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정열은 외곬으로
공부하거나 일한 때면 한눈팔지 말라고 어른들은 자주 침을 놓는다. 한눈팔다가 일을 그르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모처럼 천품을 잘 타고나, 열심히 공부한 끝에 벼슬길에 올랐으면, 나랏일이나 열심히 하랬지 누가 한눈을 팔랬나? 재물에 한눈을 판 사람들은 탐관오리로 낙인이 찍혔고, 미색에 눈이 팔린 사람들은 집안을 어지럽히고 나랏일을 그르쳤다. 어찌 그뿐이랴. 그들이 끼친 오명은 길이길이 그 자손들에게 부담이 되어 남는다. 하도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오성, 한음 두 분 재상의 내력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오성은 나라에 끼친 공로로 그의 본관인 경주의 옛이름을 따 오성부원군에 봉했기 때문에 그 작호를 따서 부르는 것이고, 별호는 백사였으며, 한음은 이덕형의 호였다. 두 분 다 선조를 모시어 임진왜란 때 활약했고, 어려서 같이 자라며 재치 넘치는 장난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분의 행적을 살펴보며 느끼는 것이, 두 분 모두 사심이 없었다는 것이니, 오성이 청백리에 녹선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나 알 것이다. 한음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31세에 대제학이 되고 38세에 우의정을 하여 흑두재상으로 전무후무하게 출세가 빨랐다는 사실과 명나라 군사의 사령관인 이여송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등이 고작으로, 이것은 그의 전 인생의 표면을 스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임금을 의주까지 모시고 피난갔다가 왜군이 물러나 서울로 수복했을 때의 일이다. 영의정으로 국사를 총괄하랴, 또 폐허가 된 서울에 왕이 거처하실 창덕궁을 수축하는 총책임을 맡아 밤낮 없이 뛰고 있었다. 헌데 못견디겠는 것이 당시의 근무복 차림이다. 속에 모시 홋옷을 받쳐 입고, 그 위에 사로 지었다지만 겹으로 된 단령을 입고, 사모관대를 차리고 나서면, '속대발광욕대규' 글자 그대로 `미쳐서 소리라도 지를 지경이다` 거기다 더운 날씨에 집에서 일일이 식사를 날라오는 데도 문제가 있다. 그래, 대궐 가까이에 조그만 집을 한 채 마련하고 소실을 얻어 살림을 차려줬다. 소실을 얻은 것은 당시 상류층에서는 예삿일이었는데, 미색을 탐해서가 아니라 집무중에 잠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또 입에 맞는 식사로 일에 능률을 올리자는 목적이었다.
어느 하루 푹푹 찌는 오후에 그는 그 무거운 차림을 끌고 소실 집엘 들어서 숨을 헐떡이며 손을 내밀었다. 당시 제호탕이라고 하여, 갖은 향기로운 약재를 넣어 달여서 얼음에 채웠다가 꿀에 타마시는, 소위 약을 겸한 청량음료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 대접 먹었으면 해서 내민 손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어미는 것을 보니 바로 그 제호탕이 아닌가. 그는 여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약그릇을 보고 또 다시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더니, 별안간 뒤로 돌앗! 저벅저벅 대문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에 발그림자를 들이지 않은 것이다. 요즘 말로 딱지를 놓아버린 것이었다. 며칠 안 있어 오성 대감이 소실 집엘 찾아갔다. 그 활달한 기질에 커다란 소리로 부르며 들어선다.
“대감 계시우?” 여인이 반색을 해 맞아들여 앉히곤 눈물로 하소연이다. “한때나마 나라 안의 제일 가는 어른을 남편으로 모셨다는 것만으로도 제 일생의 영광이옵니다마는, 무슨 죄가 있어 버리신 것인지 연유나 속시원히 알았으면 한이 없겠사와요.” 그런 뒤 오성 대감은 대궐 뒤뜰에서 한음과 마주쳤다. “대감, 그 계집 버리셨수?” “예, 버렸습니다.” “왜, 똑똑하던데...” “너무 똑똑해서요.”
그날, 날씨는 푹푹 찌는데, 꼬옥 제호탕이 한 그릇 먹고 싶어서 말없이 손을 내밀었더니, 내어 놓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무럭무럭 귀엽고 대견한 생각이 끓어오르더란 말이다.
“그렇기로 이런 난국에 계집이나 사랑하고 있을 형편이 되얍지요. 그래서 그냥...”
한음은 당시 41세의 한창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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