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의주에서 꿈에 선조대왕을 본 임백수
임백수(1797~?)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치호이다. 순조 25년(1825)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조상의 공덕으로 세자 익위사의 부솔에 보임되었으며, 헌종 5년(183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동지 부사의 중책을 맡아 의주에 도착하였으나 병이 자주 위독해서 압록강 건너는 날짜를 세 차례나 물리기까지 하였다. 하루는 그가 목침을 베고 누워 그의 셋째 아들 임경준에게 말하였다.
"내가 꿈에 선조대왕을 배알하였더니, 당시의 명망이 대단했던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모두 대왕을 뫼시고 서 있었는데, 대왕의 말씀은 온순하고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울리는 듯하여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오히려 귀에 남아 있으니, 이것은 그저 부질없는 일만은 아니다. 기록하여 두도록 해라."
임경준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임백수가 갑자기 일어나 두건을 씻고 띠의 먼지를 털어낸 뒤 가마를 타고 곧장 취승정으로 갔는데, 그곳은 바로 선조대왕께서 잠시 머무신 곳이었다. 임백수가 며칠 동안 병으로 앓으면서 누워만 있었던 터에 갑자기 이런 우발적인 행동이 있었으므로 좌우에서는 놀라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번갈아가며 찾아가 중지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고 말았지만 모두들 그의 기력이 손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런 탈도 없이 돌아왔고 이튿날은 그대로 병을 참으면서 압록강을 건넜는데, 그의 병이 점차 회복되는 것이 마치 신명이 돕는 듯하였느니, 어찌 선조대왕의 혼령이 그에게 이르렀던 탓이 아니겠는가?
그 뒤 임백수가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탄핵한 이로 평안도 중화군에 귀양 가서 주 첨지의 이웃집에 붙어 지내다가 한달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5년 전의 꿈에, 어느 곳에 이르러 판서 신석우, 조석우와 함께 셋이서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는데, 꿈에서 깨어났어도 너무나 또렷이 기억이 되기에 그 연유를 몰랐더니만 이번에 주 첨지의 집에 가서 보니 문이며 대청이 영락없이 꿈속에서 두 분의 판서와 이야기하였던 그곳이었다. 모든 일은 다 까닭이 있어 정해지는 법이니 남을 탓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의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봉조하가 되었다.
필명은 천하에 떨쳤으나 운명이 기구했던 김정희
김정희(1786~1856)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 호는 완당 또는 추사이다. 순조 9년(180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0년 뒤인 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가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번암 채제공이 그 집 앞을 지나다가 그 글씨를 보고 누구의 집이냐고 물었더니 참판 김노경의 집이라고 하였는데, 참판은 바로 추사의 아버지였다. 채제공이 김노경의 집안과는 대대로 전해오는 혐원이 있어서 서로 만나지 않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떠나 특별히 그 집을 방문하자, 김노경이 몹시 놀라며 말하였다.
"각하께서 어인 일로 소인의 집을 찾아주십니까?" 채제공이 대답하였다. "대문에 붙여 있는 글씨는 누가 쓴 것이오?" 김노경이 응대하였다. "소인의 아이가 썼습니다." 채제공이 말하였다. "이 아이가 틀림없이 명필로 한 시대에 명성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기필코 그 아이의 운명이 기구해질 터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해서는 안 되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존귀하게 될 것이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평안 감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조진관(조엄의 아들)이 광주 부윤으로 있었는데 관할 지역 내인 남한산성의 군량미를 향리가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그 책임자로서 파직된 일이 있었다. 김정희가 비록 명필로 세상에 알려지기는 하였지만 익종(헌종의 아버지)이 조진관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세자빈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듣고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장리의 손녀를 어찌 한 나라의 국모로서 모범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로 조정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결국 이 사건 때문에 김정희도 제주도로 귀양 가서 10년을 지내고서야 돌아와 벼슬이 겨우 참판에 이르렀으나 후사가 없었다.
노루가 간 길을 따라가서 사형을 면한 이인응
이인응(?~?)의 본관은 전주이다. 인조의 동생인 능원 대군의 후손이다. 상계군(이담)의 후사로 입양하여 이름을 호로 고치고 경평군에 대물림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철종 11년(1860)에 외척을 비난한 사건으로 귀양 가게 되어 작호가 환수되고 본 이름인 이세보로 불리다가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나서 조선조 왕실 및 그 일족의 족보를 통합할 때 이름을 인응으로 다시 고쳤다. 처음에 이인응의 동생 이택응이 철종 때 충량과에 발탁되어 특명으로 한림에 임명되었으나, 그 당시 외척으로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부당하다고 아뢰고 탄핵함으로써 그 특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러자 철종이 크게 노여워하게 되었는데, 임금의 노여움이 무서워 떨 정도로 대단해지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인응이 그의 동생 이택응을 위하여 임금에게 몰래 호소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여겨, 일제히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였다.
신하들의 집단 행동에 몹시 놀란 임금이 여러 차례 타이르는 유시를 내렸으나 그들은 도성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대간의 공론은 잇달아 발의되어 이인응을 만약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매우 격렬하게 탄핵하자, 임금도 어쩔 수가 없어서 이인응을 신지도에 귀양 보내고 위리안치하게 하고 소나무를 베어다 그 집 앞에 심게 하였다. 그런데 그 베어다 심은 소나무가 모두 살아나 잎새가 푸르디 푸르고 그 이듬해 봄에는 송화가 활짝 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 뒤 4년 만인 철종 14년(1863)에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다시 임금에게 이인응을 잡아다 국문하기를 권하고 이어서 사약을 내리도록 명하게 하여 금부도사가 이인응을 결박하여 호송하는 도중 천안 지역의 갈림길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노루 한 마리가 샛길로 넘어가거늘 이인응이 도사에게 청원하였다.
"방금 노루 한 마리가 샛길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좋은 징조인 듯하며, 이 쪽으로 가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 같으니 이 길을 따라서 가게 해 주시오."
도사가 그 길로 가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사약을 가지고 내려 온 금부도사는 큰길을 따라갔었기 때문에 길이 서로 어긋나게 되었다. 그럭저럭 과천읍에 이르니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인응의 신병이 갑자기 발작하여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도사가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 가도록 하였는데, 그날 밤에 철종이 승하하고 이튿날 그를 용서하는 왕명이 내려 마침내 사형을 모면하고 곧바로 차례를 뛰어넘어 당상관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고 승록대부로 승진하니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 뒤 고종 32년(1895)에 명성왕후의 참변을 듣고 통곡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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