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소탈한 천성을 타고난 화가 김홍도
김홍도(1745~?)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사능, 호는 단원이다. 그림 솜씨가 뛰어나 산수, 인물, 화조, 영모 그림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정조 때 대궐 안에 그림을 그려 바쳤는데 그림 한 폭이 올려 질 적마다 임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임금이 어느 날 대궐의 벽에다 흰색의 칠을 하게 하고 거기다 바다 위의 모든 신선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그는 내시를 시켜 진한 먹물 몇 되를 받들게 하고 그림 폭에서 비켜나 옷을 걷어 올리고 서서 붓을 휘둘러 대는데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비가 쏟아지듯 하더니 몇 시간이 채 안 되어서 완성시켰다.
그가 조상의 공덕을 관원이 되어 연풍현감에 이르렀다. 임금이 금강산 네 고을의 산수를 그리도록 하면서 여러 고을에다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게 명하였으니 모두가 특별한 은혜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간혹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팔려고 하는데 매우 아름답고 탐스럽기는 하였지만 가진 돈이 없어 그 매화를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단원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 자가 있어 매화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3천 전을 받았다. 그 중에서 2천 전은 떼어다 매화를 사고, 8백 전은 떼어다 술을 사다가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불러모아 매화시를 지으며 마시고, 나머지 겨우 2백 전으로 쌀이며 땔감을 사들일 생활 밑천으로 접어두고 하루 앞의 생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의 소탈함이랄까, 천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의 아들 김양기는 호가 긍원인데 그도 역시 그림을 잘 그려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내력과 법도가 있었던 것 같다.
산은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은 산수화가 최북
최북(?~?)의 본관은 무주이고 초명은 치이며, 자는 칠칠이다. 세상에서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고, 이름 자인 '북'자를 파자하여 '칠칠'이란 자를 쓰며 당시에 행세하였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쪽 눈이 멀어서 항상 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술 마시기를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여 한번은 금강산 구룡연에 들어가 술에 몹시 취하여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다가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천하에 유명한 최북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드디어 몸을 던져 물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때마침 이를 보고 구원해 준 사람이 있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술을 마셨으므로 저자 안의 술심부름꾼이 술병을 가지고 오면 그가 번번이 모두 마셨기에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웠다. 그가 평양과 동래, 두 곳을 유람하였는데,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그가 머무는 집의 문 앞까지 따라와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하는 자가 잇달았다.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 달라고 간청하자 그가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으므로,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물은 왜 그리지 않습니까?" 최북이 쥐고 있던 붓을 내던지며 대답하였다. "허허 이 종이 밖에는 모두가 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린 그림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데도 값을 적게 주면 번번이 성을 내어 꾸짖으며 그 그림폭을 찢어버리고 남겨 두지 않으며, 간혹 그린 그림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그 값을 지나치게 많이 주면 큰 소리로 껄껄 웃다가 그 사람을 툭툭 치면서 그 돈을 되돌려 주고, 문 밖에 나가 다시 사람을 불러다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녀석은 값도 제대로 모르는 멍청이야."
스스로 호를 호생자라 하였다. 그는 성격이 오만하여 남이 하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하지 않았다. 한번은 서평 공자와 1백 금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었다. 그가 한창 우세한 국면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서평 공자가 한 수만 물러 달라고 하자, 최북이 바둑판을 쓸어버리고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단정히 앉아 말하였다.
"바둑은 본래 장난 삼아 두는 것인데 되물러 주기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평생 동안 한 판도 둘 수 없게 됩니다." 그 뒤로 다시는 서평 공자와 바둑을 두지 아니하였다.
또 언젠가 정승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 문지기가 그만 그의 성명이나 호를 부르기가 거추장스러워 주인에게 최 직장이 오셨다고 적당히 고하였더니, 최북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째서 정승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직장이라고 부르는가?" 그러자 문지기가 물었다.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 최북이 또 되물었다. "내가 언제 직장이 되었는가? 직함을 빌려서 나를 높이 불러 주려고 한다면 어찌 정승이란 호칭은 놔두고 기껏 직장으로 부른단 말이냐?' 정승을 만나지도 않고 그대로 되돌아 가버렸다.
최북의 그림이 세상에 전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최산수라고 불렀다. 금릉 남공철이 이단전의 소개로 산방에서 최북을 알게 되었다. 최북이 남공철에게 말하였다.
"국가에서 수군 몇 만 명을 요소에 배치한 것은 장차 왜적에 대비한 것이긴 합니다만 왜적은 해전 연습만 필사적이 데 비하여 우리나라 풍속은 해전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적이 쳐들어오더라고 우리가 바다로 나가 응전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저들은 저절로 물에 빠져 죽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삼남의 백성들을 괴롭히면서 소란을 떨게 합니까?"
다시 술을 가져다 새벽녘이 되도록 마시면서 대화를 계속하였다 세상에서는 최북을 술꾼이니 그림 그리는 아전이니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미치광이로까지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조리가 있고 넌지시 비꼬는 내용이 많았다. 이단전이 말하였다.
"최북은 글 읽기를 좋아하면서 경저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린 임희지
임희지(1765~?)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경부, 호는 수월도인이다. 그의 사람됨이 기개가 높고 지조가 있었으며 술을 좋아하여 여러 날을 술에 취한 상태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는데, 대나무를 그리는 솜씨는 표암 강세황과 명성이 비슷하였지만 난초 그림은 단연 그보다 뛰어났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는 번번이 '수월'이란 두 글자를 써서 그것이 그림의 내용과 연결이 되게 하고, 간혹 그림에다 글씨를 쓸 경우에는 마치 도교에서 전하는 부록(예언서)처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글자의 획도 기이하고 고색을 띠게 하여 다른 사람이 쓴 글자와는 특이하게 하였다.
그는 또 피리를 잘 불었으므로 그에게 배우는 자가 많았다. 집안에 남은 물건이라고는 없었고 한 명의 첩을 데리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정원에다 꽃을 가꿀 형편은 못되지만 이 계집이 좋은 꽃 한 떨기 구실은 제대로 한다오."
거처하는 집은 몇 칸에 지나지 않고, 반 이랑도 채 안 되는 빈 터에다 못을 파서 사방 몇 자 정도 되기는 하였으나 물을 얻을 수가 없으므로 쌀 일은 물을 모아 그곳에다 부으니 조그마한 연못이 꾸밈없이 커 보였다. 그리고는 그 못가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며 말하였다.
"나의 호를 수월도인이라고 한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뜻에서이니, 달이 어떻게 물을 가려가며 비추겠는가." 과히 그의 풍류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였다.
그가 다른 책은 가진 것이 없고 오직 "진서" 한 부만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배를 타고 교동으로 가려고 하는데 바다 가운데 이르러 갑자기 거센 비바람을 만나 거의 건널 수 없게 되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부처와 보살을 불러대자, 임희지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일어나 시커먼 구름과 흰 파도 사이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얼마를 지나 비비람이 잠잠해지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이 한번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바다 가운데서의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기이하고 장엄한 진풍경은 아무나 구경할 수 없으니 춤을 안 추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가 거위의 깃을 엮어 옷을 만들고는 달 밝은 밤에 두 개의 상투를 틀고 맨발에 거위 깃옷을 걸치고 생황을 가로로 불면서 걸어가니, 보는 이들이 정말 귀신이 나타난 줄 알고 모두 도망쳤는데, 그의 미치광스럽도록 꾸밈없는 행동이 대체로 이런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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