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신으로 남아있는 임경업
조선조 중엽에 임경업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장수로서의 지략이 뛰어나 명성이 일세를 덮어 국내는 물론이요, 이웃나라에까지 그의 명성을 자자하였다. 그러던 중 만주족이 일으킨 청나라와 불화가 생겨 나라에서 국방에 크게 신경을 쓰게 되자 인조대왕은 그를 의주 부윤으로 임명하였다. 그가 버티고 있는 한 적들도 어쩌지 못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의 14년(1636년) 겨울, 적은 대군은 거느리고 꽁꽁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침범해 왔으니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적들은 임경업 장군과 마주치기를 꺼려서 압록강 중류로 건너 왔기에 장군도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조정은 두달 가까운 동안을 남한산성에서 농성하여 버티다 끝내는 삼전도에 내려와 굴욕적인 화평외교를 맺음으로써 국란을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명나라의 마지막 저항세력이 진을 치고 있는 가도를 공략하겠으니, 군사를 내어 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이미 전쟁은 끝나 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 있는 터라, 울며 겨자먹기로 아니 따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유림과 임경업 두 장군이 징벌되었는데, 유림은 병자호란중 유일하게 잘 싸운 것을 인정받아 청나라에서 요구해 온 것이다. 군사를 몰아 가도가 마주보이는 육지까지 진군했는데, 청나라는 우리 부대에게 선봉을 서라고 한다. 명나라의 잔여군이 맹렬하게 저항하면 우리가 많이 다치고 청의 군대는 편하겠다는 욕심이요, 또 처음 합동작전을 하는데 우리 군대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임경업 장군은 그들의 요구를 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군사를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명의 잔여 군대는 끝까지 버티는 데 쓰려고 대단한 양의 보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보화를 우리 군대가 차지하게 될 것이니 한밑천 잡아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의 전쟁은 군사들에게 약탈할 기회를 주어 용기를 북돋우던 터라 그런 유언비어가 통했다. 이 정보는 곧 그들의 수뇌부에 알려졌고 싸우지 않고 우리 차지의 보화를 그냥 새치기한다면 무슨 맛에 싸우겠냐는 의견이 일어 선봉은 청의 군대로 교체되고, 우리 군대는 오랫동안 친교를 맺어 온 명나라 군대와 싸우지 않고 뒷전에서 구경이나 하게 되었다.
청나라 군대는 부지런히 나무를 켜서 조그만 배를 수없이 만들고, 그 배에 바퀴를 달아 캄캄한 밤을 틈타 군사들이 나눠타고 섬의 뒷편으로 상륙해, 그것을 끌고 산등성을 기어올라 정면에서 대적하고 있던 청의 군사와 합세하여 일시에 공격하니 성안은 크게 혼란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도독, 심세구 등 200여 명의 명나라 장성이 모두 죽고 절개를 지키려고 목숨을 버린 부녀자가 무수하였다. 물론 청군은 무수한 보화와 가축 등을 싣고 돌아갔으나 이 싸움으로 청군사도 피해가 컸다.
이후 임, 유 두 장군은 적극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이 우리 조정에 처벌을 의뢰하여 벼슬이 깎이고 하였으나 목숨은 무사하였다. 그런 뒤의 일이다. 임경업이 청나라 군대의 부장으로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어느날, 군사들과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 청의 황제는 재미있는 경기를 하나 제안하였다. 맨손으로 40명씩을 거느려 진을 치고는 번갈아 습격해서 공격한 쪽이 잡히거나 지켜내지 못하면 지는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장수들은 머리를 짜서 제각기 진을 쳤는데 그 모양이 각각이다. 임경업이 40명으로 십자를 그려 서로 등을 대고 서게 하니, 진이 허술해 보였다. 이어 다른 부대가 쳐들어 오니 금시에 진형을 바꾸어 겹으로 둘러싸고 몽땅 붙잡고 말았다. 진이란 그냥 줄로 늘어서서만 되는 것이아니라 임기응변으로 대형을 바꾸면서 다음 태세에 임하는 데 묘미가 있다.
한 예를 들어 산골짜기 양쪽으로 적의 복병이 있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줄을 맞춰 진군하면 복병은 적의 세력을 둘로 쪼갤 생각에 대열의 한복판 쯤으로 쳐 나온다. 이때 둘로 짤린 후미의 군대는 크게 놀라 후퇴하는 것같이 물러나고 숨어있던 적병이 앞으로 몰려 나왔을 때 포를 쏘면서 앞서가던 한쪽의 군대도 되돌아 복병을 협공하게 되니 적은 오히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그런 꼴이 되는 식이다. 임장군도 그렇다. 오는 적을 잡아야겠는데 밀집부대로는 그것이 안된다. 그래서 대열을 흐트려 놓은 것도 모르고 적은 덤벼들다가 혼이 난 것이다. 그 뒤 임경업은 끝까지 혼자의 몸으로 국세를 돌이켜 보려고, 무진 애를 쓰며 파란 많은 일생을 보내다 결국 청의 미움을 받아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의 중책을 가지고도 살짝살짝 전쟁을 피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던 김자점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경업에게는 절세미인인 소실이 있었는데 김자점은 그 여인을 자기 소유로 할 욕심으로 임경업을 죄로 얽어 모진 형벌로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그도, 왕명도 없이 유능한 인재를 함부로 죽였다는 죄로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는데 전란 때부터 그의 간사한 행동에 분개한 백성들이 그의 시체를 발기발기 찢었다 하여 `자점이 점점이라.`는 말까지 오늘날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서해 연평도를 중심으로 토속신앙에 임경업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미처 풀어보지 못한 그의 재능과 억울한 죽임을 동정하는 민심이, 그를 신의 영역으로까지 받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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