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객지에서 어떻게 지내는공?
조선조 초기 황희 정승과 나란히 명재상으로 치는 맹사성은 청렴하고 소탈한 점에서도 서로 통하는 분이다. 고려 공민왕 9년(1360년)에 나, 우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조선조에 들어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쳐 세종 9년에 좌의정에까지 오른 분이다. 출천지효로 열살 적에 이미 자식된 도리를 다하여, 어머님이 돌아갔을 때는 이레 동안이나 식사를 못했고, 장사 뒤에는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아 죽을 먹으며 3년을 바쳤더란다. 정성으로 산소 앞에 심은 잣나무를 멧돼지가 무게질러서 말라 죽자, 어린 효자가 통곡통곡하였더니, 이튿날 그 돼지를 호랑이가 물어가니, 모두들 효심에 감동된 때문이라고 하였다.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짬을 내, 고향인 온양 땅으로 성묘차 다니곤 하였는데, 항상 구지레한 차림으로 소를 타고 통소를 불며 오르내리니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한번은 양성과 진위 두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맹정승이 귀성한 길에 통과하신단 말을 듣고, 예의 갖춰 환영하려고 큰 길에 나와 군막을 치고 대기했는데, 기다리던 정승행차는 아니 오고 웬 영감태기가 통소를 불며 소를 타고 가기에, 혹 정승 행차에 결례가 될까 하여 사람을 보내 나무랬다.
“어인 사람이기에 그런 행색으로 지나가는가? 곧 귀하신 분이 지나실게니 비켜 가도록 하라.”
그랬더니 소 탄 영감이 히죽이 웃으며
“온양 사는 맹고불이가 제 소 타고 저 갈 길 가는데 웬 참견인가고 여쭈어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두 고을 원이 허둥지둥 달려가면서 물건을 챙기다가 인뒤웅이를 언덕 아래 깊은 소에 빠뜨리고 소란을 떨어서, 뒤에 그 곳을 침인연이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고불은 그의 별호고, 인뒤웅이는 관인을 넣어서 항시 갖고 다니는 상자다. 이번엔 온양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채 저물기 전에 용인 어느 원에 들렀을 때 얘기다. 원이라면 사리원, 조치원, 퇴계원 등 지명에도 많이 나오는데 당시에 여행객을 무료로 재워주던 시설이다. 커다란 방 두엇과 대청을 지어 불은 늘 뜨뜻이 때 주고, 식사때가 되면 원지기 하인이 그릇을 갖고 와 진지쌀 내어 줍쇼 하여, 양식을 거둬다가 저희 밥할 때 얹어 지어서는, 또 큰 그릇에 담아 갖고 와 각자 그릇에 나눠 주는 것이 식이었다. 그러니까 여행객은 길양식이라고 하여 저 먹을 쌀을 지니고 다녀야 했고, 찬합에 반찬을 담아 가지고 다니며 때마다 꺼내 먹어야 했다. 이부자리도 따로 없어서 대개는 입은 채 누워자고, 혹 접요라고 담요같은 것을 말 안장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
맹정승이 들어와 보니 선객이 이미 들어 있는데, 타고 온 말이랑 모두 호화롭고, 데리고 온 수화도 벅적거렸다. 공이 들어가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있으려니, 손짓해 부르면서 같이 앉아 이바구나 하자고 한다. 그의 요청대로 마주 대해 앉자, 상대가 안을 내는데 이쪽에서
“...는 공?” 하면 상대방에서 “...당.” 하고 대답하는 장난을 하자는 것이라.
그것 좋다고 고불부터 시작하였다.
“어디 사는 분인데 무슨 용무로 어딜 가는 공?” “영남 사는 사람인데, 녹사 취재하러 간당.” 하는 것이다.
녹사는 정부의 기록을 담당하는 최하급 관리여서, 대우가 아전이나 다를 바 없는 미관말직이요, 취재라면 요새말로 테스트하는 것이다.
“내가 한자리 시켜 줄공?” “당치도 않당.”
공의 행색을 보고 공연한 소리 말라는 것이다. 몇 가지 더 문답하며 담소하다가 자고 헤어졌는데, 며칠 뒤 정부에 않았으려니, 예의 영남 선비가 차례를 따라, 취재차 들어오는 것이다. 공이 먼저 물었다.
“아사! 이 객지에 어떻게 지내는 공?”
선비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그때 그 노인이라, 넙죽업드리면서
“죽여지이당.” 해서 둘레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였다. 공이 찬찬히 그날 얘기를 하며, 웃고 채용해 주었는데, 사람이 성실하고 주변성이 있어서 차츰 자리를 높여 몇 군데 수령까지 지냈다는 얘기다. 이것이 유명한 공당문답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병조판서가 결재서류를 갖고 공을 댁으로 찾았더니 마침 비오는 날이라 집이 허술하여 밖에서는 가는 비 오고 집안에서는 굵은 비가 와서, 군데군데 주룩주룩 새는 것이 아닌가? 그 판서는 마침 집에 행랑채 짓는 역사를 하고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로 정승댁도 저러한데, 내 처지에 과분하다면서 공사를 중지시켰다니 그 또한 뜻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적고 보면 그런 대감이 조정 공사는 어떻게 처리하랴 할지 모르나 그게 아니다. 법과 풍기를 다루는 대사헌직에 있을 때는 당시 빽을 믿고 귀하신 몸짓을 단단히 하던 부마 조대림 집대문에다 먹칠을 하고 그의 과람한 행동을 치죄하였으니 대단한 배짱이다. 그러한 기질 때문에 맹정승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마터면 죽을 뻔 하기도 했는데, 영의정 성석린 등 중신이 감싸서 귀양갔다 풀려나기도 했다니, 조정의 기강을 어떻게 바로 잡았을까는 짐작이 간다. 물론 청백리로 선록되고, 효자 정문이 내렸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 제정에도 맣은 공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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