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방석을 비켜 앉은 처녀
조선조 제21대 영조대왕은 역대에 유례없이 83세까지 장수하신 어른인데, 중년에 세자를 뒤주에 가둬 자진케 하는 등 궁중생활은 별로 순탄치 못하였다. 거기다 춘추 환, 진갑이 지나 정성왕후 서씨가 하세하시니, 국법에 곤전은 비워 두지 못하는 제도라, 상기가 끝나자 왕후 간택을 서두르게 되었다. 간택이라면 양반가 처자들의 출가를 일체 금하고, 후보자를 궁중에 불러들여 일차로 선발하는 것이 초간택, 둘째, 셋째의 간택으로 마지막 결전을 거쳐 왕비나 세자빈을 들여 앉히는 절차인데, 혼사만 결정되면 팔자를 고칠 수도 있고, 때로는 궁중의 복잡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빠지는 일도 종종 있다. 신랑감 노대왕이 친히 간택 장소에 나와 보니, 햇병아리같은 처녀들이 지정한 자리에 얌전을 빼고 앉아들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방석을 비켜나 바닥에 앉아 있다.
“그대는 왜 지정한 자리를 비워두고 게 가 앉았는고?” “예! 아비 이름이 거기 있사온대 어찌 감히 올라 앉으오리까?”
당시 제도로 처자의 아버지 벼슬과 이름이 방석 끝에 써 붙여 있어서, 올라 앉으면 깔고 앉는 꼴이 됐던 것이다. 임금은 그 대답을 대견하게 여기면서 여럿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깊을꼬?”
지명받은 처녀마다 혹은 산이 깊다 하고 혹은 물이 깊다 하며 대답하는 중, 방석을 비켜 앉은 그 처녀에게 물었더니 사람의 마음이라고 대답한다. 그래 그 까닭을 물었더니
“물건의 깊이는 잴 수 있으되, 사람의 마음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나이다.”
상감은 아마 속으로 `요것 봐라`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으로 또 물음을 던졌다.
“이 세상에서 무슨 꽃이 가장 좋은고?”
어떤 처녀는 해당화다, 어떤 색시는 모란, 복사꽃이다 제각금 다르게 대답한 중에 예의 처자를 지명하였더니
“목화꽃인 줄로 아옵니다.” “그건 왜지?” “예, 다른 꽃은 한때 좋은 데 지나지 않사오나, 면화는 온 백성을 따뜻하게 옷입혀 주는 공이 있사옵니다.”
때마침 밖에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에 우에서는 즉흥으로 또 한마딜 물어셨다.
“저 월랑의 기와골을 헤아려 알 수 있을꼬?”
처녀들은 모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나, 둘, 셋, 넷, 헤고 있는데, 이 처자만은 상감이 자꾸 자기만 유의해 보시는 것같아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그냥 다소곳이 숙이고 앉았기에 짓궂게 또 한 번 지명해 보았다. 그랬더니 몇십 몇줄기라고 딱 맞춰낸다. 한층 귀여운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해서 알아냈는고?” “예! 낙수가 떨어져 패인 구멍을 헤어서 알았나이다.”
상감은 그만 눈이 휘둥그래져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이 열다섯살 난 처녀는 일약 왕비로 뽑히어 국모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분이 바로 정순왕후 김씨인데 아버지 한구공은 충청도 서산땅의 가난한 선비로, 아기딸 세살 적에 서울로 이사했으나, 간택에 뽑혔을 때도, 말이 벼슬이지 조정의 마련없는 말단 직책에 매어 있던 터라 남산골 그의 오막살이 게딱지 같은 초가에는 이제 쨍 하고 볕이 든 셈이었다. 부원군을 봉하고 집을 옮기고..., 그것은 차차 얘기고, 우선 궁중에선 내관이 파견되었다. 왕비 후보인 처녀의 의복을 지어서 보내 드려야 되겠어서 그래 의양을 재고자 처녀를 앉혀 놓고 앞품, 섶 길이, 소매넓이 등등 재고나서
“아가씨, 이제 뒷품을 재게 잠깐 돌아 앉아 주십시오.” 그랬더니 오 조그만 아기씨 말 좀 들어보라. “그대가 돌아가면 안되겠는가?” 파견돼 나온 늙은 나인은 그만 아찔하였다. `이런 실수가 어디 있담!`
체통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누구더러 멋대로 돌아 앉아라 마라, 당키나 한 소린가? 늙은 상궁은 그만 고패를 떨구었다.
“황공하여이다.”
그리하여 대혼 절차를 마치고 궁중에 들어가니 누가 뭐래도 당당한 중전마마다. 그런데 상감께서 노욕이라야 할지, 노망드셨달지, 그 몸에서 소생을 바라시는 거다. 그래 내의원을 시켜 부지런히 포태하기에 좋다는 약을 지어 보내시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왕비는 사태를 옳게 안다. 당신보다 7년이나 연장이신 세손이 계시지 않는가? 이런 환경에 자신이 아기를 낳아놓으면 또 한 번 사단이 일것은 뻔한 일이라, 중전은 그 약을 대려 올리면 받아서, 매번 잡수신 척하고 몰래 쏟아 버리었다. 궁중의 평온을 위하여는 그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아니할 말로 할아버지같은 상감을 모시고 청춘을 보낸 이 왕비는 순조 4년 회갑을 맞던 해 세상을 떠났다. 관향은 뒷날 서가로 이름을 떨친 추사 김정희가 그 가문이다. 탄강하신 동네 이름을 따서 세간에서는 `한다리마마`라고 부르곤 하였다. 능침은 영조대왕과 함께 원릉을 봉해 현재 동구릉에 들어 있다. 그런데 한다리는 달리 보면 한다리. 다리 하나인 귀신을 독각귀 곧 도깝이라 하여, 그 친정댁 일문을 `도깝이 김씨`라고 했던 것인데, 멋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 김가고 김씨만 보면 도까비라고 조롱을 하곤 했으니 웃기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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