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남한산성의 숨은 애국자
정조 때 홍경모가 엮은 <남한지>에 이런 인물 얘기가 올라 있기에 소개한다. 서흔남이라는 사나이가 있었는데, 아병의 사노였다고 기록돼 있다. 아병이라면 대장을 따라 본진에 있는 병사다. 옛날 제도에 일반 장정으로 군적에 올라있는 이는 번을 들어서 근무하였으니, 오늘날의 군복무와 같다. 그런 중에 대장을 따라 본진에 있었다면, 이는 직업군인으로서의 사병, 말하자면 현역 근무하는 하사관 정도로 알면 될 것이다. 선대에 누가 법에 걸렸으면 죄값으로 팔려 개인 또는 관청의 소유가 되어, 대대로 자유를 모르고 매어 지내야 했는데, 관청에 매었으면 관노, 여자는 관비, 개인 소유일 때는 사노 또는 사비라 하였다. <춘향전>을 읽으면 딸을 기생시키고 싶어진다고 한 독설가도 있지만, 기생의 공식 신분은 관비다. 그 구실에서 벗어나려면 대비정속이라 하여, 다른 데서 사비를 사다 대신 바쳐야 했었다. 아병 자체가 썩 뚜렷치 못한 처지에 다시 그의 종 신분이었다니 그의 비참한 처지는 미루어 볼 만하다. 기와도 굽고 대장간도 하며 지냈다고 했는데, 기록대로 옮기면 `믿음직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해서 모두의 천대를 받았다`고 하였으나, 이런 것은 기록의 성질상 후의 좋은 일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과거를 과장해서 나쁘게만 썼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견해일 것이다. 그러던 그도 병자호란이 터져, 임금이 성안으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옮겨와 앉고, 2만 명 가까운 군사가 들끓게 되자 환경이 달라졌다. 청나라 군사가 몰려와 성밖을 겹겹이 둘러싸고, 심지어 바깥 둘레로 솔가지 울타리를 치고 방울을 달아매어 시척만 해도 소리가 나게 하였으니, 성안에 든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독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다급해진 정부에서는, 누구고 바깥 세상에 나아가 이 다급한 사정을 우리 군대에 전해줄 사람은 없느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때 대대로 벼슬하며, 입으로 충의를 뇌까리던 이른바 세록지신들은 별로 소용이 되지 않는다. 이 혹한에 적의 눈을 속이며 낮에는 숲 속에 숨고 밤이면 기어나가 적진을 뚫고 나아가기란, 손에 물 안 묻히고 편히 지내던 그들에게는 생의도 못할 험한 일이었다. “누구고 성을 넘어 나아가 우군과 연락의 길을 터줄 사람은 없는가?” 이 소식을 듣고 서흔남은 선뜻 나섰다. 무지막지하게 살아온 그의 경력으로 보아 적임일지는 모르나, 여벌 목숨이 따로 있다면 모를까? 십중팔구 죽을 일에 뛰어들다니 여간 결심으론 안될 일이다. 그는 가뜩이나 손질 않아 새둥지같은 머리에 재를 끼얹어 헝클어뜨리고 들비비었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땟국이 지르르 흐르는 옷은 몸을 못 가려 군데군데 맨살이 삐어지고, 손에 가진 것은 지팡이와 바가지 한쪽이라. 임금이 내리신 유지를 간격맞춰 짜개어 지노를 꼬아서, 찢어진 옷의 갈피갈피를 꿰매어 감췄다. 그리고 어느 날 성을 넘어 나갔는데, 비척비척 걸어가다 넘어지고, 눈보라치는 속을 엎드려 기기도 하며, 사람을 만나면 손으로 입을 가리키며 서글픈 목소리로 먹을 것을 청했다. 이렇게 적의 진지를 며칠 헤매다가 그곳을 벗어나 달려가 임무를 수행하고, 또 그 꼴을 하고 적진을 헤매는 척 되돌아오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니, 아무리 강인한 신체라도 그 고생이 어떠하였을까? 그러다가 어느날 새벽 안개 짙은 가운데 성을 기어 넘다가 적병 눈에 띠었다. “멍쩡한 놈이었다” 적도 그것을 알고는, 이미 허실이 들어나 진지를 버리고 본진을 삼전도로 옮기어 경계를 더욱 삼엄히 하였다. 예서부터는 구전으로 전해오는 얘긴데, 성 지키는 군관의 보고로 그가 성을 넘다 들킨 것을 아시고, 임금 인조대왕은 그를 부르시었다.
“여러 차례 수고하였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전쟁도 곧 끝나겠으니, 그만 쉬도록 하라. 너의 공로를 무엇무엇으로 보답하겠나? 원하는 것이 있거든 서슴없이 말해 봐라”
임금은 입으셨던 곤룡포를 벗어서 하사하시며, 그를 천민 명단에서 빼고 통정대부 훈련원 주부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시었다. 그가 여생을 조촐하게 지내다 죽었을 때, 일생의 영예로 여겼던 곤룡포를 저승에서 자랑으로 여기라고 함께 묻었다고 전하는데, 그의 무덤은 동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첫번째 동네 뒷산에서 썼고, 조정의 모든 관원은 임금의 곤룡포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 앞 큰길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통과하기를 수백년간 지켜왔었다. 그런데 요 몇해전 그의 산소자리에는 서울 사람 부자의 호화분묘가 들어 앉고, 그의 무덤임을 알리는 조그만 비갈마저 비탈 아래로 나뒹굴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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