꾸짖더란다. `얘야! 정신차려. 부왕의 뜻이 어디 계신데, 내가 왜 너만 못해서 미친 체 하는 줄 아니? 목숨이 붙어 남으려거든 정신 좀 차려라.` 효령도 특출한 분이라 형님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곧장 불도 공부의 길로 들어서 버렸다고 하는데, 여러 형제 중에 세종이 더욱 영특하여서 그쪽으로 왕위를 물려줄 의사가 있으신 것을 눈치채고, 스스로 핑계를 만들어 세자 자리를 양보하였다고 하는 분이다.
얘기는 다시 바뀌어 양녕의 저택이 앞서 말한 도동에 있었고, 그의 증손이 눌러 살았는데, 그런 가문에서는 여느 집안 모양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의 4대까지만 사당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맨 윗대 왕자나, 특별히 나라에 공로 있는 분은 불천지위라고 하여, 연대가 오래되어도 그냥 모시고, 따라서 가족들 외에도 드나들 수 있게 따로 구획을 짓고 사당을 모시는 까닭에, 그런 곳을 별묘라고 하였다. 그런데 왕의 일가는 종반이라고 하여 공연히 높은 지위만을 주고, 실제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법도였으며, 왕실에서 촌수가 멀어질수록 국가에서 주는 생활비도 차츰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그것마저 아주 없어져, 궁하게 일생을 보내야 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 양녕대군 댁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손 지광이라는 분이 크나큰 집을 쓰며 살기는 하나,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궁한 처지에 놓여있는데, 하필이면 그 알량한 가정에 동냥중이 찾아들었다. 낮에 왔다면 곡식이나 조금 떠 주면 될 일이나, 저녁때 찾아들었으니 거절하면 한데서 잠을 자야 할 판이다. 어느 쪽이 염치가 없는지는 몰라도 그 중을 사랑으로 불러들이었다. 그러나 저녁을 따로 차려 대접할 형편도 못된다. 주인은 자기 앞으로 내온 한 그릇 죽을 객승과 나눠먹고 불을 못 때 차디찬 냉방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중은 아침에 일어나는 길로 하루저녁 신세진 것을 깊이 사례하고는 떠나는 마당에 물었다.
`저 댁 뒤의 단청한 건물은 무슨 집입니까?` `예, 파시조 되는 대군의 사당이고, 내가 그 증손이외다.`
그것을 듣고 나서 중의 하는 말이 기이하다.
`보아하니 무척 곤궁한 처지에 놓여 계시기에 소승이 수일내에 형편이 크게 트이실 방도를 일러 드리려는데 들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주인의 말이, “사람마다 저 타고 난 분복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대사의 힘으로 고쳐지겠소?” “일을 꾸미는 건 사람에 달렸고, 일이 이뤄지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공연히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한번 시험삼아 해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저 사당 앞의 큰 나무 몇 그루를 베어 버리시면 며칠 안 가 발복이 되실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객승이 돌아간 뒤 주인은 사람을 시켜 사당 곁에 줄로 선 늙은 홰나무를 모조리 베었다. 그것을 토막내 쌓으면서, “이것만 가지면 한겨울 춥지 않게 지낼 수 있겠지.” 하고 혼잣말을 한다. 그런데 며칠 뒤 영조대왕이 헌릉에 거동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깐 관왕묘에 들리셨는데, 거기서 사방을 둘러보자니, 규모는 큰데 볼품없이 퇴락한 옛 사당이 눈에 띠어서 근신에게 물었더니, 양녕대군을 모신 지덕사라는 것이다. 사손이 있으면 만나 보자고 하시었다. 지팡이를 짚고 남루한 차림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와 어전에 부복하니 정말 보기에 딱하다. 양녕대군의 13세손인 것을 물어서 알고 왕의 하는 말씀이다.
“대군이 양보하지 않으셨더라면 오늘날 나와 그대의 처지가 바뀌었을 거 아닌가?”
그리고는 궁에 돌아오는 길로 사당과 주택을 일신하게 중수하고, 생계를 넉넉히 대어주며, 증손은 곧장 남부도사로 임용 하였다가, 차츰 벼슬을 돋구어 목사까지 되었는데, 고생한 사람답게 백성을 은덕으로 다스려서 선치로 이름을 얻었다. 지광의 증손 승보와 그의 아들 근수 양대가 차례로 문과에 급제하여 똑같이 판서까지 지내니, 세간에서 도동 이판서댁이라 이르던 명문이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또한 그 문중의 출신이다. 중이 찾아들던 그날 저녁
“밥을 굶는 터에 손님은 웬 손님이여!” 하고 박찼더라면, 사당 앞의 나무를 베라고 일러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사당이 임금님 눈에 띌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죽 한 그릇 선뜻 나눠 먹은 후덕이 이러한 복록의 길을 열었다고 미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