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국그릇을 엎질러서
조선왕조 건국당시 공이 컸던 분에 하륜이라는 분이 있었다. 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고 최영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으며, 태조의 등극(1392년) 때는 이미 46세의 장년이었다. 특히 관상술에 뛰어나 일찍이 동료 친구 민제에게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으나, 둘째 사위 이방원(뒷날 태종)같은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한번 만나게 해 주시오." 해서 교제를 터 깊이 사귀며, 하늘을 덮을 영특한 기상이라 하였다니, 태종에 대한 기대가 무한히 컸었음을 알 만하다. 태조 7년, 그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받아 떠나기에 앞서, 그의 저택에서 여러 친구들이 모여 전송하는 자리가 벌어졌는데, 당시 한창또래 씩씩한 청년왕자 정안군 이방원도 자리를 같이했다. 당시 우리나라 잔치하는 식이, 음식상은 각자가 따로 받고, 술은 단지 앞에서 부어 한잔씩 들고 가, 돌려가며 권하는 식이었다. 하륜은 자기를 전별하는 자리에 귀하신 몸인 왕자가 친히 임석하신 것을 감격스럽게 여겨, 몸소 그 앞에 가 무릎 끓고 잔을 받들어 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국그릇을 왕자 옷자락에 둘러엎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한창 팔팔하던 정안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뛰쳐나와 자신의 말을 끌어내 타고, 속력을 내어 자택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륜은 허둥지둥 왕자의 옷자락을 잡고 만류하려 하였으나 뿌리치고 가 버리자, 자신도 뒤따라 말을 달려 정안군의 뒤를 쫓았다. 누가 보나 왕자께 실례한 것을 사과하러 가는 것이었다. 정안군이 댁에 돌아와 대문에 들어서 그대로 말을 몰아 중문을 통과해 들어왔는데, 뒤미처 하륜이 게까지 따라 들어오며 붙잡지 않는가?
`나으리!`
정안군도 그제사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방에 데리고 들어와 마주 대해 앉았다.
`나으리, 어쩌려고 난국을 앞에 두고, 그 풍파를 어찌하시려고 안연히 앉아 계시는 겁니까?` `...`
`왕위 계승에 있어 평상시에는 적장자로 잇는 법입니다마는, 건국초에는 공 있는 왕자를 세우는 것이 도리요, 또 전례이온대, 지금 우에서는 막내왕자 방석을 세자로 세웠지 않습니까? 이럴 땐 유능할수록 신변이 위험한 법입니다. 세자 방석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 보십시오. 용같고 범같은 이복 형님들이 쭈욱 버티고 있는데, 마음놓고 그 자리를 지키겠습니까? 거기다 그쪽에는 꾀주머니같은 정도전이 딸려 있습니다.`
이번엔 정안군이 딱 20년 연상의 이 노련한 정치가 하륜의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소?` `예! 소인은 충청도 임지로 떠납니다마는 서울에는 이숙번이 지안산군사로 있어 일을 같이 의논할 만하며, 그밖에 아무아무가 같이 보좌해 올릴 것입니다. 아, 이것좀 보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남의 의심을 사겠기로 이만...`
그가 황망히 떠나가는 뒷모습을 뒷날의 태종인 정안군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계기로 모의는 급속도로 진전해 이숙번의 지휘아래 정도전을 잡아 없애고 방번과 방석 두 이복동생을 잡아 죽이는 제1차 왕자의 난은 발발하였고, 태조는 화가 치밀어 그길로 서울을 떠나 금강산을 구경하고는 함흥 고향에 돌아가 오랜동안을 버티는 사이, 많은 충신이 잇달아 목숨을 잃는 함흥차사의 비극으로 펼쳐진다. 이 사실상의 쿠데타에서 정도전을 사로잡았을 때,
`살려만 주시면 극력 왕업을 돕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태종은 눈을 딱 감고 `네가 고려조를 망해 먹고, 이제 또 창업초의 이 왕조마저 망하게 하려는 거냐?` 하며 그 자리에서 목쳐 죽였다고 하는데, 일제말 서울 창동역 확장공사장에서 그의 것이라는 시체가 미이라 형태로 발견되어, 6.25 사변 때까지 국립 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었다. 공사 현장 발굴에 참여했던 한 인부의 얘기를 들으니, 말짱한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 일으켜 세워놓고 재 보았더니, 자기의 키도 적지는 않은데 어깨밖에 닿지 않더라고 하며, 머리통이 이만이나 하고 왼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칼로 찢긴 자국이나 있더라고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댔다. 박물관 유리함에 진열됐을 때 보니, 옷으로 가려서 상처는 볼 수 없었고, 확실히 우람한 체격에 어마어마하게 큰 머리통에는 사모 둘레의 철대가 그냥 붙어 있었다. 그것이 정도전이라는 중요한 근거는 창업초 지금의 노원벌을 국도로 정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삼봉이라는 그의 호도 자신이 사는 집터에서 우람하게 쳐다보이는 삼각산의 세 봉우리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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