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오늘 사냥감은 바로 네놈이다
흔히 사람 덜된 것을 보고 등신이라고 하는데, 등은 같다는 뜻으로 몸뚱이와 똑같이 만든 것이 등신이다. 곧 남에게 몹쓸 짓을 해 보복이 두려워 떠는 자가, 밤에 자객이 들더라도 저대신 칼맞아 죽으라고, 저 잘 자리에 이불덮어 눕혀놓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모양만 사람 닮았지, 생각할 줄도 행동할 줄도 모르는 것이 등신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그런 꼴이라면 기가 찰 노릇이다. 인조 때 이원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왔던 이여송이 이땅에서 낳은 손자다. 무과에 급제해서 어느 고을에 군수를 내려갔는데, 거기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다. 서울의 어느 철리(임금의 친척)집을 배경으로 한 양반이 있어 관가 곡식을 꾸어다 먹고 갚지를 않는데 자그마치 삼백 섬이나 되었다. 당시 사환미라 하여서 봄에 어려운 때 가난한 백성에게 관의 곡식을 꾸어 주고, 가을에 햇곡식으로 쌍아두자는 모처럼의 좋은 제도였는데, 그런 곡식을 이놈이 권세를 믿고 꿀꺽 삼켜 놓았으니 밑천이 있어야 관을 운영하지. 그렇다고 그 자가 그걸 갚을 형편이 못되는 것도 아니다. 이군수는 당연한 처사로 사람을 보내 사환미 갚기를 독촉하였다. 그랬더니 양반댁에 사환미를 독촉하려 오는 놈이 어디 있느냐고, 볼기를 쳐서 돌려보냈다. 이군수가 그 꼴을 당하고도 다시 아무 말이 없자 주위에선 수군거렸을 것이다.
“이번 원님도 별 수 없군! 상대방 권세가 워낙 세어서...”
그렁저렁 가을도 저물어 얼음이 얼고 눈보라치는 날씨가 되자 군수는 관청안을 모두 풀고 군사들을 휘동해 사냥을 나섰다. 물론 짐승도 잡으려니와 남자다운 씩씩한 놀이로 울적한 심회도 풀고 군사들의 기능도 시험하고 친목도 도모하는 그야말로 다목적의 행사였다. 일부는 목을 잡아 덫을 놓고, 군수 자신은 왼손에 잘 길들인 매를 받쳐 들고, 군사는 사냥개를 휘몰아 골짜기를 뒤졌다. 꿩이 뛰쳐나오면 날쌘 매를 날려 덮쳐서 잡고, 낮잠 자던 멧돼지는 놀라 일어나 달려가다 덫에 걸리고, 창에 찔렸고, 노루는 내뛰다 말고 등성마루에서 먼산바래기를 하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물에 걸린 토끼랑 여우. 너구리. 오소리... 푸짐한 그날 수확을 갈라메고 군사들은 좋아라고 떠들면서 산을 내려왔다. 산 아래 개울가 너른 자갈밭에는 미리 군막을 쳐놓아 군수는 우선 거기 들어서 좌정하고, 수행원들은 각각 소임을 따라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에 사냥한 짐승의 각을 떠서 굽고, 지지고 토막내 썰어 넣어서 끓였다.
“여보게 김비장! 저어기 보이는 것이 아무아무댁일세. 자네 가서 내말을 전하게. 여기까지 왔으니 의당 들어가 뵈어야 도리에 옳겠으나 몸에 군복을 걸치고 있어서 사가로 찾아뵙기 미안하여 그러노라고, 고기도 넉넉하니 잠깐 나오시면 반갑게 뵙겠습니다고, 공손하게 여쭙게.”
집에 있던 그 양반 작자는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 의관을 정제해 거드름을 빼고 찾아왔다. 군막 앞에 이군수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며 외친다.
“잡아라! 오늘 사냥에 제일 큰 수확은 네놈이다.”
결박을 지어서 말 위에 동그마니 올려매 높고, 등에다가는 미리 준비한 깃발을 세웠는데 거기 쓴 글귀가 엄청나다.
“역적, 관명을 거였했으니 역이요, 관곡을 훔쳤으니 적이다.”
술과 고기로 배를 불린 군사들 뛰-따-두리둥둥 길군악을 늘어지게 치면서 앞뒤를 옹위하여 관가에 도착하자 옥에 밀어 넣었다. 말할 것도 없이 먹혔던 관곡은 즉시 완전 회수되고, 양반은 고개를 떨구고 옥문을 나와서 사라져 갔다. 그 뒤 서울 권력가의 보복이나 받지 않았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두려웠다면 이런 멋진 처사는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의 몇 대조 할아버지가 이러저러한 높은 벼슬을 했노라고 너불거리는 이를 가끔 보는데 웃기는 얘기다. 말씀만 하오면 그저 옳다는 지당대신도 있고, 해바라기 족속도 있으며, 탐관오리는 오히려 낫지, 무능해서 밑의 놈들이 마구 먹어도 쇠통 모르고 앉았던 등신도 많은데. 과연 옳은 판단으로 기골있게 제 몫을 하였던가? 그러지 못했다면 부끄러워서도 잠자코 앉아있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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