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최술의 어머니
잠곡 김육에게 좌명, 우명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분 다 명석한 두뇌에 성실한 근무태도로 많은 공적을 남긴 분들이다. 두 분 중 맏이 좌명공 댁 하인으로 최술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건만, 대단한 어머니여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게 키워 내놓았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 똑똑하고 사리에 밝으며 또 글을 제법 알아서, 귀계가 호조판서가 되자 서리로 기용해서 부리기로 하였다. 호조란 요즘으로 치며 재무부와 같은 곳으로 나라 살림을 총괄하는 곳이라, 속을 알지 못하는 놈은 무슨 부정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놓고 임명해 쓰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하루는 그 어머니가 판서댁으로 찾아왔다.
“그놈의 구실을 떼어서 내쳐 주십시오.” “남들은 시켜 달라고 문턱이 닳게 드나들며 졸라대는 자린데, 할멈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자리를 마다 하는고?” “그래서 하는 말씀이옵니다, 대감! 이 늙은 것이 일찍 홀로 되어 가난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도 저놈 하나 사람답게 키워 내려고 무진 애써 왔사온데, 이놈이 글씨를 반듯하게 쓴다는 재주 하나로, 대감 눈에 띄어 구실을 얻어 다달이 타는 요(봉급의 옛말)로 밥을 먹게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어느 부잣집에서 놈이 재상댁에 공역 사는 것을 보고 사위를 삼았습지요. 그래 그 아이가 요새 제 처가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글쎄 이런 말이 들려오지 뭡니까? 하루는 반찬 투정을 하면서 `이렇게 맨 생선국을 끓여 놨으니, 이런 반찬으로 어떻게 밥을 먹으라는 거여?` 제놈이 배 곯리지 않게 된 지가 며칠이나 됩니까 불과 십여일 사이로 저따위로 사치하고 방자한 생각을 갖게 되다니... 오래도록 재물을 다루는 관청에 두었다가는 큰일나겠습니다. 호조라면 큰 돈 만지는 관부가 아니겠습니까? 저따위로 마음씨를 쓰다가는 그 마음이 저도 모르게 날로 커서 끝내는 죄를 저지르고 말 것이라, 늙은 것이 놈의 형벌 받아 죽는 꼴은 차마 못보겠어서 그러는 것이옵니다. 대감께서 갸의 글씨 재주를 아껴 떼어 보내기 싫으시거든, 그저 저희 식구들 주리지나 않게 먹여 살려 주시면 되지, 제발 저놈이 건방진 생각을 못 갖도록, 단단히 신칙해 부려 주셨으면 하옵니다.”
대감은 할멈의 하소연을 듣고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알았네, 할멈의 소원이니 내 들어 줌세, 그리고 할멈의 아들이니까 잘해 낼거야.”
그 어머니의 소원대로 나날이 생활용품을 대어 주어 살림을 시켜 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이런 일은 옛날 조괄의 어머니와도 맞먹는 얘길세.” 그러면 조괄이란 과연 누구인가?
중국의 옛날 전국시대, 나라 안이 여러 세력권으로 갈려 전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을 때 일이다. 서쪽으로 진이라고 강성하고 무도한 나라가 있었는데, 툭하면 동으로 진출하여 이웃나라를 쳤다. 그들과 지경을 접하고 있는 조나라에는 유능한 노장군 염파와 문신으로 인상여 같은 이가 있어, 강한 진나라도 거기엔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영토 확장에 눈이 뻘건 진나라가 한나라로 침입해서, 조나라에서는 원로장군 염파에게 대군을 주어서 한나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경험 많은 노장군 염파는 자신대로의 전략이 있어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염장군의 속셈을 알 수 없는 진나라에서는 슬그머니 겁이 났다. 그의 병법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간첩을 시켜 슬그머니 유언비어를 퍼뜨려 헛소문을 내었다.
“염파 장군의 손속은 이미 다 아는 일이라 겁날 것 없고, 조괄이 대장군이 되는 것을 진나라에서는 제일로 겁내고 있다.”
마침 아비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애송이 임금 효성왕은 쉽게 그들 손에 놀아났다. 헛소문을 믿고 노장군 염파 대신 조괄을 사령관으로 앉힌 것이다. 조괄은 자칭 전술로는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는 경망한 작자였다. 어려서부터 병법과 용병을 배우기는 했으나, 그의 아버지 조사는 그를 미덥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전쟁이란 위험이 따르는 것인데, 그애는 너무 쉽게 그것을 나불거린단 말이오. 나라에서 그놈을 장군으로 삼는 날이면 앞날이 위험하지.” 자기 부인에게 들려 준 얘기다. 그런데 남편이 죽은 뒤 나라에서는 기어이 그 주책떠는 조괄로 군사를 지휘하게 한 것이다. 지자는 막여부라는데, 유능한 장군인 남편이 일러준 바도 있고, 어머니 자신도 큰소리나 탕탕 치는 아들이 사령관직을 맡는 것이 못 미더웠다. 여자의 몸이건만 “조괄로 장군을 삼는 것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왕에게 글을 올렸으며, 왕은 글을 보자 직접 조괄의 어머니를 불러서 물었다. “그건 어쩐 까닭이오?” “예전에 그애 아버지가 대장이 됐을 때는 겸손하고 친구를 아꼈으며, 공에 임하면 사가 없고, 재물을 탐내지 않았으며, 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게 된 후부터는 집안 일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괄이란 놈은 상장군이 되며부터, 부하들이 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상으로 내리시는 물건이 있으면 이를 독차지하고, 날마다 값싸게 파는 땅이나 집이 나지 않을까, 그런데만 정신을 쏟고 지낸답니다. 제발 그에게 내린 제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왕도 똑같은 친구로 조괄을 절대 신임해, 이 떠벌이 대장은 진나라 장군에게 참혹한 패전을 당해, 지휘 책임을 물어 조괄은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는 임금의 배려로 연좌되는 것만은 모면하였다. 임진왜란 때 도원수로 활약한 권률 장군의 이름지은 의도를 보면 복 많이 받고 귀히 되라는 그런 뜻이 아니다. 률자는 바로 두려워서 떤다는 “떨률”자다. 권은 “권세권”, 출세하여 권력을 쥐고 권세있는 자리에 오를수록 혹시라도 분수에 넘치지나 않을까 조심하고 떨라는 원대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내 복으로 내가 잘 사는데, 누가 감히 날 어쩌랴?” 이것은 확실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복을 깎아먹는 손복의 행위이다. 옛 어른들은 특히 할머니들은, 아이들이 밥 먹고 나서 `아유, 배 불러라` 소리도 못하게 하셨다. 매사에 조심하고 고맙게 여기며 사는 것이 우리의 오랜 전통이다.
살얼음판 같은 벼슬길에서 저 잘났다고 꺼정꺼정 하다가, 얼음이 꺼져 빠졌다면, 동정은커녕 아마 웃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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